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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른 곳보는 것과 행함(요한복음 5:17-1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06.20 16:12
▲ Giovanni Domenico Tiepolo, 「The Miracle of the Pool of Bethesda」 ⓒGetty Image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치유의 이적을 행하신 이야기입니다. 보통 예수님의 치유 이적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선포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질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의미로 전달됩니다. 우리가 치유를 바라며 예수님께 간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방식의 해석이나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치유 사건들을 단순하게 해석해버려서 본문이 가지고 있는 다른 의미들이 전부 훼손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또 단순 치유 사건으로만 보았을 때 발생하게 되는 본문의 문제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고, 요한복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또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명절인지 모르겠지만,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 여정 중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에 가시게 됩니다.

베데스다는 아마도 히브리어 ‘베이트 헤세다(בית חסדא)’, ‘사랑의 집’ 또는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로 붙어졌을 것인데, 이 지역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 2절에 나타난 설명은 정확한 지역을 묘사하고 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지리적 혼란을 줍니다.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연못에는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여주는데, 이때 처음으로 연못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이든 다 고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38년 동안 처음을 차지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던 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우선 이 설명 속에서 약간 위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병이든 다 고칠 수 있다는 초자연적인 현상 자체도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점은 우리가 이런 연못의 기적을 은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못 고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침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선착순 경쟁에서 이긴 단 한 사람뿐입니다. 심지어 천사는 ‘가끔’ 물을 움직였기 때문에 이 물이 언제 움직일지 알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에게 출발 시간이 언제인지 알려주지도 않는 선착순 경쟁을 시키고, 그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만 전해지는 은혜는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천사가 아픈 사람들을 상대로 펼치는 잔혹한 희망고문일 뿐입니다.

이후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머문 지 38년 된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를 고쳐주신 후 예수님께서는 바로 자리를 피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로 사람들로부터 피하셨기에 병 고침을 받은 사람도 누가 자신을 고쳐주었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38년간 머물렀던 환자는 운 좋게도 예수님의 눈에 띄었기 때문에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이 본문에서 느낀 또 다른 위화감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천사의 기적을 통해 병을 고친 사람이나 예수님을 통해 병을 고친 사람 모두 그저 운이 좋아서 병을 고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오늘 본문에 그 이상의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아픈 이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이야기도 없고, 기적을 바라고 있는 다른 이들을 고치셨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저 운 좋은 이들이 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는 지금 당장 아니라 38년이 지난 뒤에 내려질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38년간의 고통을 무시한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 동안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은 38년을 그저 고통스럽게 누워 지냈을 뿐입니다. 이는 결코 은혜가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단순 기적 사건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5장의 본문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논쟁’과 맥을 같이 합니다. 10절에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을 본 유대인들은 그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이동했다는 점을 질책합니다. 또 16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셨다는 사실로 인해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16-18절은 초대교회 시대의 상황이 담긴 이야기가 첨가되었다고 봅니다. 16절에 나타난 박해는 예수님을 향한 박해가 아니라 초대교회를 향한 박해가 투영된 구절입니다. 또 18절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4복음서 중에서 가장 후대에 기록된 요한복음이기 때문에 이런 신앙의 변화가 담겼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잘못 읽으면 안 되는 부분은 17절이라고 생각합니다. 17절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일하시기에 나도 일한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일’을 치유 이적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천사도 치유 이적을 행하고 예수님께서도 치유 이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의 일과 연결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만 볼 경우 앞에서 언급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요한복음 5장의 본문은 단순 치유 이적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과 유대인의 태도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지만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치유 받은 사건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자리를 들고 옮겼다는 안식일 법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도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안식일 논쟁을 펼치는 이야기가 나타나는데 그 본문들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만 집중합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받아들인 상태에서 안식일에도 치유하시는지 안 하시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렇기에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을 환자를 생각하지 않는 냉혈한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나타난 유대인들은 수많은 환자가 모여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유되었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치유 받은 사람이 어떤 행색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베데스다의 기적을 바라고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일반인과 구분은 되었을 것입니다.

본래도 기적이 일어난다고 전해지는 지역에서 병을 고친 사람을 보았다면 우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치유 자체에 놀라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이 유대인들에 대해서 극단적인 묘사하기 위해 앞뒤 상황은 제거되고 안식일 법을 지적하는 장면만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극단적인 묘사 때문에 요한복음 5장의 본문이 치유 이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들이 무엇을 바라보며 행동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을 보셨다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의 극단적 대조는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이는 말씀을 읽는 사람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바라보고 계신가? 아픔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인지, 자신이 내려주신 율법 자체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하나님의 일과 동일시된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는 일입니다. 이는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픈 이들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의미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전통을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픈 이들을 바라보고 계시기에 그들을 치유하는 일을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기에 나도 그렇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지로 바꿔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지는 자신의 행동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바라보시기에 치유라는 행동을 드러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전통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보기에 방금 치유 받은 사람을 향한 질책이라는 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고통당하는 이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힘들어하는 이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행동하십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신성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들은 신의 활동으로만 축소되어 읽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전인 성경은 신의 모습에 놀라워하며 경배하라고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결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저는 오늘 이 짧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일’은 비단 ‘치유’에 한정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치유 사건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치유에만 한정한다면 이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오직 신이기에 하실 수 있는 일로만 제한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치유를 행할 수 있는 신을 향해 경배하고 간구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저는 성경이 우리에게 이런 신앙 행위만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행하시는지를 설명하려면 또 다른 설교가 될 것 같기에 그 부분은 다른 설교 말씀들을 통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최근 사회 현상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생각하시는 것이 누군가를 나의 적으로 규정하고 한없이 미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런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미 몇 년 전에 혐오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씀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경향은 더 강해져서 혐오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혐오뿐만 아니라 나에게 적으로 보인다면 무조건 상대방을 혐오하며 공격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적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주변이 모두 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들을 무찔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 생각 속에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요?

최근 언론들도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서 자극적인 기사를 양산하면서 이런 혐오 현상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단순하게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같이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항상 암송하는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면 우리도 세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서로를 미워하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런 생각이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어놓고 행동을 바꾸어놓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 흐름에 따라서는 안 됩니다.

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어떤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하고 있습니까? 오늘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듯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고 대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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