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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사 42:14-16; 행 21:39-22:16; 막 10:46-52)성령강림 후 열셋째 주일(8월2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8.20 15:44

1. 길‘가’에서 길 ‘안’으로

성령강림절기 마지막까지 성령의 놀라운 치유의 사역이 계속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난 말씀들을 살펴보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고치셨고, ‘못 듣는 자’의 귀가 열리고 맺힌 혀가 풀리는 기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눈먼 이’가 다시 보게 되는 기적이 이어집니다. 맹인들에게 광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가에서 한 인물을 만납니다. 그는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간청하여 마침내 눈을 뜹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예루살렘 길에 동행합니다. 길 ‘가’에서 길 ‘안’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사도행전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회심하기 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참된 진리에 눈을 뜨게 된 말씀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여 암흑이 광명이 되게 하신다는 축복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 주시고,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고 광명의 빛을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지금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 10:46-4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여리고를 나가실 때입니다.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지릅니다. 사실 마을이 아닌, 길 가는 경계인의 자리이고, 소외된 이들과 주변인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이러한 길가에서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막 10:48a)”, 사람들이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니 조용히 하라고 말합니다. 놀랍지 않나요? 이렇게 길가에 앉아있는 사람, 주변인, 거지, 혹은 경계인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늘 우리 사회에서 조용히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자기 몫을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몫을 받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고 말씀드렸죠? 차별을 극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먹고 마시고 듣고 보고 하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을 골고루 나누는 평등 세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자크 랑시에르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정치는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주장할 때, 즉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흔들어, 배제된 자들이 더 많은 몫을,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정치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몫을 달라고 외칠 때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시끄럽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막 10:48b-50)

마침내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릅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모든 것인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달려옵니다. 예수께서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1-52)

▲ 요한 하인리히 스퇴퍼, <바디매오를 고치시는 예수>(1861)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소원을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몫을 분배받고자 소외된 길가에서 뛰쳐나와 예수님을 찾았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에 동행합니다. 여리고 길‘가(παρά)’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정확히 누가 메시아인지 깨닫고 이제는 제대로 보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지금까지 병고침을 행하면서 감추어온 ‘메시아 비밀’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예루살렘으로 계속 길을 떠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치사의 변화가 있습니다. 처음 바디매오는 길가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라는 뜻의 헬라어 ‘파라’ 전치사는 ‘곁에, 가장자리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는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길‘에서(ἐν)’ 따른다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엔’이라는 전치사는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늘 경계인과 주변인의 자리인 길가에 앉아있었다면, 이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 안에서, 곧 길 안에서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와 동행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고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바디매오도 복을 받았습니다. 볼 수 없었던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사명은 바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길가에서 길 안으로 접어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으로 길가에 있었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길 안,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볼까요?

2.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3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울은 이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로마의 천부장에게 끌려갑니다. 그러나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과 복음을 변론할 기회를 얻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바울의 변론입니다. 변론 요지를 살펴보면, 먼저 자신의 출생과 출신배경을 설명하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자신이 받은 소명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이 사도행전 22장에 나오죠? 오늘 본문 21장 말씀은 22장 말씀의 배경입니다. 먼저 21장 본문 말씀을 볼까요?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행 21:39-40)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를 능통하게 하는 것을 보고, 바울에 대한 우려를 떨치고 바울에게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말인 히브리 말로 변론을 시작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볼까요?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행 22:1-3)

▲ 길리기아 지방 다소

바울이 자신의 출생과 출신배경, 그리고 신앙교육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다소는 바울이 태어난 로마 시대 소아시아 길리기아 지역(터키 내륙지역)의 정치적 수도입니다. 지중해에 있는 유명한 상업 도시이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항구도시였습니다. 또한 소아시아의 학문과 문화 그리고 군사적 중심지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소는 일반 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의 아테네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대학도시였습니다. 천연 요새인 다소 항은 키두누스 강이 지중해로 흐르고 북쪽은 타우러스 산을 포함하여 산맥으로 둘렀습니다. 풍부한 광물자원과 목재 또한 무역항으로 성장하는 데 좋은 조건을 제공했습니다. 특산물은 염소 털로 짠 직물이 유명하여 직조업과 천막제조업이 성행했습니다. 당시 천막제조업은 바울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행 18:3).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하나님의 상급’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탁월한 학자 7명에게만 부여하는 ‘라반(Rabban, 최고로 우수한 랍비)’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부여받은 랍비(Rabbi, ‘나의 선생님’이란 뜻으로 유대교의 현인)입니다. 이 당시 유대교에는 엄격하고 급하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샴마이(Shamail) 학파와 개방적이며 진취적이고 대중적이었던 힐렐 학파가 있었습니다(샴마이를 영남지역의 퇴계학파로, 힐렐을 기호지방인 경기, 충청의 율곡학파로 유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가말리엘은 힐렐학파의 대랍비 힐렐(Hillel, B.C.60-A.D.20)의 손자이며 중후한 학자적인 인품과 덕망을 갖춘 당시 유대교의 정신적인 지도자였으며 1,0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스데반과 바나바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아버지가 시므온이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눅 2:25-35). 아무튼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유대교에 열심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계속 바울의 말을 들어 볼까요?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행 22:4-5)

이 도는 그리스도교를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공안검사죠? 공안(公安)이라는 말은 ‘공공의 안전’을 의미합니다. 공안검사들은 2,000년대 이전만 해도 노동사건, 학생운동을 공안사건으로 몰아갔습니다. 7-80년대 공안사건과 대공사건(국가보안법 위반, 군사기밀위반, 반란, 내란 사건, 이적단체 구성 조사)을 해결했던 대검찰청의 공안부 검사들은 엘리트 중 엘리트만 가는 초특급 부서였습니다.

현재까지도 대공·선거·노동 사건을 맡는 공안통은 기획통, 특수통과 함께 검찰을 떠받치는 3개의 축입니다. 따라서 참여정부에서는 노동과 학원을 담당해 대공 사건으로 몰아갔던 공안 3과를 폐지했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다시 공안 3과를 부활시킵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때는 공안 검사 출신들이 정국을 주도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교안 법무부 장관, 김기춘 비서실장, 우병우 민정비서관 등이 공안 검사 출신이었으며, 현재 국민의힘당 브레인인 김재원 최고위원, 부산 북구·강서구을 3선인 김도흡 의원과 강원 춘천시의 김진태 전 국회의원 등이 공안검사 출신으로 지난 20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소속이었습니다.

법사위는 법무부, 법제처, 감사원 소관에 속하는 사항과, 헌법재판소 사무, 법원·군사법원의 사법행정, 탄핵 소추, 법률안·국회 규칙안의 체계·형식과 자구의 심사에 관한 사항을 담당(국회법 제37조 제1항 제2호)합니다. 즉, 입법과 법무행정, 사법부를 담당합니다. 권한이 너무 막강하고 분야끼리의 공통점이 크지 않기 때문에 법제위원회와 사법위원회로 분리하자는 말이 있고 현재 법사위 권한 축소에 관해 여야가 다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로 치면 치리권과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당회의 권한 일부분을 가진 것이며, 부산노회로 치면 정치, 인사, 고시 관계를 다루는 총무위원회로, 교단총회로 치면 정치부와 법제부가 함께 묶인 것입니다.

아무튼 출세를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공안 몰이에 매진했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서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유대교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 22:6-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체험은 바울에게만 일어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행 22:9-11)

▲ 니콜라스 베르나르 레피시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울>(1767)

눈이 있어도 진리를 보지 못한 바울이 이제 다시 눈을 뜨기 위해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메섹으로 가서 바울이 할 일을 가르쳐 줄 사람을 만나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박해의 그림자가 다메섹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박해자의 선두에 서 있는 자가 바로 바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나니아는 환상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찾아볼까요?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행 9:10-12)

놀라운 말씀입니다. 자신들을 잡아 죽이려는 공안검사인 바울을 만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아나니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바울에 대해 들은 소문을 주님께 아룁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3-15)

그러나 주님은 바울을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시며 아나니아를 재촉합니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훼방하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선 바울을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박해자인 바울에게서 ‘충성스러운 전도자’의 모습을 본 것일까요? 결국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사명을 줍니다.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바울의 말을 들어 볼까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2-16)

▲ 피에트로 코르토나, 바울에게 안수하는 아나니아

이렇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를 받고 죄를 씻은 바울은 이제 이방인의 사도로 땅끝까지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 놀라운 신비체험과 소명, 그리고 변화는 바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예수님은 죽어 무덤에 묻힌 분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시되, 그 길에 광명의 빛을 비춰주십니다. 이사야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3.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사실 이사야 말씀은 메시아로 인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 ‘승리의 찬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먼저 메시아의 구원은 심판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내가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하게 하며 그 모든 초목들을 마르게 하며 강들이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사 42:14-15)

그리고 그 심판 가운데 구원의 길을 예비하십니다.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사 42: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길가에 있는 자들을 길 안으로 오게 하시고, 핍박자를 회개시켜 죄를 사해주시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길을 가는 동안, 우리 삶과 소명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길가에 서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삶의 의미와 사명을 깨달았을 때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를 때,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영적 눈을 뜨고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그러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그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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