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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에 뿌리를 내리다인생의 변곡점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온다 ⑶
이해학 목사(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 승인 2021.08.22 15:43
▲ 이해학 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이정훈

그 무렵 오재식 박사가 이화여대·서울대 대학생들을 풀어 71년 8월 10일 광주단지 민중생존권투쟁 이후의 생활조사 사업을 하였다. 앙케이트 조사자료를 내게 가지고 와서 코딩을 하며 함께 분노하며 안타까워하였다. 내게 광주단지의 실상을 눈뜨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감상적 접근이 아니라 현실적 접근의 필요성을 가르쳐준 친구이다. 코딩 결과 몇 가지로 정리되었다. 광주대단지 빈민들의 요구사항은 첫째, 직장과 먹을 것이다. 둘째. 병이 나도 치료할 병원이 없었다. 셋째. 아이들이 교육받을 기관이 없고 놀이 환경이 없다. 넷째. 놀이터와 문화시설이 전무 하다, 등으로 정리되었다. 이 또한 내가 광주대단지, 지금 성남에 관심 갖는 계기이다.

황주석은 내게 와서 피곤에 지쳐 허덕이는 나를 최면으로 잠들게 해주곤 하였다. 황주석의 최면으로 잠들고 나면 머리가 시원하게 정리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그는 위수령에 걸리자 바로 군대로 뛰어들었고 그 뒤는 나와 만나지 못한 채 부천 YMCA를 통해 생활협동조합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언제인데 그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슬픔에 망연자실하였다.

어느 세대나 정치적 혼란은 반복된다. 천사와 동물이 공존하는 인간의 탐욕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을 보호하고 인재를 키우는 사회는 발전하나 큰 나무 자르듯 인재를 잘라서 자기 과오를 합리화하려는 힘이나 권력은 반듯이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우리는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를 되뇌며 고난의 계절을 견디었다. 권력자들은 강탈한 칼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된다는 강박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숨 쉴 수 있는 공간만 있어도 생존의 몸부림을 한다.

한신대는 나를 선과로 옮겨서 학업을 계속하도록 배려하였다. 선과는 일종의 청강생이나 교단에서 인정하는 목사 양성 코스였다. 나는 머리를 배코로 밀고 학교를 다녔으나 형사들이 학교에 압력을 넣어 학교 출입을 못 하게 하였다. 한 교수님은 나를 어렵게 설득하였다. 학교 출석은 안 해도 좋으니 리포트로 학점을 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학업이 단절되고 말았다. 그렇게 메운 학점은 형식이었고 75년에 선과로 졸업장을 받았다.

나는 그동안 안희국 선생님이 용인농장을 데리고 다니며 장미 접목방식을 가르쳐주며 농촌살리기 목회 훈련을 받고 있었다. 나도 덴마크의 <그룬트비히>를 상상하며 하나님 사랑, 농촌 사랑, 사람 사랑의 푸른 꿈을 꾸었었다.

그러나 <위수령 사건>으로 나의 운명이 바뀌어버렸다. 박형규·권호경 사단의 도시빈민선교회가 만든 수도권특수지역선교회(KOREA METROPOLITAN ORGANIZATION)에서 나를 실무자로 채 간 것이다. 영문 이름에서 뜻이 더 분명하다. 빈민을 조직하여 의식화하는 단체이다. 의식화란 빈민(민중)들이 사회의 주인이 되고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가 되도록 섬기는 것이다. 오재식 선생이 미국에서 빈민조직을 한 알랜스키(Allesky) 조직론을 문동환 교수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 브라질 민중교육가인 파울로 프레이리(P, Freire)의 패다고지(Pedagoge) 등으로 강의하며 훈련하였다. 의식화(conscientization)를 종교적 깨달음이나 우리시대의 아나키즘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의식화를 하나의 신앙 운동, 하나님 나라운동(Missio Dai), 생명 운동(JPIC)에 필수과정으로 신념화하면서 온몸으로 새로운 동학을 기대한 것이다.

나는 광주대단지(75년 성남시로 행정구역 명칭 병경)에 파송되어 지역사회의학(Community Medicine)에 의한 빈민병원설립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기업가와 의료사업자가 주도하는 돈벌이를 위한 기업형병원이 아닌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고 의사는 고용인이 되며 지역사회 전체를 예방하고 참여시키는 시민병원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에 제3세계 국가에서 붐을 일으켰으며 쿠바와 레바논, 중국 등에서 협동조합으로 성공적 운영을 하였다는 것이다.

광주단지 주민들이 5천 명 병원설립 청원을 하여 병원 설립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연세대 예방의학과 김일순 교수를 필두로 부산복음병원 장기려 박사, 박형규 목사, 연대 두 개 지역에서 지역사회의학을 실험하고 있는 시빌리 선교사 전종희 박사, 신○○ 박사, 채규철 선생이 도왔으며 현장 주민조직은 권호경 목사가 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주요 인사가 방문하여 병원에 필요한 의료기기를 지원키로 약속하였다. 병원부지는 주민들이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주민대표들과 시장면담과 설명회를 하였지만, 성남시 행정관들은 지역 의사들의 반대를 받아들여 의료부지 제공을 못 한다는 것이다. 더 큰 의도는 우리가 민중운동을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수유리 한신대에서 광주단지로 갈 때 이미 위수령 수감자 딱지가 붙어 형사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으며 경찰감시자가 붙어 다니며 나를 빨갱이라고 선전하였기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간에 모금한 자금으로 금호동에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나에게는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를 할 통로만 열려있는 외통수를 만났으나 나는 이 길을 스스로 선택한 생명신앙 고백으로 만들었다. 결국 푸른 농촌보다 삭막한 빈민촌을 서성이며 안기부와 국정원 그리고 감옥을 들락이며 담금질을 당하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인생이란 우연히 만난 변곡점에서 원하지 않은 길을 자기 결정으로 합리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유일한 길로 살아왔다.

잠언 말씀이 나의 것이 되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 길에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길에서 만난 바닥 사람들과의 끈적이는 얽힘에서 그들과의 애환에 빠졌다. 그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 보람으로 자리 잡았다. 생명의 소중함, 사람이 하늘을 담을 만큼 가치 있다는 것,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 급변하는 세계에서 새로운 문명권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우리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지 않고는 길이 없다는 것을 배워간다. 그리고 이 일에 생애를 걸고 윷놀이를 하면서 쉬엄쉬엄 살아간다.

감히 박정희와 나를 비교하는 것은 메뚜기 같은 짓이겠지만 그 지도자의 정책 속에서 많은 인생의 변곡점을 경험한 나로서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믿음으로 비교해보면 그와 나는 결이 다르다.

1971년 4월 17일. 김대중은 유세에서 박정희가 집권하면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 시대가 온다고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으나 모든 부정선거는 국민의 뜻을 꺾어버렸다. 남북 지도자들은 분단을 팔아서 권력 강화를 시도하였다. 박정희는 72년 10월 계엄령선포, 국회해산, 대통령 간선제를 감행한 유신을 선포하며 북에 보낸 비밀문건에 “유신은 통일을 위한 비상조치”라고 통보하였는데 박정희 그가 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의 총에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참으로 통일할 수 있었을까?

박정희는 통일 쇼를 하면서도 분단을 고착화하고 자본주의를 심화시켜 생명질서를 파괴하는 광기를 부렸다.

박정희의 성과주의적 개발정책의 성과는 소수의 특혜 그룹의 독점시장을 이루어 부익부 빈익빈의 결과를 초래하여 오늘날 심각한 양극화 사회 토대를 이루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자유를 부르짖으며 개인주의적 소유 욕망만 증대시켰다. 놀이와 쉼이 없이 오랜 군부 문화 속에서 폭력적 정서가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본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면서 경쟁 사회가 틀을 잡았다. 집단적 강박관념에 중독된 증거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많은 사회를 만들었다. 출구 없는 사회가 만든 필연일 것이다.

나는 위수령 경찰 조사에서 나도 모르게 기소가 되어 있어서 나중에 여권 만드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박정희만큼 받은 별이나 훈장은 없지만, 그로 인해서 긴급조치 1호에서 15년 형을 받고 긴급조치 9호로 3년의 형을 그리고 90년 통일운동 시 국가보안법으로 1년 6개월 받은 징역도 별이라 한다면 나는 5개의 별을 달았다. 그는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나를 증오하였지만 나는 감옥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와 나와의 차이다.

71년 위수령 파동은 내 인생에서 변곡점이다. 沼에 휘몰리지 않으려 발버둥쳐도 결국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물을 먹으며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곤 한다. 그때마다 내게 따뜻한 손길이 되어준 분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내게 하느님 같은 분들이었다.

이해학 목사(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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