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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황금시대, 생각보다 초라했다이스라엘 역사 알기 ㊳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6.24 16:31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를 정리한 후에 ‘솔로몬’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했는데, 그보다는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초기 왕정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었는지, 왕위 계승 방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다윗’과 ‘솔로몬’ 시기 행정 체계가 어떻게 바뀌어 갔는지를 세 번의 글을 통해서 다루게 되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초기 왕정 시대에 관한 「열왕기」의 기록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편집되어 있다고 봅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 각각의 왕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 그 역할에 맞는 부분을 부각하거나 축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할을 맞추기 위해 때로는 누군가의 치적이 다른 왕에게 전가된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던 타국이 바친 조공의 문제 등이 그 예입니다. 타국으로부터 세금 또는 조공을 받기 시작한 왕이 ‘다윗’인지 ‘솔로몬’인지 모호합니다. 또 ‘다윗’ 시절에는 활발한 영토 확장과 정복 활동이 있었지만 ‘솔로몬’ 시절에는 그런 활동이 전혀 없었다는 점도 조금은 이상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솔로몬’ 시절에는 각 성의 요새화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다윗’ 시절에는 정복 활동만 있었다는 점도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분명히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 집단의 각색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확대/축소와 전가는 왕의 치적에 관한 사항에만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각각의 왕에 관련된 이야기들, 예를 들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 일’, ‘다윗과 요나단의 친분’, ‘다윗과 압살롬의 대립’, ‘솔로몬의 재판’과 같은 이야기들은 각각의 왕에 대한 전승들로 보입니다.

지난 글까지 초기 왕정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은 함께 나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열왕기상」에 나타난 ‘솔로몬’에 관련된 내용만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어떤 왕이나 가능한 치적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솔로몬’이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지는 사실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집트 공주와의 혼인

「열왕기상 3장 1절」은 ‘솔로몬’이 이집트 왕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글을 처음부터 보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이에 관해 「이스라엘 역사 알기⑶ ‘이스라엘 역사라는 상상력’」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다뤘던 내용은 이집트 제18왕조 ‘하트셉수트 여왕(주전 1473-1458년)’ 시기 그녀의 동생인 ‘네페루비티’에 관한 기록이 어린 시절 이후로 사라진다는 사실에 따라 ‘네페루비티’가 ‘솔로몬’의 아내가 되었다고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해외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연대를 뒤에서부터 차근차근 쫓아오신 분들이라면 이 가설의 가장 큰 맹점이 무엇인지 이미 이해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솔로몬’과 ‘하트셉수트 여왕’ 사이에는 연대 차이가 너무나 심하게 납니다. 우리가 아직 ‘솔로몬’의 연대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등극한 시점은 주전 929년입니다. 그렇기에 솔로몬이 500년 이상 살지 않았다면 이 가설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제가 추정한 연대를 기초로 한 상태에서 ‘솔로몬’이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고 보았을 때, 이집트 연대에서 ‘솔로몬’과 겹치는 왕은 세 사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 제21왕조의 ‘시아문(주전 987-959년)’, ‘프수세네스 2세(주전 959-945년)’, 이집트 제22왕조의 ‘세숑크 1세(주전 945-925년)’입니다.

「열왕기」의 기록에 따라보자면, ‘솔로몬’이 이집트 공주와 결혼한 시점은 성전 건축 이전이었기 때문에 재위 초기로 나타나는데, 그렇게 본다면 이집트 제21왕조의 ‘시아문’의 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잘 맞아떨어지긴 합니다.

이집트 제21왕조 ‘시아문’에 관한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 알기⑸ ‘우리를 힘들게 하는 열왕기의 왕들 역사 연대’」에 적어놓았습니다. ‘시아문’이 ‘시삭’이 아니라는 점과 이 조각에 나타난 인물이 ‘시아문’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이는데, 이 조각이 ‘솔로몬’ 시대와 연결되어 해석되는 점은 약간 문제가 있긴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조각에 나타난 쌍도끼를 쓰는 사람은 블레셋을 의미하고, 「열왕기상 9장 16절」에 나타난 게셀이 ‘시아문’에 의해 정복된 지역이라고 해석합니다. 성경만으로 본다면 이 가설은 받아들일 만하게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학자가 이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블레셋 사람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특정 민족이 쌍도끼를 썼다는 어떤 기록이나 유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조각에 나타난 쌍도끼를 든 인물이 어떤 민족인지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게셀과 연결시키는 점은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이 될 뿐입니다.

▲ 시아문 부조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멤피스(Memphis)에서 발견된 ‘시아문’의 부조로, 현재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University of Pennsylvania Museum)에서 소장중입니다. 가운데 무릎 꿇고 있는 인물이 ‘시아문’으로 자신의 왕명을 받는 모습입니다. 왼쪽부터 ‘시아문’이라는 본명, 그 다음이 ‘네테리 케페르 라(라가 현현한 신성한 자)’라는 왕명이고 네모 안에 있는 이름은 ‘카 낙트 메리 마앗(강한 황소)’으로 호루스 신에게 받은 이름입니다.

그래도 「열왕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놓고 연대를 따져보았을 때, ‘솔로몬’이 혼인 관계를 맺었던 이집트 왕은 ‘시아문’이나 ‘프수세네스 2세’로 보입니다. 만약 그 왕이 ‘세숑크 1세’일 경우 그가 ‘솔로몬’의 대적이었던 ‘여로보암’을 보호해주었다는 「열왕기상 11장 40절」과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맞딱뜨리게 됩니다. 이집트 제21왕조는 국력이 약한 왕조였습니다. 이들은 하부 이집트를 다스릴 정도의 역량 밖에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왕조는 수도였던 타니스(Tanis)의 이름을 따서 ‘타니스인(Tanite)’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시아문’은 그 왕조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왕이고, ‘프수세네스 2세’는 마지막 왕입니다.

이집트 제21왕조의 입장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역량을 넓히려고 했다면 ‘솔로몬’과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집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이 경우에 국력이 약했던 이집트 왕이 게셀을 점령했다는 점은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지혜의 결정체인 ‘솔로몬’이 망하기 직전인 이집트 왕조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열왕기」가 기록되던 시기의 역사가 집단이 간과한 사실로 보입니다. 지금 성경을 읽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집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고 하면 이스라엘의 국력이 상당히 강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집트 왕실이 몰락 중이었는지 상승 중이었는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솔로몬’이 이집트 제22왕조의 시조인 ‘세숑크 1세’와 동맹을 맺고 왕실 간의 혼인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면 그의 지혜를 칭송할 수 있습니다. 아직 잠룡에 불과했던 인물을 알아보고 동맹을 맺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솔로몬’과 ‘세숑크 1세’를 동맹 관계로 엮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열왕기」에 나타난 여러 정황상 이집트 제22왕조는 ‘솔로몬’이 다스리는 이스라엘과 동맹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과 이집트 공주와의 혼인이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믿던지, 믿지 않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솔로몬’과 이집트 공주가 혼인 관계였다는 「열왕기」의 기록을 믿는다면,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솔로몬’이 이집트 제21왕조가 몰락할 줄 모르고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본다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포기하지 않고, 그가 이집트 제21왕조의 국력이 약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동맹을 맺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국력이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힘이 빠진 이집트 제21왕조와 동맹을 맺어야만 할 정도로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이 약소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솔로몬’과 이집트 공주의 혼인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의 국력을 이집트와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고자 했던 역사가 집단의 각색이거나 ‘솔로몬’이라는 왕에 대한 전설(전승)이 시간이 흐르면서 과장되어 전달되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전승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 본문이 후대 역사가의 첨가라고 봅니다.

솔로몬의 무역 활동

「열왕기상 9장 26-28절」에는 ‘솔로몬’의 해상무역 활동의 근거를 제공하는 언급이 나타납니다. 에시온게벨과 오빌이라는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과 연합하여 배를 만들고 해상 활동을 벌였습니다.

두로는 페니키아의 도시입니다. 해상무역을 통해 지중해를 누빌 수 있던 페니키아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 지역 육로를 통한 무역 활동은 탐이 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과 무역 협력 관계를 가졌다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살펴볼 부분도 있습니다. ‘솔로몬’과 ‘히람’의 계약은 「열왕기상 5장 9-12절」에 나타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아버지 ‘다윗’과 관계가 있었던 ‘히람’에게 성전 건축에 관한 편지를 보냈고, ‘히람’은 이에 응하여 목재를 예루살렘에 보냅니다.

이때 ‘히람’이 ‘솔로몬’에게 요구한 내용은 자신의 궁정을 위한 음식물이었습니다. 이 요구에 따라 ‘솔로몬’은 매년 ‘히람’에게 밀 2만 고르와 맑은 기름 20고르를 주었다고 말합니다(왕상5:11). 이후 「열왕기상 7장 13절」 이하에도 두로에서 온 ‘히람’이라는 이름의 대장장이가 나타나는데, 이는 역사가의 오류로 보입니다. 두로 왕 ‘히람’이 보낸 대장장이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두로 왕 ‘히람’과의 거래 내용은 「열왕기상 9장 10-14절」에 나타나는데, ‘솔로몬’은 20년간의 건축 활동을 마치고 건축 자재에 대한 비용으로 ‘히람’에게 갈릴리 땅의 성읍 20곳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솔로몬’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앞서 말한 건축 자재 비용을 낼만한 여력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역사가는 「열왕기상 9장 14절」에 이상한 구절을 넣어놓았습니다. ‘히람’이 ‘솔로몬’에게 금 120달란트를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히람’에게 성읍 20곳을 준 이유는 건축 자재 비용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는 ‘히람’이 금을 지불하고 땅을 산 것처럼 거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흔히 ‘솔로몬’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부르는데, 「열왕기」는 ‘솔로몬’의 왕국으로 대량의 금이 유입되었다고 말합니다. ‘히람’이 지불한 120달란트(왕상9:14), 오빌에서 가져온 420달란트(왕상9:28), 스바 여왕이 제공한 120달란트(왕상10:10), 주변국으로부터 걷어들인 세입금 666달란트(왕상10:14), 이외에도 여러 곳에 사용된 금과 은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전설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선 ‘히람’이 건축 자재 비용으로 갈릴리 성읍을 받은 이후에 그 성읍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달란트를 또 지불했다는 이야기는 맥락에 맞지 않습니다. 스바 여왕의 경우도 ‘솔로몬’의 지혜에 놀라서 달란트를 바쳤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진술들은 말 그대로 ‘솔로몬’이 다스리던 시기를 황금시대로 만들기 위한 역사가의 각색으로 보입니다. 때로 ‘솔로몬’이 오빌에서 금을 가져왔다는 이야기에 따라 ‘솔로몬의 금광’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디아나 존스’에나 나올 법한 상상력의 산물일 뿐입니다.

‘히람’이 120달란트를 주었다는 진술만 빼고 생각한다면, ‘솔로몬’과 ‘히람’의 무역에서 주도권을 가진 쪽은 두로 왕 ‘히람’입니다. 그는 성전과 궁전을 건축할 자재를 대주었고, 해상무역을 위한 기술자를 파견하였습니다. 또 건축을 위한 대장장이까지 파견해주었습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을 비교했을 때, 두로가 재원 조달 능력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우위에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반면에 ‘솔로몬’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은 매년 조공과 비슷한 형식으로 두로에 자재 용을 갚았지만, 결국 이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자 갈릴리 지역 성읍으로 그 값을 매기게 됩니다. 하지만 두로 왕 ‘히람’이 이 지역을 보며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점은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이 당시 페니키아에 비해 그리 발전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만약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은 상당히 발전했지만, 이 거래에 있어서 ‘솔로몬’이 일부러 좋지 않은 성읍을 주었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솔로몬’의 인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됩니다. 아버지 ‘다윗’과의 정을 생각해서 많은 편의를 제공한 두로 왕 ‘히람’에게 일부러 형편없는 성읍 20개를 건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로 왕 ‘히람’과 관련된 이야기와 함께 살펴볼 만한 이야기는 ‘스바 여왕’과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보았을 때 솔로몬의 무역 활동 이야기 속에 들어있습니다. ‘스바 여왕’의 이야기는 본래 ‘솔로몬’의 무역 활동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후대 역사가들이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내용을 첨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바는 아랍 최남단, 현재 예멘 남부 지역에 있던 국가로 여겨집니다. 이 지역의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주전 10세기부터 주후 6세기까지 이 지역에 몇몇 국가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중 주전 10세기경부터 5세기까지 지속되었던 국가가 스바입니다.

▲ 주전 9세기 벧엘 점토 인장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벧엘에서 발굴된 점토 인장인데, 주전 9세기 남부 아랍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작은 조각에 불과하고 주전 9세기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기에 약간의 문제는 가지고 있지만,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기에 남부 아랍 지역과 무역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진은 G. W. van Beek and A. Jamme, “An Incribed South Arabian Clay Stamp from Bethel”, BASOR 151, 1958, 9-16에서 따온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정말 여왕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녀는 남부 아랍 상단의 대표였는데 과장되어 전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낙타를 타고 왔다는 표현(왕상10:2)은 이들이 육로를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육로를 통해 이스라엘까지 이를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아라비아반도를 종단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에는 이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의 이스라엘은 해상무역에 있어서 두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육상 무역에 있어서도 스바와 같은 기술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상단을 이끌고 아라비아반도를 종단해 온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보며 감탄하여 무상으로 금과 향품과 보석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이상해 보입니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이야기는 무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상 10장 9-10절」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열왕기상 10장 13절」은 ‘솔로몬’이 그녀에게 적절한 비용을 지불하였고, 그녀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도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과 스바 사이의 거래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스바 여왕’의 목적지가 이스라엘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마 스바 상단의 목적지는 페니키아였을 것이고, 페니키아를 통해 지중해 넘어까지 무역로를 확장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주 수입원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0장 14-15절」에 나타난 세입금은 주변국에서 바친 조공이 아니라 무역로를 지나는 통행세였을 것입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바와 같이 무역로 이용에 따른 통행세를 ‘다윗’ 시대에 받기 시작했는지 ‘솔로몬’ 시대에 받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과 먼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열왕기상 5장 1절」의 진술은 국제 무역 관계가 ‘다윗’ 때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초기 왕정 시대의 정확히 언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왕기」의 진술 속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이스라엘이 국제 무역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무역을 위해 지나가야 할 국가였을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국제 무역을 활발히 진행시킬 만한 기술력이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발전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영토의 개념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무역 상단들로부터 통행세를 받는 일은 그들이 지나는 길이 자기 국가의 영토라는 개념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최소한 ‘사울’이 다스리던 시기까지 이스라엘이 각각의 성읍을 중심이 되어 영토라는 개념이 없는 연합 국가 체계였다면, ‘다윗’ 이후의 이스라엘은 성읍을 넘어서 자신들의 지역과 타국과의 경계라는 개념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타국 민족에게 세금과 같은 비용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솔로몬’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기브온 산당에서의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다윗’과 ‘사울’에 관해 살펴볼 때 다시 언급될 이야기이기 때문에 추후에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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