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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 사는 대쪽 인생?(출애굽기 20:1~17, 마태복음 5:17~20)십계명 다시 읽기 ⑴
홍인식 목사(에큐메니안) | 승인 2021.08.08 22:02
▲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있다.(1877년에 제작된 석판화) ⓒGetty Image

3개의 기둥: 사도신조,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지탱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세 가지 기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도들이 전수해준 신앙고백인 ‘사도신조’입니다. 둘째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들만이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 요약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는 데에 있어서 큰 이론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말할 때 적어도 이 세 가지 기둥이라는 큰 틀에 있어서 동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신조는 교회전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믿음의 내용, 다시 말하면 신앙의 교리(dogma)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조는 신학적인 면이 강합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은 영성적인 면이 강합니다.

십계명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신 생활 지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윤리적이고 법률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나 오랜 교회전통은 사도신조를  통한 신학, 주기도문을 통한 하나님과의 영성적인 교통  그리고 십계명을 통한 생활윤리(법률), 이 세 가지가 올바르게 어울려 지면서 기독교 신앙이 형성되어 진다고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십계명을 공부해 보고자 할 때 우리의 머리에 손쉽게 떠오르는 인상은 바로 법률입니다.“법대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십계명 강의는 법률 강의처럼 매우 딱딱하고 메마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법률이라는 것은 생명이 없고 딱딱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법률가 치고 딱딱하고 근엄하고 굳은 표정을 짓지 않는 분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법원 앞이나 혹은 법과대학 앞에 가면 여지없이 볼 수 있는 두 눈을 가리고 저울을 손에 들고 있는 여신의 상은 우리로 하여금 법에 대하여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인상을 더욱 짙어지게 만들어 줍니다. 두 눈을 수건으로 질끈 동여매고 저울을 들고, 법으로서 모든 것을 사정없이 판단하는 모습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도 하고 공포에 젖어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법대로 살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만일 법을 어기게 되면 두 눈을 감은 법의 여신에게 법대로 혹독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한 법의 차가운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질서를 지키게 만들고 법을 지키며 살아가게끔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일 법이 차가운 인상을 주지 않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면 과연 누가 법을 지킬 것이며 그리고 이 사회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며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십계명을 공부합니다. 십계명 공부를 준비하면서 저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과연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법이 필요한가?, 믿음이 법률에 의한 구속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까? 믿음에 있어서 법률적인 제도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에게 신앙은 자유입니까? 혹은 구속입니까? 우리의 신앙이 십계명이라는 법률적인 제도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두 번째로 떠오르는 질문은 신앙과 구약의 법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신앙과 구약의 법이 연속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사랑의 은혜를 믿고 있는 우리들과 구약의 법률이 어떤 관계성을 설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수천 년 전에 제정되었던 법인 십계명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과 무슨 관계성이 있다는 것입니까?

세 번째로 떠오르는 질문은 십계명과 구약에 나타나는 무수한 다른 계명들과의 관계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구약에 나타나는 다른 계명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유독 십계명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십계명에 대한 강조가 혹시 구약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차별성을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계명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십계명에 대해서는 열렬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위의 세 가지 질문을 갖고 십계명 강해를 준비해 왔습니다. 줄곧 위의 질문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마지막 날에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 놓으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고민해 보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혹시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저에게도 알려 주시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 1~17과 신명기 5:5~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기록은 거의 비슷하지만 2~3개의 계명이 강조하는 것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당시 뿐 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역사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후 율법학자들에 의하여 제정되어진 수많은 법률들은 사실상 십계명에 대한 유권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만큼 십계명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한 것입니다.

오늘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수천 년 전에 제정된 법률이기는 하지만 십계명은 벌률 이전에 우리의 신앙의 윤리적인 지침을 가르쳐 주는 기본적인 것입니다. 오래 전의 성현들의 가르침이 단지 오래된 것이라는 시대적인 이유로 인하여 배척되지 않듯이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들이 시대를 넘어서서 인류에게 보편적인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듯이 십계명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신앙의 기본적인 원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십계명을 배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십계명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기본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고 그것대로 살아가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십계명을 공부해보고자 하는 우리들이 십계명을 향하여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무엇일까요?

먼저, 십계명을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법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당시의 법률의 형식을 빌고 있기는 하지만 법률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삶의 원리와 지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려고 할 때 가져야 할 삶의 정신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 십 세대에 걸쳐서 그들은 자유민이 아닌 노예로서 살아갔습니다. 노예생활 동안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삶의 가치관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이집트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들은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아가면서 당시 이집트 사회에 통용되고 있던 사회적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상들의 가치관과 전통과 문화를 상실해 갔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집트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그들의 가치관을 자기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두 번째로 노예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들은 노예로 살아가면서 그 환경에서 처세술을 터득합니다. 노예가 주인들과의 관계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를 잃어버리고 종이 되어 버립니다. 종의 삶이 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삶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전에 아르헨티나에서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아르헨티나 교회 연합회와 협력하여 동구유럽 난민들에 대한 구호 사역을 시작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 쪽에서 온 금발의 백인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2~3년 전에 아르헨티나에 왔고 어떤 사람은 벌써 7~8년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고가도로(autopista) 밑에서 기거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역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들 난민들의 거지생활에 대한 익숙함을 처리하는 문제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들은 거리에서 자는 것을 수용소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더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용소를 마련하고 좋은 침대를 마련해 주어도 거기에 있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향한 사역의 출발점은 거리보다는 수용소의 침대가 더 좋다는 것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삶의 원리를 바꾸어 주는 것이지요.

삶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마련해 주어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삶의 원리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돼지발톱에 매니큐어라는 말이 있듯이 원리가 바뀌지 않고, 삶의 기본적인 원칙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제도의 개선은 별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합니다. 삶에 있어서 제도의 변화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삶의 원리와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교육이라는 것은 훌륭한 제도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성서적인 지식을 전수하고 가르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교육은 단순히 성경 지식 혹은 신학적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뛰어넘어서 가치관의 변화, 삶의 원리를 변화 시키는 것을 향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제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신앙생활 하기 좋게끔 모든 시설과 제도를 마련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교회나 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진정 해야 될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삶의 원리나 가치관의 변화를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원리가 하나님 나라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급한 것은 제도의 정착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와 정신구조를 뜯어 고치는 것임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법률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삶의 원리와 정신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하나의 법으로만 생각해서 법률적인 체계의 구조차원에서 십계명을 바라본다면 또다시 정신개조 혹은 삶의 원리나 가치관의 변화 없는 제도만 개혁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십계명 강해를 통하여 거기에 나타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현대 사회가 주고 있는 가치관에 나도 모르게 물들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채택하는 신앙의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십계명을 ‘법대로’라는 잣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강해의 제목을 “법대로 사는 대쪽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은 제가 갖고 있는 의문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신앙은 법대로 사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조직체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씨족 사회로부터 부족사회 국가, 또한 여러 가지 개념의 국가의 모습을 거치면서 오늘의 근대적인 국가의 개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한 AR(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을 비롯하여 AR(증강현실), 메타버버스(metaverse) 등이 등장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조직체도 복잡해 졌습니다. 이에 따라 조직체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벌률 체계도 매우 복잡해 졌습니다. 무슨 법률이 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는 법에 의해서 유지되고 운행되는 사회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들의 머릿속에도 어느덧 ‘법대로’라는 의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법대로’를 외치는 사람치고 제대로 법을 지키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2021년 대선 정국에서 대선 후보들이 외치는 말 중에 중요한 단어가 “법치”입니다. 그러면 성서도 이처럼 ‘법대로’를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십계명은 바로 이 ‘법대로’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법대로’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십계명은 복잡하고 알아듣기 힘든 법들을 단순화 시키는 것입니다. 법의 정신을 올바르게 들어나게 함으로서 법의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려는 것입니다. 성서도 이러한 생각을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법’은 ‘법대로’라는 것에 그리 큰 매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법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신축적인 운용에 그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법의 정신을 바르게 보여 줌으로서 ‘법을 법대로 대쪽같이 적용함’으로서 올 수 있는 큰 오류를 방지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자면, 제6 계명의 경우입니다.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살인한 자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구약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자들이 다 사형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은 사형제도 말고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인한 자들이(실수나 혹은 그 외 정당한 이유로 살인한 자)법의‘법대로’의 적용으로 인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고려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는 계명은 단순히 살인하지 말하는 명령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의 생명, 그것이 법에 의한 범죄자 일지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중히 여기라는 계명입니다. 구약의 도피성 제도는 바로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의 정신을 이행하는 제도입니다.

십일조를 ‘법대로’의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십계명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인간이 조직을 이루면서 조직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서 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법대로’의 잣대만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십계명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을 위한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십계명 강해를 시작합니다. 십계명 강해를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의 법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법대로 하는 대쪽 인생’이 아니라‘사랑으로 넘쳐나서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꺼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법의 정신’을 계승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홍인식 목사(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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