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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폭력이 사라진 하나님의 세상평화를 향한 행진(이사야 25,1-5; 누가복음 1,46-55)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08.19 16:08
▲ James B. Janknegt, 「The Visitation」 (oil/canvas•18”x36”•2008) ⓒhttp://www.bcartfarm.com/pp215.html

인간의 역사는 평온했던 적이 별로 없습니다. 집단이 크든 작든 사람들 사이에는 늘 갈등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작은 집단은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집단이 커져 서로 얼굴을 맞댈 기회가 작아지거나 거의 없어지면, 갈등은 쉽게 증폭되고 심화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니 집단과 집단의 관계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다른 집단은 언제나 이용 대상이고 경계 대상입니다. 전쟁과 증오가 잠재적 가능성으로 상존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성서는 뜻밖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그러한 곳이 아니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적어도 평화의 세계를 위한 객관적인 조건들을 갖추어 주셨습니다. 역사에서 경험할 수 없는 역사 이전의 조건들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좋다고 감탄하신 그 세상입니다. 뭇 생명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그 세상은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죄’가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한숨짓게 만들고 후회하고 멸망을 결정하게 한 그 죄는 무엇일까요? 타자를 향한 폭력이었습니다. 상대에게 있는 것을 빼앗고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고 상대의 생명을 앗아가는 폭력이었습니다. 각각의 생명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땅은 푸름이 아니라 피빛으로 물들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물들을 모두 동원하지 않으면 그 피를 씻어낼 수 없을 정도였나 봅니다.

하지만 홍수 심판 이후 깨끗해진 땅 위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폭력성과 야만성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곳곳에 울음을 만들고 피를 흘리고 뼈를 감추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울부짖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세상은 우리가 다시 맛볼 수 없는 꿈속의 세상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폭력과 전쟁으로 찌든 세상에 새하늘과 새땅을 기획하십니다. 이사야는 전체가 바로 이 기획을 드러내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세상에서 처음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을 어린 아이가 몰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합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풀을)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도 소처럼 풀을 뜯습니다. 젖먹이가 독사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을 칩니다(사 11,6-9).

이렇게 생명들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어리거나 크거나 함께 어우려져 뒹굴며 살아가는 새하늘과 새땅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시고 보신 세상입니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참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기획하시는 그 세상에는 동시에 새로운 질서가 들어섭니다.

생물체들 사이에 마치 굳어진 법칙처럼 작동했던 소위 약육강식의 질서가 해체된 것처럼 사람들과 집단들 사이에 있었던 강자의 폭력적 질서가 무너집니다. 강한 나라와 그 민족이 주께 영광을 돌리고 폭력적인 나라의 도시들이 주님을 경외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를 경외한다면, 그것은 폭력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폭력의 포기 없이 주께 영광 돌릴 수 없고 폭력을 미워하지 않고 주를 경외할 수 없습니다. 폭력을 수단으로 자기중심의 질서를 꾀하는 강대국과 그 나라 사람들은 주를 경외한다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도 그것은 주의 이름을 빙자한 거짓입니다.

그 기획은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만 아니라 나라 안에 그 도시 안에 새질서를 수립합니다. 주님은 빈자의 요새입니다. 곤경에 처한 자들의 피난처입니다. 폭양이 내리쬘 때 그늘막이 되어주십니다. 폭력적인 권력자들의 기세가 아무리 등등해도 하나님의 보호벽을 뚫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폭풍이 거세게 몰아쳐도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성서본문은 이렇게 고쳐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질서가 계속되도록 그저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강한 민족이든 폭력적 권력자들이든 그들의 소요와 그들의 노래에 하나님은 응답하시며 제압하실 것입니다. 이로써 만들어지는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은 약자들이 흘린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이처럼 평화와 평등을 지향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이상은 그 책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예언자만의 꿈이 아닙니다. 세상 곳곳에서 그의 새세상은 해방의 꿈을 불러일으키고 평등과 평화를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맞는 해방도 새세상을 향한 그 궤도 위에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해방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목표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력이 무너뜨릴 수 없는 성벽과 같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고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이끌며 그 목표를 향해 가고 계십니다.

그 목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이상의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으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질서의 전복입니다. 이것을 마리아는 그의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의 세력을 구축하는 자들을 그의 팔로 흩으시리라는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뱃속의 아기는 바로 그 하나님의 팔이고 힘이었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강고하게만 보였던 세상의 권력과 질서는 그 아기 앞에서 힘을 잃고 전복될 것입니다. 그는 주리는 자와 빈손인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이들을 그 나라에 들이십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상 새 질서의 핵심입니다. 마리아는 이사야가 보았던 그 세상이 그 뱃속의 아이에게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그 세상을 봅니다. 그 세상이 우리의 세상이 되기를 빕니다. 그 세상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세상을 이 땅에 옮기는 우리이기를 빕니다. 위기의 세상에 새세상으로 응답하며 우리의 해방이 주님 안에서 평등과 평화로 열매 맺도록 사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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