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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배제되지 않게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누가복음 15:1-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1.06.23 16:37

오늘 본문말씀은 누가복음의 핵심 요체이자 동시에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핵심 요체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은 기쁨에 관한 이야기 세 토막 가운데 한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양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 다음으로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15:8~10), 되찾은 아들의 비유(15:11~32)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펼치신 일의 핵심 요체를 보여주는 것일까요? 매우 간결한 비유이기 때문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지만,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을 살펴보며 그 뜻을 헤아려보겠습니다. 첫 장면은 예수님을 둘러싼 두 부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듭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들을 반가이 맞이하는 것을 보고 투덜거립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투덜거렸다는 것은 그 상황이 자신들의 믿음에 어긋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유대의 율법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사태였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양 백 마리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양을 찾으면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기쁨을 나누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저 마음으로 기뻐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열며 기쁨을 나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잃었던 양을 되찾은 기쁨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의 말씀 끝에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사실 더 간결한 형태로 동일한 비유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18:12~14)은,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본뜻을 분명하게 집약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웃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 의미를 증폭시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도 동일합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난 다음 이웃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라 한 것은 물론 훨씬 긴 서사구조를 갖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명쾌한 비유의 말씀인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비유 자체도 간결하고, 그에 덧붙여진 해석 또한 간결하여 큰 어려움 없이 그 뜻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째서 목자가 양 아흔아홉 마리를 그냥 두고 단 한 마리를 찾아나서야 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 비유의 말씀을 보며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양들은 놔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가 너무 무모하지 않느냐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한 마리 양이 특별했기에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100마리를 꽉 채워야 되는데, 한 마리가 빠져서 그 한 마리를 온전히 채우기 위해서는 꼭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말씀이 그와 같은 공리주의적 원칙을 일깨워주는 말씀이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그 한 마리 양이 소중하고, 그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을 때 기쁨이 크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잃어버린 그 양을 찾는 일이 급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은 그 의미상 결정적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도마복음서의 유사 병행구절을 보면,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마복음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목자와 같습니다. 무리 중 제일 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놓아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갔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다음 그는 그 양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너를 귀히 여긴다.’고”(도마 107)

확실히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마복음에는 또 다른 유사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예컨대 물고기들 가운데 큰 물고기 하나 고르는 어부 이야기(도마 8), 진주를 발견한 상인 이야기(도마 76) 등이 이와 유사합니다. 이 때 그 하나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도마복음의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일상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군중 속에 파묻혀 사는 비본래적 자아를 말하는 반면 한 마리는 본래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 된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과연 어떤 것이 본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일까요? 기록연대는 늦지만 말씀의 전승과정에서 어록의 형태가 더 본래적인 것이라 간주하면, 도마의 전승이 본래적이고 다른 복음서의 전승이 변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마태와 누가의 변용은 탁월한 창조적 변용이라 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 변용은 왜곡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다른 차원으로 의미를 증폭시킨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내면적 차원의 의미를 역사적·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다른 것 같지만 복음서들 사이에 연속되는 의미를 이렇게 헤아려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의 몸의 중심이 과연 어디일까요? 아픈 곳이 그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픈 곳에 집중할 때 몸의 건강이 회복됩니다. 진정한 삶을 위하여 과연 우리가 어디에, 무엇에 관심해야 할지 복음서들은 일관되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 Jan Luyken ⓒWikipedia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 요체가 되는 까닭이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단순명쾌한 생명의 진실, 또한 역사적ㆍ사회적 공동체의 존속에 관한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그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작은 사람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연약한 지체가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가장 소중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으로 죄인들과 세리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눌 때, 이를 보고 투덜대고 비아냥거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대 이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들은 불신앙의 사람들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며 오늘 비유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성서의 진실이 이렇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에 역행하는 교회들을 어찌 해야 할까요?

마침 차별금지법제정 국민동의안이 지난 주간에 10만 명을 넘겨 국회에 정식 안건으로 발의되었습니다. 14년 이상 논의되는 가운데 그 제정에 가장 큰 걸림돌이 교회라는 건 민망하게도 만천하가 아는 사실입니다. 국민청원이 진행되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여당 의원들을 만났습니다. 보편적 인권의 가치, 헌법적 가치, 뿐만 아니라 국민여론에 비춰보더라도 그 법의 제정이 더 이상 지체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일부 개신교의 반대 목소리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과잉대표 되었을 뿐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상식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도 강조했습니다.

이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큰 안목으로 그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그저 ‘표심’에 일희일비하며 국회가 머뭇거리는 사이 국민들 스스로 나서 정식 안건으로 성사시킨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이제 9월 정기국회에서 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보편적인 가치관에 역행할 뿐 아니라 결코 신앙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억지주장에 국민의 대표기관이 휘둘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우리 사회의 청사진이 온전히 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소수자라도 안전하게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가치를 내세우는 법이라는 점에서 평등법 또는 차별금지법은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하지만 그 가치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우리 사회에서 또 다른 실질적인 대안이 강구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고, 그에 편승하여 차별과 혐오의 논리가 번지고 있는 오늘의 상황 가운데서 건강한 사회의 대안을 형성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것은 정의로울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루는 과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 지난 주간에는 보편적 사회복지의 확대와 기본소득이 제도적으로 수렴될 수 있는지 따지며 우리 사회의 전망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있었습니다(2021.6.8. NCCK 정의평화위원회 토론회).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의 문제,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는 성서의 일관된 관심사일 뿐 아니라 모든 문명사회의 관심사입니다. 오랫동안 인류사회는 절박한 필요에 따른 공공부조의 원리로 그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일종의 시혜를 베푸는 방식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하면서 업적주의에 따른 보상의 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사회보험의 보편화입니다. 그러나 완전고용을 전제로 하는 그 제도 역시 한계를 노정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고용없는 성장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대안이 보편적 기본소득입니다. 이것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지만, 근본적으로 공유부에 해당하는 것은 함께 나누는 것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기초로 합니다. 자연적인 공유부, 역사적인 공유부, 인위적인 공유부를 함께 나눔으로써 모든 사회구성원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 토론회에 참석한 분들 모두 제도적으로 혼용이 가능하고 따라서 서로 수렴할 수 있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 해당하는 한국이 고유한 모델을 만들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공감하였습니다. 전례 없이 놀라운 성장을 하였지만,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과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에서 스스로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물론 사회적 정치적 합의가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들을 두고 씨름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깨워주신 진실을 우리의 삶 가운데 구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라도, 특별히 그 어떤 연약한 지체라도 배제되지 않고 마땅히 존중받고 온전한 삶을 누리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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