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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정 체제 기반을 닦은 사람들이스라엘 역사 알기 ㊶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7.29 16:50

연대 재배열의 의미

이번 글에서는 ‘사울’과 ‘다윗’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연대에 따라 재배열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사무엘」에 나타난 사건들의 연대를 정확하게 따지고, 이를 다시 정리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연대를 확정할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각 사건이 발생한 순서를 따져보는 일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손에 놓여있는 「사무엘」의 순서대로 ‘사울’과 ‘다윗’의 시대를 읽어나간다면, ‘사울’은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여 왕으로 세워졌지만, 이후에 타락하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 마땅한 왕으로 그려집니다. 「사무엘」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결국 ‘다윗’이 왕이 되어야만 했다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사무엘」을 기록한 역사가 집단의 의도에 따라 성경을 읽어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만 읽었을 경우, 성경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본문들에 대해서 어떤 대답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사사기 1장 8절」은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무엘하 5장」에 따르면 예루살렘에는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고, 이 성읍은 ‘다윗’에 의해 정복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오히려 유다 족속이 여부스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했고, 그들이 여전히 예루살렘에 거주했다고 기록한 「여호수아 15장 63절」이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다만 「여호수아」의 본문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시기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이후 시기를 반영한 기록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이후에도 예루살렘에는 유다 족속뿐만 아니라 여부스 족속이 함께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연대를 재구성해보는 작업은 특히나 선택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학자들이 저마다 제안하고 있는 사건의 순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각자 나름의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점을 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서 읽던지, 특정 학자의 이론을 지지하던지, 자신만의 연대를 추정해보던지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글에 실었던 내용을 예로 살펴본다면, 저는 「사무엘상 14장」에 나타난 언약궤 언급은 후대의 첨가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사울’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실로 출신 제사장 ‘아히야’에 관한 진술은 사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울’의 나머지 전쟁에 제사장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나, 「사무엘상 22장」에서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몰살한 점, 「사무엘상 28장」에서 종교집단을 몰아낸 점을 보아 「사무엘상 14장」에 나타난 블레셋과의 전쟁은 ‘사울’ 재위 초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해석에 따라 ‘사울’이 초기에는 ‘사무엘’과 함께 실로 제사장 집단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통치 후기에는 이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자신만의 종교정책을 펼치려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글 「이스라엘 역사 알기 ㊵ ‘다윗, 사울의 종교정책을 뒤집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에 관해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4장」에 나타난 블레셋과의 전투가 ‘사울’ 재위 초반보다 더 이른, 왕위에 등극하기 이전에 일어난 전투로 봅니다. 또 ‘사울’이 즉위 전부터 ‘사무엘’이 아닌 실로 제사장의 교류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해석입니다. 실제 ‘사무엘’은 유년기 설화를 제외하고는 실로나 그곳에 있던 법궤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활동하는 지역은 몇 군데 나타나지만 가장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지역은 라마입니다.

▲ 헤르브란트 반 덴 에크하우트(Gerbrand van den Eeckhout), 「엘리에게 사무엘을 바치는 한나」 (1665년경) ⓒ위키피디아

이 해석은 ‘사무엘’을 실로와 분리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엘리’를 비롯한 실로 제사장 집단과 사사였던 ‘사무엘’을 서로 다른 집단으로 봅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위를 인정받았지만, 그는 ‘사무엘’을 따르기보다 실로 제사장과의 관계에 더 집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과 갈라져서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 이유도 자신에게 있었던 종교 권력이 실로 제사장 집단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사무엘’에 관해서는 더 고민해볼 필요도 있지만, 이런 해석의 흐름에서 본다면, ‘다윗’은 적어도 재위 직전까지는 ‘사무엘’과 함께 했습니다. 「사무엘상 19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했을 때, ‘다윗’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도망갑니다. ‘다윗’이 이후에 라마 제사장 집단을 중용했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다윗’은 ‘사무엘’과 함께 했으며 실로 제사장 집단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해석에서 더 중요한 점은 ‘사울’이 법궤를 모시고 있던 실로 제사장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울’이 「사무엘상 28장 3절」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었다는 기록은 야훼 신앙을 더욱 굳게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왕이 아니라, 실로 제사장들과 함께 야훼 신앙을 널리 퍼뜨린 왕이 됩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사울’이 왕이 된 후에 상비군을 갖춘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만의 상비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석하게 됩니다. 사울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 군대를 동원하여 블레셋을 막아내고(삼상13-14장), 그 후에 암몬으로부터 길르앗 야베스를 구했기 때문이(삼상11장) 이스라엘 지파 연합으로부터 왕으로 선택받았고(삼상10장),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삼상11장)입니다.

저도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통일된 군사 체계가 없었지만, 주변국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각 지파마다 당연하게 자신의 지역을 지킬 상비군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잠시 후 ‘다윗’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세습 왕정의 기반을 닦았지만 독자적인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왕일 수도 있고, 야훼 신앙의 기반을 굳건하게 만든 왕일 수도 있습니다. 또 본래 성경이 보여주는 것처럼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일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연구 깊이의 차이라기보다 무엇에 더 집중해서 해석하고 있는지, 연구 방향의 차이로 보입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 시대를 바라볼 때 저의 가장 큰 관심은, ‘이스라엘 지파 동맹이 처음 왕을 세울 때 세습 왕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사무엘」을 살펴보다 보니, 왕정 체제가 어떻게 체계화 되어갔는지를 먼저 살피게 됩니다.

사울 왕정 시대

이런 관심 속에서 ‘사울’ 시대부터 성경에 나타난 전승들의 시간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사울’은 아마도 베냐민 지파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자신의 상비군을 보유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사촌 ‘아브넬’이 군사령관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사울’ 시대에 군사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본래부터 베냐민 지파 지역을 방비하던 부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무엘상 10장」의 미스바 총회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이것은 단순히 제비뽑기로 왕을 뽑는 자리가 아니라 각 지파별 유력자들이 자신들의 상비군을 대동하고 모인 각축장이었을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선택되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나타났다는 점이나, 「사무엘상 11장 12절」에서 당시 반대했던 이들을 제거하자는 언급이 나타나는 모습을 본다면,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결과를 맡긴 평화로운 총회는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0장」의 미스바 총회에서 ‘사울’이 왕으로 선정되고, 「사무엘상 11장」의 길갈에서 재승인 과정을 거친 것은 미스바와 길갈 전승을 적절히 사용하여 편집한 결과로 보입니다. 왕위 승인 과정이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왕으로 선정된 ‘사울’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군사를 소집하고 전쟁을 치루며 자신의 군사 지휘 능력을 보입니다. 「사무엘상 11-14장」에 나타난 전투는 즉위 초반에 치러진 전투로 보입니다. 다만 「사무엘상 13장」에 나타난 ‘사무엘’과 ‘사울’의 갈등 이야기는 후대의 첨가로 보입니다. 이런 갈등 상황은 조금 더 후기에 나타났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또 「사무엘상 14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실로의 제사장이 전쟁에 동행한 일도 재위 초기에만 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즉위 이후 블레셋과 전쟁을 치렀을 것이고, 「사무엘상 14장 52절」에 나타난 표현처럼 블레셋과의 전쟁은 지속적으로 치러졌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의 전쟁은 국가 간에 국경을 정해놓고 국경을 침범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영토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을 것이고, 어느 성읍은 우리 백성에 속하고 어느 성읍은 우리 백성이 아니라는 개념에서 자신에게 속한 성읍을 방어하거나 남의 성읍을 침략하는 방식으로 전쟁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11장」에 나타난 암몬과의 전쟁은 ‘사울’이 왕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 전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사울’이 밭을 갈던 중에 소식을 접하고 군사를 소집했다는 이야기나 길르앗 야베스의 장로들이 자신들을 구원할 왕의 존재가 없던 것처럼 말하는 점을 본다면, ‘사울’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치러진 전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왕정 체계가 제대로 잡히기 전인 ‘사울’ 재위 초반에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은 ‘사울’의 즉위 전후에 있었을 것인데, 그 시점보다는 이 전쟁 이후 길르앗 야베스 지역은 ‘사울’의 지지 세력 또는 우호 세력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상 31장」이나 「사무엘하 2장」을 보면, ‘사울’의 죽음 이후 그의 시신을 찾아 장사한 사람들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입니다.

▲ 엘리 마르쿠제(Elie Marcuse), 「사울 왕의 죽음」 (1848년) ⓒ위키피디아

「사무엘상 15장」에 나타난 아말렉과의 전쟁은 ‘사울’의 재위 초에 치러진 전쟁은 아닌 듯합니다. 이미 ‘사울’이 이스라엘 병력을 소집하는 방식이 다르고, 소집 인원도 다릅니다. 또 이 전쟁은 약탈 전쟁인데, 재위 초반보다는 재위 중반 이후 군사 유지비 등의 명목에서 치러진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다윗’의 등장으로 연결되는 전쟁이기 때문에 ‘사울’ 재위 후반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사울’과 ‘사무엘’의 갈등이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윗’도 ‘사울’ 재위 후반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재위 중반부터 함께 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사울’ 시대에는 아직 행정 조직이 완전히 갖춰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무엘」이 ‘사울’ 왕국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체계를 갖추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울’의 신하라는 언급이 종종 나타나고,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목자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본다면, ‘사울’의 왕실은 어느 정도 행정 조직을 갖추어나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런 행정 조직이 재위 초반부터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중반 이후부터 행정 조직이 갖춰져 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의 협력자에서 반역자로

「사무엘상 14장 52절」을 보면, ‘사울’이 힘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다고 진술합니다. ‘다윗’도 그런 형태로 ‘사울’의 상비군에 합류하게 되었을 텐데, 이는 ‘다윗’에 관련된 두 가지 전승에서 확인됩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을 다루고 있는 「사무엘상 17장」에는 ‘사울’이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게 자신의 딸을 주고 세금을 면제하기로 했다는 언급이 나타납니다.

이는 「사무엘상 18장」에서 ‘다윗’을 사위로 받아들이기 위해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를 요구했다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의 다른 전승입니다. 「사무엘상 17장 25절」에 나타난 표현,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집에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라는 표현은 전승 과정에서 덧붙여진 표현으로 보입니다. ‘사울’은 누군가를 부유하게 해줄 만큼의 재산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 아직까지는 세금 제도도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시대에 지파별 상납금이 존재했을지는 몰라도 개인에 대한 세금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에 대한 세금 부과는 아마 「사무엘하 24장」에 나타난 ‘다윗’의 인구조사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쌓은 사람을 자신의 용사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다는 이야기는 ‘다윗’이 한 사람의 용사로서 ‘사울’의 상비군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보게 만드는데, 이후 ‘다윗’을 통해 보이는 유다 지파의 태도나 ‘다윗’이 ‘사울’과 적대하는 세력을 이끌었다는 점, ‘사무엘’이 ‘다윗’의 편에 섰다는 점 등을 본다면, ‘다윗’을 그저 성공한 용사 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없게 만듭니다.

▲ 마테오 로셀리(Matteo Rosselli), 「다윗의 개선」 (1650년경) ⓒ위키미디어

‘다윗’은 ‘사울’이 왕정 체계를 조금씩 갖춰나가던 시점에 ‘사울’의 상비군에 합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윗’이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되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전투를 치렀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할 때까지 자신이 직접 군을 통솔했을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사울’과 별개로 블레셋과 전쟁을 치렀고, ‘다윗’에게 속한 독자적인 용사들이 있었다면 이는 ‘사울’의 상비군과는 다른 군조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윗’은 유다 지파 출신으로 구성된 독립 군조직을 이끌고 있었고, ‘사울’과 우호 관계 속에서 함께 전쟁을 치르거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다윗’의 군대가 블레셋의 ‘골리앗’ 부대와 맞붙게 되었고, 아마도 「사무엘하 21장 19절」에 나타나듯 ‘엘하난’이라는 ‘다윗’의 용사 중 한 명이 ‘골리앗’을 죽였을 것입니다. 이런 치적은 군지휘관인 ‘다윗’에게로 돌아가게 되었고,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이야기로 만들어져 전해지면서 점점 각색되어갔다고 봅니다. ‘골리앗’을 죽이면 ‘사울’이 딸을 내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이 과정에서 추가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의 대표였건, 소년 용사였건 ‘사울’의 재위 중반까지 ‘다윗’은 분명 ‘사울’의 협력자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 ‘다윗’은 ‘사울’의 반대파로 돌아선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은 ‘사울’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말하고 있고, 「사무엘하 18장」은 ‘사울’이 ‘다윗’을 질투했다고 말하면서 마치 ‘사울’이 이상해져서 ‘다윗’과 적대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전개해가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반대파에 섰을 때, ‘사무엘’은 ‘다윗’의 편에 있었습니다. 또 놉의 제사장 집단도 ‘다윗’의 편에 섭니다. 「사무엘상 22장 2절」을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두 ‘다윗’의 편에 섰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사울’ 왕정에 반대하던 세력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사울’이 폭정을 펼쳤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울’이 폭정을 펼쳤고, ‘다윗’이 그 폭거에 대항하는 존재였다면, 이스라엘 지파 연합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것을 그냥 놔뒀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처음엔 ‘다윗’을 인정하지 않았다가 ‘이스보셋’이 패한 이후에 ‘다윗’을 왕으로 인정합니다. 이런 점을 본다면, ‘다윗’과 그가 이끌던 집단이 이스라엘 전체로부터 인정받을 만큼 위대하거나 훌륭한 집단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과 적대하는 과정에서 ‘다윗’은 광야 지역을 돌며 세력을 확장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이야기들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울’과 몇 차례 무력 충돌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 무력 충돌 속에서 ‘다윗’은 결국 블레셋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다윗 왕정 시대

‘다윗’은 ‘사울’ 사후에 이스라엘로 돌아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국을 만듭니다. 「사무엘하 2장11절」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간 왕위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 기간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적대하는 기간 중에는 헤브론에서 왕위에 있었을 것이고 7년보다 더 짧은 기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간 블레셋은 ‘다윗’을 자신들의 봉신 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만약 「사무엘상 27장 6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시글락 지역을 내주었다면, ‘다윗’은 블레셋의 봉신이 맞습니다. 블레셋 입장에서는 ‘다윗’이 ‘이스보셋’의 이스라엘을 견제해주길 원했을 것이고, 자신들의 봉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독자적인 왕국을 세울 때 뒷받침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예루살렘 점령은 ‘이스보셋’과 대립이 끝난 이후가 아니라 아마도 대립하는 중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다만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것은 대립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이후에 진행된 사업으로 보입니다. ‘이스보셋’과의 대립 이후 ‘다윗’은 베냐민 지파, 특히 ‘사울’ 집안에 대한 숙청 작업과 감시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하 9장」에 나타난 ‘므비보셋’은 ‘사울’ 집안의 상징적 인물로 ‘다윗’의 감시하에 놓이게 됩니다.

‘사울’의 딸이자 ‘다윗’이 반역한 이후 다른 남성과 결혼해서 살고 있던 ‘미갈’도 되찾아옵니다. 하지만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사무엘하 6장」은 ‘미갈’이 언약궤를 되찾아오는 ‘다윗’을 보며 조롱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그녀는 불임 여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그럴듯한 추측은 ‘다윗’이 그녀를 되찾아 온 이후 그녀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미갈’과 ‘므비소셋’은 ‘다윗’이 ‘사울’의 집안을 후대하였다는 상징적인 인물들인데 실제로는 볼모에 가까운 인물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무엘하 20장」에 나타난 베냐민 사람 ‘세바’의 반역도 ‘다윗’ 왕조 초기에 벌어진 반란일 것이고, 「사무엘하 21장」에 나타난 기브온 사람들을 위해 ‘사울’의 자손을 죽인 일도 반란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해 벌어진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왕이 된 ‘다윗’은 ‘사울’의 행정체계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조금 더 발전시켰을 텐데, 「사무엘하 20장 23-26절」의 목록을 보면, 아직 크게 발전된 체계를 이루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보다 국가 결속을 위해 노력한 부분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수도 이전도 그런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이곳을 국가 수도일 뿐만 아니라 제의의 중심지로 만듭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보았듯이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이라는 중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이를 옮겨오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5장」을 보면, ‘다윗’이 왕위에 오른 직후에 블레셋과 전쟁을 치렀다고 말하는데, 이 전쟁은 아마도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한참 후에 벌어졌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블레셋은 ‘다윗’을 자신들의 봉신으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과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다윗’이 블레셋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데, 아직 남북전쟁으로 나라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윗’이 블레셋을 적대하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새로운 종교정책을 펼치며 국가 안정화 작업과 자신의 왕조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이런 수도 이전에 베냐민 지파에 대한 숙청 작업이 일어난 것으로 보이고, 수도 이전 이후에 행정 조치를 취하는 가운데 인구조사도 실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성경 상에서는 ‘다윗’ 말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벌였을 때, ‘다윗’을 꾸짖은 사람은 예언자 ‘갓’인데(삼하24:11), 그는 ‘다윗’ 초기부터 함께 했던 인물입니다(삼상 22:5). 예루살렘 궁전 정착 이후에 ‘갓’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그때부터는 예언자 ‘나단’이 나타납니다.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얼마 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하 15장」을 보면,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반란을 선포합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보면, 그 당시까지 헤브론이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반역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다윗’은 재위 중반부터 후반까지 몇몇 나라들과 전쟁을 하며 자신의 영토를 확장시켜나가거나 때로는 그냥 약탈을 위해서 전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웃 국가들과 무턱대고 전쟁을 하면서 영토 확장을 시도했던 왕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가장 큰 정책 차이는 외교 정책에 있습니다. ‘사울’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다윗’은 이웃 국가와 적대관계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상당히 많은 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습니다.

‘다윗’은 이미 블레셋의 봉신이기 때문에 블레셋과의 관계는 분명 동맹 또는 종속 관계였습니다. 「사무엘하 5장 11절」를 보면, 두로 왕 ‘히람’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8장 9절」을 보면, 하맛 왕 ‘도이’도 ‘다윗’과 친분을 맺고 있고, 「사무엘하 10장 2절」을 보면, 암몬과도 본래 동맹 관계였는데, 새롭게 암몬의 왕의 된 ‘하눈’이 적대 의사를 표출하였기 때문에 전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에 왕정 체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갔는가를 생각하면서 「사무엘」을 읽어나가면, 지혜의 왕 ‘솔로몬’ 혼자 이 체계를 이룬 것도 아니고, 위대한 왕 ‘다윗’ 혼자 이런 체계를 만든 것도 아닙니다. 처음에는 군사령관에 불과했던 ‘사울’은 조금씩 왕정 체계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 위에 ‘다윗’이 좀 더 국가적인 기틀을 만들며 외교 정책까지 펼쳐 나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의 왕으로 불릴 수 있게 된 바탕에는 아마 ‘사울’과 ‘다윗’이 닦아놓은 왕정 체계와 국가 기반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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