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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교회를 향한 종교개혁자들의 열망종교개혁의 교회관 ⑴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1.06.26 17:20
▲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종교개혁의 불꽃이 타올랐다. ⓒGetty Image

지난 2017년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단지 루터만이 아니라 츠빙글리, 멜랑히톤, 칼빈, 부쳐, 녹스와 같은 수많은 개혁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성취한 일과 함께 기억되어야 한다. 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한편으로는 성경을 떠남으로써, 또 한편으로는 성경에 인간적인 것을 첨가함으로써 부패했고 교리는 왜곡되었다고 확신했다.

“근원으로”(Ad fontes)

개혁자들은 성경, 곧 “근원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전력을 다했다. 그로써 그들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잊은 기독교의 진리를 다시 천명하고, 교회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들이 다시 천명한 진리는 성경의 존엄과 권위,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죄인의 화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능력, 세상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참된 교회의 형태 등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순수하게 가르치기를 원하였고, 이러한 순수한 가르침 안에서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과 함께 올바른 순종, 올바른 생활, 올바른 교회 형태를 원하였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이러한 순수한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예배와 교회법과 교회 윤리의 형태를 지닌 교황권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였다.

종교개혁 시대에 교회의 기초가 된 생각은 기독교의 진리는 성경이라는 하나의 올바른 형식과 표준에 따라 선포되어야 하며, 참으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의 진리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에 따르면 복음적인 교회는 바로 기독교의 진리를 순수하게 가르치는 곳에 존재하며, 교회의 모든 생활을 이와 같은 하나의 순수한 임무에 맞추고 그 임무에 따라 판단하는 곳에 존재한다. 이러한 확신과 함께 우리는 순수하고, 탁월하고, 건전한 복음의 선포 가운데 과거의 온전한 기독교의 진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 속에서 복음적인 교회는 처음에는 가톨릭교회가 갱신되고 개혁될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교황의 교회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자들이 그들의 차이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회담이 실패로 끝나고, 곧 바로 소집된 트렌트 공의회(1545)가 개신교주의의 주된 이념들을 정죄하면서 화해의 가능성은 좌절되었다. 복음적 교회들은 이제 자신들의 존재를 기독교회로서 정당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고려해보면, 교회론에 대한 개혁자들의 진지한 관심은 1540년대로부터 비롯된다고 하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첫 세대가 아니라 둘째 세대가 몰두했던 문제였다. 루터의 관심은 “어떻게 내가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면, 칼빈 같은 다음 세대의 개혁자들은 그로부터 비롯된 문제, 즉 “어디에서 내가 참된 교회를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해야했다.

루터가 갈라진 개신교파들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교회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 가톨릭교회와의 분리가 일시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540년대에 이르러 그런 재결합이 결국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개신교 신학자들은 새로운 교회 모델을 형성하는데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뚜렷이 대비되는 종교개혁의 교회모델은 칼빈에 의해 제시되고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교회, 성령의 친교와 도구

일반적으로 개혁자들은 제도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는 로마교회와 참 교회는 하늘에 있고 그 어설픈 제도적 모조품들만 땅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급진적 개혁가들에 맞서 자신들의 교회관을 형성해가야 했다. 루터뿐만 아니라 칼빈 또한 두 개의 전선에서 신학 작업을 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로마교회에 맞서 성령을 통한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적 개혁가들에 맞서 ‘보이는 교회’를 강조하며 그들의 교회관을 발전시켰다.

교회는 신약성경이 ‘성령의 친교’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교회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1:1) 이루어진다. 교회를 사람들 가운데서 사건으로 만들며, 인간의 모임과 공동체로 만드는 것은 지금도 성령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이렇게 성령은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특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공동체를 창조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삶과 고난, 죽음과 부활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며, 설교와 성례전은 성령의 도구로써 믿음을 활성화하고 양육하는 보조수단이 된다. 이러한 성령의 활동에 의하여 세계사의 한 가운데 있는 특정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말과 삶 속에서 자신들의 행위와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고백하는 일이 일어난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히브리어로 ‘카할’(קָהַל), 헬라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그리고 라틴어로는 ‘ecclesia’로 표기되며, 소집된 모임을 의미한다. 칼빈은 그것을 ‘군대’(compagnie)라고 즐겨 부른다. 그것은 그 용어가 메신저의 외치는 소리나 혹은 트럼펫 소리를 듣고 모든 곳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을 소집한 분은 하나님이다. 성령이 임할 때, 이런 사람들의 모임이 형성되어, 신자들의 군대, 곧 신실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의 군대를 이룬다. 그러므로 교회는 같은 의견, 같은 이념,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인간적 집회에 의해 형성되는 것도, 혹은 단순히 같은 신앙과 소망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교회는 그때까지 다른 견해를 갖고 서로 흩어져 있던 개인들을 ‘함께 부르시어’(convocatio) 하나의 단체로 구성하는 하나님의 소집에 의해 형성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의 모임이다.(미주 1)

따라서 그는 보이는 교회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교회는 눈에 보이는 외형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 주장은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따르는 개혁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이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주의자들에게는 전면적인 선전포고와도 같았는데,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항상 눈에 보이는 외적인 교회의 형태를 말하면서, 그 형태는 무엇보다도 교황과 종속하는 사제계급의 제도로 드러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미주 2)

그러나 개혁자들은 결코 보이지 않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개혁자들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분리되지 않고, 숨어 있는 교회는 경험되는 교회와 단절되지 않으며, 영과 육처럼 이 둘은 함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영적이다. 그 때문에 유일한 참된 교회는 지상에 머리가 없으며,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 혼자만이 교회의 머리요,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실 때, ‘눈에 보이는 교회’가 생겨난다.

칼빈은 성경 안에 교회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교회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산재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교회이다. 전자는 그 교회의 경계를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교회이며, 모든 시대의 성도들의 교제로서 정의되는 선택된 자들의 모임이다. 후자는 경험적인 현실의 보이는 교회이며,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복음을 설교하며, 그의 명령을 따라 성례전을 거행하는 모든 공동체를 포함한다. 이 교회는 선택된 자들과 정죄된 자들 양쪽 모두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어떤 개인이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딤후2:19).

그래서 개혁자는 신앙을 고백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며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와 더불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을 누구나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그는 “사랑의 판단”이라고 했다. 바로 이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교회가 개혁자들 모두의 관심사였고, 그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개혁자들은 그들의 인생을 걸었다. 그것은 그 보이는 교회가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이며(미주 3), 또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되며(미주 4),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미주 5)이 되기 때문이다.

미주

(미주 1) 칼 바르트/최영 옮김,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기도/사도신조』(서울: 다산, 2000), 208.
(미주 2) J. Calvin, Institutes,Ⅰ.pré.xxxii. 이하 Inst로 표기함.
(미주 3) Inst.,Ⅳ.i.4, 8.
(미주 4) J. Dillenberger, Martin Luther, Selections from his writings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New York: Dobleday & Company, Inc., 1961), 212. Inst.,Ⅳ.i.1. 이는 루터와 칼빈 모두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주 5) Inst.,Ⅳ.i.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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