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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에 관한 세 개의 역사 전승이스라엘 역사 알기 ㊴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7.08 16:28

장막인가 성전인가

초기 왕정 시대에 관해서 살펴보면서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이 시대의 역사를 재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 시대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 자료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하기란 어렵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이스라엘 역사 재구성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초기 왕정 시대의 역사 재구성은 분열 왕국 시대보다 더 어렵습니다.

초기 왕정 시대에 대해서는 성경 이외에 이를 비교하여 분석할 자료가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와 함께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상 6장 1절」은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출애굽 후 480년에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이 성전 건축은 「열왕기상 6장 38절」에 따르면 7년이 걸립니다. 「열왕기상 7장 1절」은 솔로몬 왕궁을 13년 걸려서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열왕기상 9장 10절」에서 이를 합쳐 20년 동안 건축 활동을 했다고 말합니다.

‘솔로몬’ 재위 40년의 절반인 20년 동안 건축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점, 12×40인 480년을 언급하고 있는 점, 성전 건축에 완전수 7이 사용되었다는 점 등을 본다면, 이 숫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들에서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었다는 점, 왕의 궁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 재건축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왕이 자신을 위한 궁전을 만들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런데 이조차도 역사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만들었는지, ‘솔로몬’이 만들었는지 저는 불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제의 집중화, 왕권 강화, 왕권 당위성 부여를 위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면, 그 법궤를 두기 위한 특정한 장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솔로몬’이 건축했다는 성전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⒄ ‘솔로몬, 70평의 성전을 7년 동안 지었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위의 글에서도 적었지만,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제단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제단보다는 법궤를 보관할 장소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런 측면을 보았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건축되었다기보다 법궤 보관 장소로 건축되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사무엘하 6장 17절」은 ‘다윗’이 법궤를 준비된 장막 안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장막이라는 표현이 역사가의 수정이라고 봅니다. 「사무엘하 12장 20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갑니다. 이는 ‘다윗’ 시절에 여호와의 전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어떤 학자는 다윗이 여부스족이 기존에 예루살렘에서 사용했던 성전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다윗이 여부스족의 성전 건물을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법궤는 장막이 아닌 특정 건물 안에 보관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여호와의 전, 성전으로 지정되었고 ‘솔로몬’에 의해 개축되었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런 추정이 가능은 하지만, 그 진위를 판단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제 판단과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법궤 설화에 나타난 장막이 맞고, 「사무엘하 12장」에 나타난 여호와의 전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전승이거나 역사가의 수정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부스족의 성전 건물을 분열 왕국 이후까지 계속 사용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추정도 결국 추정으로만 끝날 뿐이기 때문에 초기 왕정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성경에 나타난 기록들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후대 역사가들이 왜 이런 전승을 사용했고, 그 전승들에 어떤 의미를 담고자 했는지 찾는 일일 것입니다. 주전 11세기의 역사보다는, 역사서가 기록된 방식을 살펴보면서 이 책이 기록된 대략 주전 6-7세기의 역사를 발견하는 일이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㉟ ‘이스라엘 왕국의 실제 모습은 무엇이었나’」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사울’, ‘다윗’, ‘솔로몬’ 세 사람이 다스렸던 초기 왕정 시기는 주전 1029년부터 930년까지 100년여 정도로 보입니다. ‘사울’의 경우 정확한 통치 기간이 구약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데, 일부 사본에는 그가 2년간 재위에 있었다는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만 남아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의도가 있어 보이는 숫자 40년이 그들의 재위 기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왕정 시대 왕들의 연대는 대략적으로도 추정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전체적인 100년의 기간은 추정할 수 있지만, 세부적인 사항들의 연대는 추정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초기 왕정 시대에 관한 세부적인 연대를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기 왕정 시대의 역사를 암흑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추정에 불과할지라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시기로부터 분열 왕국 시기의 연결고리로서 초기 왕정 시대에 대해 생각해 보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왕정 시대 이후, 약간이라도 추정이 가능한 시대의 역사를 원활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읽어가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다윗의 등장

지난 ‘솔로몬’에 관한 글에서 ‘솔로몬’이 지혜가 있는 왕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거나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라는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고 국가 영토라는 개념이 발생하는 과정에 있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윗’에 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윗’이 실존 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도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다윗’은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과장되게 표현되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존재했던 왕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다는 점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왕국 사람들이 위대한 왕 ‘다윗’에 관해 끊임없이 전했던 이유는,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기 전까지도 남왕국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을 처음 수도로 정한 왕이자, 단일 혈통 왕조의 시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장은 있을지언정 인물 자체가 허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으로 계속해서 전승되어 왔기 때문에 그에 관한 설화들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16장」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의 등장에 관한 설화만 해도 「사무엘상 17장」까지 세 가지 이야기로 나타납니다. 그의 첫 등장은 ‘사무엘’과 관련된 설화 중 하나로 보이는 「사무엘상 16장 1-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이후 ‘사무엘’은 다음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나섭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다윗’은 주인공처럼 등장하여 기름 부음을 받긴 합니다만 수동적인 역할만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사무엘’입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이야기는 앞선 ‘사울’이 왕으로 택함 받는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사울’과 ‘다윗’ 모두 왕으로 선정된 후에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왕이 되기 전에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이 일은 ‘사무엘’에 의해 비밀스럽게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이 비밀스럽게 행한 기름 부음 의식은 왕을 뽑는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선지자의 역할이 부각됩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사무엘’과 관련된 설화에 나타난 ‘다윗’의 이야기로 보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사무엘상 16장 14-23절」은 ‘다윗’과 ‘사울’의 첫 만남에 관한 설화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울’은 악령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를 위해 악기를 잘 다루는 ‘다윗’을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열왕기」에서 ‘다윗’이 악기를 잘 다룬다는 이야기는 중요하게 다뤄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역대기」에서는 ‘다윗’과 악기가 연결되는 이야기가 종종 나타납니다.

「역대기」를 보면, ‘다윗’이 음악에 조예가 깊은 왕이라던가 시를 잘 읊조린다는 생각은 후대에 상당히 강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모스 6장 5절」에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이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는 점은 남왕국과 북왕국 이스라엘 전역에서 전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 렘브란트, 「사울과 다윗」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가 1660년경에 그린 ‘사울과 다윗’입니다. 현재 네덜란드의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The Mauritshuis Royal Picture Gallery)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뭔가 고통에 찬 듯한 ‘사울’의 얼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이 작품에서 ‘다윗’은 조연처럼 보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는 크게 충돌하는 지점이 없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사무엘’이 비밀스럽게 기름을 부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두 번째 이야기로 어색하지 않게 연결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첫 번째 이야기는 ‘사무엘’과 관련된 내용이고, 두 번째는 ‘사울’과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에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전승으로 보입니다.

전승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이야기는 세 번째 설화인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16장 21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무기 드는 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의 집에 상주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울’을 위해 수금을 연주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21-23절」의 분위기는 ‘다윗’이 ‘사울’의 집에 상주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울’은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사울’의 군사령관인 ‘아브넬’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끼워 맞춰보기 위해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사건이 먼저 일어났고, 그 후에 ‘사울’의 무기 드는 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무엘상 16장 18절」에서 ‘사울’이 ‘다윗’을 모르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따라서 이 둘은 ‘다윗’에 관한 서로 다른 설화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무엘상 17장」도 하나의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1-40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이미 자신을 소개했고, ‘사울’의 군복을 빌리기까지 했는데, 「사무엘상 17장 55절」에서 ‘사울’은 여전히 ‘다윗’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무엘상 16-17장」에서 ‘사울’과 ‘다윗’은 첫 만남만 세 번 나타납니다. 이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역시도 하나의 단일한 설화로 전해졌다기보다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로 전달되었다가 역사가에 의해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졌음을 알게 합니다.

「사무엘」을 기록한 역사가가 ‘다윗’에 관한 다양한 설화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들 속에서 약간의 충돌이 발생하는 점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제기되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사무엘」을 기록한 역사가 집단이 ‘다윗’에 관한 설화를 시간 순으로 배열해놓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무엘상 18장 54절」에 따르면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그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아직 점령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기적으로 ‘다윗’의 예루살렘 점령은 ‘사울’의 죽음 이후인 「사무엘하 5장」에 나타납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남았다는 점을 본다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시점 자체가 애매해집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 조세핀 폴라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조세핀 폴라드(Josephine Pollard, 1834-1892)가 1899년에 그린 『하나님의 달콤한 이야기(Sweet stories of God; in the language of childhood and the beautiful delineations of sacred art)』에 수록된 삽화입니다. 조금 잔인해 보이는 그림이기는 합니다만, 거인 ‘골리앗’과 ‘다윗’의 체격 차이를 특징적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사무엘상 18장 5절」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구절인데, ‘다윗’이 모든 일에 지혜롭게 행하기에 ‘사울’은 그를 군대 장관으로 세웁니다. 어려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던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이유로 장군으로 등극했다는 점도 시간적인 오류입니다.

‘다윗’과 관련된 설화의 내용 전체가 후대 역사가들의 손에 의해서 수정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위대한 왕 ‘다윗’의 이야기들은 시대를 흘러가면서 점차 과장되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을 이겼다’라는 하나의 이야기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과장되어 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이 블레셋과 싸워 이겼다’는 이야기가 가장 처음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역사가들은 이런 과장된 설화들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재구성하였고 그 과정에서 또 편집과 수정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을 주었다는 내용이나 「사무엘하 18장 4절」에서 ‘요나단’이 자신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다윗’에게 주었다는 진술은 후대 역사가의 삽입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다윗’에게 왕권의 상징을 넘겨주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권력이 자연스럽게 ‘다윗’에게 넘어가게 되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 역사가가 첨가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목동에서 장군으로

‘다윗’에 관한 설화 하나하나가 어느 시대에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밝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다윗’과 관련된 특징들과 그 시대에 부합될 수 있는 점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실제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다윗’의 등장을 다루고 있는 설화들 속에서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던 소년으로 묘사됩니다. 목동 신분에서 왕이 된 인물이라는 설화로부터 유래된 것인지, 목동인 ‘다윗’은 상당히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전해졌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5절」에 따르면 그는 사자와 곰도 죽일 수 있는 인물로 전해집니다.

‘다윗’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을 돌봤다는 점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목 활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농경에만 전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윗’이 목동 일을 했다는 점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가 사자와 곰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목동으로 나타나는 설화들 속에서 목동이라는 직업 자체가 낮고 천한 직업으로 나타나진 않습니다.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에 양치는 목자를 낮은 존재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8장 23절」에는 ‘다윗’이 스스로를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구절이 나타납니다. 이는 「사무엘상 18장 18절」에서 자신의 친속이나 집은 별 것 아니라고 말하는 ‘다윗’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겸손의 표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18장 17-30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골리앗’ 이야기와 유사한 또 다른 설화로 보입니다. ‘사울’이 블레셋 군사를 막아낸 용사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는 이야기는 「사무엘상 17장 25절」에도 나타납니다. 「사무엘하 18장 25절」에서 ‘사울’은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면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주겠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견제하기 위해 딸과 혼인시켰다고 말합니다.

이 설화는 분명 ‘다윗’을 가난하고 천한 사람에서 왕의 사위이자 군대 장관이 된 인물로 그립니다. 이런 ‘다윗’의 이미지가 앞선 목동 이미지와 연결되어서, 목동 일을 한 것이 가난하고 천한 사람의 상징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연결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목동 ‘다윗’은 막내아들이면서 소년이기에 양 치는 일밖에 하지 못했던 인물이 영웅적 행적을 통해 군대 장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미갈’과의 결혼 이야기에서 나타난 다윗은 가난하고 천한 집안 출신이지만 영웅적 행적을 통해 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분명 ‘다윗’에 대한 설화들은 그에게 부족함이 있었지만,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 왕의 측근에까지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다윗’에게 붙여진 과장된 표현들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13절」에 나타난 ‘사무엘’ 설화 속에서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이 제사에 초청해도 괜찮을 정도의 위치에 있던 인물로 나타납니다.

‘이새’가 ‘다윗’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여러 전승 속에 나타나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새’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그가 베들레헴의 유력가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다윗’의 아버지라는 점을 간과한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새’에 관한 진술들 속에서 보았을 때, 그의 집이 「사무엘하 18장 17-30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가난하고 천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점점 어려지고, 가난해진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윗’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판타지적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 다윗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점은 ‘다윗’이 ‘사울’의 장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앞서 「사무엘상 16장 2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다윗’이 ‘사울’의 무기 드는 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난 글에서 ‘사울’에게 상비군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비군의 인원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의 사촌인 ‘아브넬’이 군사령관을 맡았다는 점을 보면, 가족을 중심으로 한 최소 인원만이 상비군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최소한의 상비군을 유지하면서 필요시에는 온 지파에서 군사를 소집하여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 ‘사울’이 다른 지파 인물을 자신의 상비군으로 동원할 수 있었는지가 가장 큰 의문점입니다. ‘다윗’에 관한 많은 설화는 그가 ‘사울’의 군대에 속해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 설화들이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다윗’은 분명 ‘사울’ 상비군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상비군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자신의 무기 드는 자로 삼기 위해 ‘이새’에게 협력을 요구했다는 「사무엘상 16장 21-22절」의 내용은 일부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유력 가문의 일원이었을 것이고, ‘사울’은 그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 그 일원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상비군에 속해 있었지만 독자적으로 군사를 운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사울’의 명령에 따른 전투였을지는 몰라도 ‘다윗’의 전투는 ‘사울’의 전투와 따로 이루어집니다. ‘사울’의 군대에 속한 ‘다윗’의 부대원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사무엘하 21장 15-22절」과 「사무엘하 23장 8-39절」에는 ‘다윗’의 용사들에 관한 목록도 나타납니다. 

이 명단이 어느 시대에 적용되는 목록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이 기록이 ‘다윗’의 말년에 가까운 시기의 내용들 속에 첨가되어 있다고 해서 ‘다윗’을 따랐던 용사들의 목록이 다윗 왕정 수립 이후 군사 목록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예가 「사무엘하 21장 19절」에 나타난 ‘엘하난’입니다.

「사무엘하 21장 19절」은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성경은 흠정역(KJV)을 따랐기 때문에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라는 「역대상 20장 5절」의 첨가를 따라서 「사무엘하」에도 수정 작업을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70인역 헬라어 성경과 히브리어 마소라 사본에는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만 말합니다.

‘골리앗’ 이야기는 ‘다윗’의 용맹함, 영웅적 일화로 과장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윗’의 용사 중 한 명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말하는 「사무엘하 21장 19절」의 진술이 더 신뢰가 갑니다. 어쩌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시점은 ‘사울’과의 첫 만남 때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유력 가문의 일원으로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상비군에 편입된 상태이고, 그에게는 우수한 수하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사울’의 직속 상비군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갈 때, 그의 수하들은 ‘사울’이 아닌 ‘다윗’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따르는 군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유추해보자면, ‘사울’을 왕으로 세우던 때에 이스라엘은 언제라도 전국을 방어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비군을 필요로 했습니다. 하지만 왕이라는 한 사람이 전체 지파에서 모인 군대를 관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세금 제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인 ‘사울’은 최소한의 군대만을 자신의 상비군으로 두었는데, 아마도 베냐민 지파 출신들로 구성된 상비군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각 지파에서도 소수 인원을 중심으로 한 상비군을 만들었고, 이들이 ‘사울’과 함께 상주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이들의 역할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인지, 전쟁이 벌어졌을 때 각 지파에 전령 역할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윗’에 대한 설화들을 보면 이들은 ‘사울’의 군대와는 별개로 개별 전투를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상 12장 17절」에는 학자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유다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라는 구절입니다. 지파별로 토지 소유권이 정해진 상황 속에서 다른 지파 사람들이 유다 지역에 거주했다는 점은 조금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만, 타지파 사람 중에 유다 지파 지역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사울’ 시대에 지파별로 각자의 상비군이 운용되던 것이 ‘다윗’ 시대에 들어서면서 왕의 군대로 통합되고, 제대로 군사 체계가 갖춰지는 것은 ‘솔로몬’ 시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르호보암’이 따로 군사를 모았다는 「열왕기상 12장 21절」을 본다면, ‘솔로몬’ 시대에 왕 아래로 묶인 군대라 할지라도,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지파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점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도 뛰어난 결속력을 가진 군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의 서두에 언급했지만, 초기 왕정 시대에 관한 모든 내용은 추정입니다. 어떤 추정이 조금 더 이스라엘 역사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가? 조금 더 논리적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것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똑같습니다. 제가 내리고 있는 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앞뒤 시대와 연결하여 당시의 역사를 추정해 보는 일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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