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싫은 걸 싫다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이제야 시작되었다. ⓒGetty Image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증거다. 만들어 준 음식을 고루 잘 먹을 뿐만 아니라, 가득한 밥을 뚝딱 비운다. 떠 먹여주는 것을 받아먹든, 서툰 숟가락질로 여기저기 묻고, 흘리든 상관없이 그저 잘 먹는 것으로 기쁘다.

잘 먹은 것을 기뻐하노라니, 노오란 바나나 똥을 쑤욱 싼다. 냄새나는 것은 아랑곳없다. 기저귀에 싸 엉덩이에 짓이겨졌든 변기에 퐁당 쌌든 상관없이 묻은 똥을 닦아 준다. 그저 잘 싸준 것으로 기쁘다.

잘 싸는 것보다 기쁜 일은 쌔근쌔근 잘도 자는 것이다. 젖 먹을 시간에 맞추어 깨어나 칭얼거리고, 밤낮을 바꾸어 보채었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든 아기 얼굴을 보며 육아의 고단함을 거두어들일 기쁨을 얻는다.

‘아, 드디어 잠시나마 잠을 잔다.’

아기 성장, 육아 24시의 짧은 요약인 셈이기도 하다. 단초가 되는 것은 잘 먹는 일이다. 더위 탓인지 아기들도 밥을 먹는 것이 시원찮다. 입맛을 돋우어줄 무엇인가를 고민해야만 한다. 마침, 우리 아이들은 오이를 좋아한다. 길쭉하게 썰어서 주면, 막대 사탕만큼이나 맛나게 먹는다.

아삭한 식감을 좋아하는지, 향긋한 내음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시원한 청량감 때문일까? 수분이 가장 많은 식재료라니, 시원하게 열감도 식혀 주면 좋겠다. 제철인 식재료는 신선하고 값도 싸다. 오이가 제철을 맞았으니, 매일 먹을 이유가 충분하다. 수분이 많아도 시원한 얼음물을 더하여 새콤달콤하게 냉국으로 먹어도 좋다. 오히려 대부분이라는 그 많은 수분을 소금에 절여 쫙 빼고, 더하여 손으로 꽉 짜서 한 줌의 섬유질 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꼬들꼬들한 오이지도 좋다. 푸릇한 오이도 맛있지만, 누렇게 익은 노각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침에도 반찬으로 주저함 없이 오이를 택했다. 마치 여름 식사 준비의 루틴이 된 것처럼 반복된 익숙함으로 씻어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게 잘랐다. 아이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손에 쥔 오이를 베었다. 그런데, 다음은 익숙한 상상에서 벗어난다. 앞니로 잘라 어금니로 넘어가기도 전에 퉤 뱉어 버린다.

그러나, 예외가 된 그 상황을 나는 평소와 같이 대하여 거의 무조건 반사마냥 맞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골고루 잘 먹어야 한다.’ 즉, 삼켰어야 한다는 일상적, 바른 식습관 생활의 규칙으로 말이다.

“왜 뱉어?”

다만, 왜냐는 다그침에 발로한 질문이 뱉음을 우려하는 물음표를 맺는 미묘한 뉘앙스였다. 입 밖으로 ‘왜’에 힘을 주어 내뱉는 찰나의 순간, 아이가 뱉을 수밖에 없었을 다양한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덕분에 어린 자녀에게 배려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다. 하마터면, 더위에 잃어버린 입맛을 걱정하고 꼬박꼬박 끼니를 차려 먹이는 정성과 수고는 물거품이 될 뻔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엄마는 왜 착해야 하지? 그렇다면, 아이는 왜 착해야 하지? 어떤 것을 착한 것이라는 건가? 아침 댓바람부터 일상의 철학이 시작된다.

“써!”

‘혹시’라고 가정한 여러 예상 범주에 있었다. 오이를 뱉어낸 이유는 다름 아닌 쓴맛 때문이었다. 장을 보면서 급등하여 비싸진 채소 값이 부담되었다. 더불어 가물어 애타는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그뿐만이랴 기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멀리 다른 나라의 여러 형편까지도 걱정되었다. 장바구니에 오이만 아니라 시름을 가득 담아왔다. 장보다가 오만 걱정으로 정작 오이가 쓸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면, 쓰디쓴 시름과 함께 담겨서 더욱 써진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적으로는 오이를 싫어하는 이들은 쓴맛을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이라 했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싫어하는 대다수는 향만으로도 불쾌함을 준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 갔던 교회 여름 수련회의 기억이 떠올랐다. 밤늦은 시간까지 집회를 마치고, 간식을 제공해 주셨다. 포슬포슬 잘 쪄져 김이 나는 감자와 큼직큼직하게 잘 썰린 시원한 수박이었다. 찬양과 기도가 끝난 뒤에 허기짐을 채우고, 갈증을 가시도록 하는 달달한 시원함을 더하여 준다. ‘단짠단짠’에 필적할 ‘뜨찬뜨찬’의 조합이다.

같은 조의 후배는 어딘지 어색한 듯 불편해 보였다. 여럿이 먹는 것이니 미처 먹지 못하나 생각하여 친절히 권하였다가 머쓱한 것은 나뿐만 아니었다. 여럿에게 수박 먹기를 한사코 사양하였다. 마침내는 수박에 알러지가 있다고 했다. ‘수박 알러지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처음들어 생소한 알러지는 핑계이고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라 나름대로 생각했었다.

2017년 3월에 화제가 된 한 모임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 당연한 사실은 ‘누구나 나와 같다’는 다수의 억압과 일방적인 횡포로 자연스럽지 않게 된다. 당연히 좋은 것이라는 획일에 이른다. 그것은 폭력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아이러니한 새삼스러움과 함께 30여 년 전 여름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수박을 마다한 소수였던 그 후배에게 뒤늦은 미안함이 밀려왔다. 나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더라도 몰랐다는 옹색한 부끄러움까지 말이다. 그로부터 더 지난 지금도 쓴 박과의 작물이 단초가 되어 기억을 되새김한다.

마침내 다르다고 말할 용기와 용납되어 말할 수 있는 분위기는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일까? 내가 알기도 전부터 많은 사람이 그런 당연한 폭력에 숨죽이며 지나왔을 터이다. 그나저나. 밥 먹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는 어찌해야 할까? 어린 때와 임신기에 쓴맛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연구가들은 이에 대하여 독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한다. 나이가 들면 쓴맛을 찾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즐긴단다.

같은 맥락으로 쓴맛 나는 독성은 좋은 항암 성분을 포함하여 중·노년기에 유익한 도움과 필요 때문이란다. 잘 자라기까지 잘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난 뒤일는지는 모르겠다. 요사이 아메리카노 커피가 자꾸 당기는 것이 그런 건가?

권사님 한 분이 외국에 사는 첫 손녀가 이유식을 시작하게 되었다면서 한국에서 준비해 줄 만한 것들을 물어오셨다. 코로나로 딸의 임신과 출산에도 미처 가보지도 못한 안타까움과 타국에서 우여곡절로 성장 중인 엄마와 손녀에 대한 사랑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마음을 다해 핸드폰에 사진을 저장하고 입을 맞추기도 한단다. “엄마도 이렇게 내가 예뻤어? 아무리 나처럼 느꼈을까? 엄마는 나만큼 정성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가 된 자식들이 부모에게 하는 흔한 반응들이란다.

몇 해 전의 여름에 여동생 시어머니의 친정어머니가 별세하셨다. 수년을 치매로 지내셨고,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그 증세가 더욱 심하셨단다. 중증이 된 때에 큰 딸인 사돈께서는  어머니를 모셨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는 말은 오래 산다의 관용적 표현이나 모욕과 수치가 담긴 것이다. 인격의 장애와 인지 기능의 와해로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모든 행동들을 퇴행한다.

치매 노인 가족의 어려움과 그에 따른 삶의 질 하락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의 이상이란다. 사위인 남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곳이나 똥을 싸고 나면 씻겨드리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단다. 아들도 있는데 딸인 내가 왜 이렇게 사느냐 되려 하소연을 하셨단다.

그런 아내에게 한 남편의 말.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이며 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만 하게 어겨지는 것이 아기가 태어나서 최소한 3년이었으니,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만큼이라도 도리를 다합시다.” 동생이 들려준 후일담은 돌아가신 것이 모신지 딱 3년 되기 얼마 전이었단다. 내게도 아로새겨 기억된다. 존재 자체로 귀한 기쁨을 얻는 것 아닌가? 여겨지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말이다.

코로나, 기후위기, 내 삶의 미래. 어찌 될는지 한 치 앞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는 어찌하였든지, 잠들지 못하고 있다. 풀벌레 소리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만 들리는 야심한 밤을 지나고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 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스바냐 3:7, 새번역 성경)’ 그저 야웨의 심판의 날에 그루터기와 같이 남은자가 되고 싶다. 희망과 기쁨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아, 드디어 잠시나마 잠을 잔다.’

장사모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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