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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의 직제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㉑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1.06.29 17:36

1. 교회의 다양한 직제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직제가 있는데, 한국 개신교에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이 있습니다. 모든 직제가 성경적 전거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알려진 직제는 목사(감독), 장로, 집사였습니다. 직제 간의 상하관계도 없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없었던 권사(勸師, exhorter)는 교회에서 전도와 봉사 그리고 권면의 사역을 감당하는 직책을 가진 신도입니다. 권사제도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 감리교회를 통해 한국의 감리교회로 전해졌고, 마침내 장로교회에서도 이 직분을 받아드리게 된 것이지요. 1955년 제40회 예수교장로교 총회에서 봉사를 잘 감당하는 여신도에게 권사 직분을 주기로 결의했습니다. 당시는 여성의 장로임직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사와 장로 사이에 권사 직분을 두어, 장로에 버금가는 예우를 한 것이지요.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직제 간의 상하관계가 없었습니다. 과제에 따라 역할이 맡겨졌을 뿐입니다. 심지어 감독도 평신도 가운데서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승인 예수님이 자신을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있다.”(눅 22,27),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섬김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는 오직 한 가지 규율이 지배했는데, 그것은 급진적 평등이었습니다. 예수 공동체 안에는 지배와 피지배관계, 특권이나 계급, 미천한 자도 고귀한 자도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5)는 것이 제자 공동체 안의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다툼이 있었습니다(막 9,33-37). 그 후, 사도 시대에는 사도직과 일반적인 소명 사이의 긴장과 갈등도 제기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친히 불러 모으셨다는 점에서, 또 부활현현의 증인으로 꼽히고 있다는 점에서(고전 15,5), 그리고 부활사건 이후 첫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안에서, 사도직과 일반적 소명 사이의 긴장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런 긴장은 후에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자리를 두고 교회들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되었습니다.

2. 바울 공동체 안의 직제들

2-1. 초대교회 가운데 빌립보 공동체 안에는 집사(diakonos)와 감독(episkopos) 직분이 있었습니다. 집사로 번역된 ‘디아코노스’는 보통 식탁 시중을 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더 널리는 천한 일에, 대게는 노예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감독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포스’는 건설사업장의 감독자, 관리사무직원, 또는 드물기는 하지만 종교예식에 관계하는 하급직원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빌립보 공동체 안에서 감독과 집사는 동료관계였지, 이들 사이에 상하관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직분을 가지고 하는 모든 활동과 소명을 ‘은총의 선물’, 또는 ‘성령의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직분을 선물로 이해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은총과 능력이 공동체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지 개인의 만족이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더욱이 직분 자체는 그에 상응하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분 자체가 ‘준비’라고 이해합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엡 4,11-13)

그러므로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타인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같은 신앙의 부름을 받고 같은 영을 선물 받은 공동체 안에서 직분은 계급이 아니고, 사제와 신도 사이, 신도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와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2-2. 그런데 사도 후 시대에는 직제가 변하기 시작했는데, 교회 안에 지도자 제도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직분의 표현 방식도 다양했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지도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도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는 것이었고(히 13,7),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이었기에, 성도들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히 13,17).

에베소서에서는 ‘목자’(엡 4,11), 그 후에 기록된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장로’(presbyter 또는 감독, 주교 episkopos)라는 직분이 있었습니다(행 14,23; 20,17; 야고 5,14; 벧전 5,5; 요 II; 요한 III; 딤전 5,1; 디도 1,5 등). ‘장로’라는 단어와 직분은 역사적으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의 그리스도교 교회 직무에 도입되었고,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거쳐서 유럽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공동체는 대체로 7명의 원로로 구성된 원로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원로제도와 ‘주교’(에피스코포스)라는 칭호 및 기능이 결부되었지만, 감독이 장로들 가운데서 수위권을 가진다는 것은 신약성경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사도 후 시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주로 ‘장로’가 지도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이들 원로단(장로단)이 지역 공동체를 지도했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도 전래의 전승을 순수히 보존하며 오류에서 보호하는 임무였습니다(행 20,28).

사도 시대 후, 교회 안에서 특별한 직위가 조성되었음은 사실이지만(벧전 5,5; 히 13,7.17.24; 살전 5,12), 그러나 그 직위에 따른 임무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행할 것, 즉 지배하지 말고 섬길 것(눅 22,26)과 영예나 권세욕을 멀리 할 것과 그 직무를 짐스럽게 여기지 말 것이 권고되었습니다(벧전 5,1-4).

“모두 자기가 받은 은사를 따라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벧전 4,10)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때를 먹이십시오. 그들을 잘 감독하십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십시오.”(벧전 5,2-3)

▲ 교회의 직제 ⓒGetty Image

2-3. 그런데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Ignatius)가 쓴 편지에 의하면 안티오키아에서는 ‘군주제의 주교(감독)직’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교는 하나님을 대리하며 원로(장로)는 주교 밑에서 사도를 대리한다는 것입니다. 주교-원로-봉사자(집사, 부제)라는 위계제도가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오래 동안 시행되었던 것이지요.

2세기로 접어들면서 이른바 ‘12사도의 가르침’(디다케)이 나왔는데, 디다케에 따르면, ‘감독과 봉사자는 주의 마음에 드는 사람, 인자한 사람, 탐욕이 없는 사람, 진실하고 신뢰가 가는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들도 예언자들과 교사들처럼 너희를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업신여겨서는 안되며 예언자들이나 교사들과 같이 존경해야 한다’(디다케 15,1-2)고 합니다.

2-4. 교회 안의 직제는 다양할 수 있으나, 모든 성도는 신앙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동등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고 초대교회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신앙공동체가 교회로 조직되고, 특히 박해기를 벗어나 국가종교 체제를 갖추게 되면서부터 직제도 위계적으로 재구성된 것이지요. 그 때부터 신앙과 직제가 서로 긴장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교회조직은 권위적 위계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런 직무의 긴장관계는 교회는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도상에 있는 나그네, 하나님 나라의 길을 준비하는 죄인들의 공동체임을 언제나 상기시킵니다.

3. 안수 받은 직제

3-1. 그런데 교회 안에는 안수 받은 직제와 안수 받지 않은 직제가 있습니다. 안수 받은 직제(ordained ministry)라는 말은 은사를 받은 자로서 교회가 성령초대의 기원과 안수를 통하여 임명함으로써 봉사를 맡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안수를 의미하는 헬라어에는 ‘cheirotonein’이, 라틴어에는 ‘ordo’ 혹은 ‘ordinare’가 있습니다. 헬라어 ‘케이로토나인’은 ‘임명’(행 14,23; 고후 8,19)이라는 세속적인 기본 뜻에서 차용된 것이며, 이 임명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을 지명하기 위하여 혹은 투표를 하기 위하여 손을 내밀다라는 원래 의미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라틴어 ‘오르도’ 혹은 ‘오디나레’는 로마법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이 용어들은 평민과는 구분되는 어떤 집단의 특별한 지위를 나타내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2. 그리스도교 초기 몇 세기에 걸쳐 교회에서 안수받은 직제로는 감독, 장로, 집사가 있었는데, 이 세 가지 직제는 교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형태였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에 의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감독(Bishops)들은 말씀을 전하며, 성례전을 주관하고, 교회의 감독과 연속성과 일치를 수행하는 대표자적인 목회자로서 치리를 행합니다. 그리고 전 공동체와 교제하면서 교회 내에서 직제상의 권위를 체계있게 승계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장로들(Presbyters)은 지역 성만찬 공동체에서 말씀과 성례전에 관계하는 목회적 사역자들로 봉사합니다. 장로들은 성도들이 기독교적 삶과 사역을 준비하도록 할 특별한 책임을 집니다. 집사들(Deacons)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사역을 수행합니다.

3-3. 직분 안수는 성령의 은사가 직분 안수를 받는 사람에게 임했다는 교회의 인정이며, 직분 안수를 받은 사람이 교회를 정성으로 섬기고, 책임을 다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수는 반복될 수 없습니다. 안수 받은 직무로부터 휴직하는 것은 가능하며, 안수 받은 직분을 다시 시작하려고 할 경우, 교회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재임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4. 안수 받은 직분을 받은 이들의 사명

그렇다면, 교회 안에 안수 받은 직분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베소서에 의하면,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엡 4,12-13)

성도들에게 직분을 주신 이유는 성도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이지요. 우리는 흔히 우리가 직분을 맡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직분을 맡을만한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직분을 맡는 것 자체가 하나의 준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잘 하라고 직분이 주어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임직은 하나의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직분이 맡겨지는 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자격의 결과가 아니라, 직분 자체가 무엇인가 다른 일을 위한 준비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자칫 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직분을 무슨 대단한 권리처럼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남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섬김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하기 위해 직분이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 4.12). 교회 안의 분쟁은 열심으로 봉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세우려는 데서 일어납니다. 봉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엡 4,13).

여기서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사람이란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 사람, 다시 말해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을 의미하지요.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신앙인의 신앙생활의 마지막 목적,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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