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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복음 3:1-7)
이상중 목사 | 승인 2021.08.23 20:57
▲ 폴란드의 ‘마리아 안드레이’ 선수는 2020 도쿄올림픽 창던지기에서 획득한 은메달을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의 수술비용을 위해 경매에 내놓았다. ⓒMBC 뉴스 화면 갈무리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을 나의 밖에서 찾고자 한다면, 평생의 시간을 들여도 헛고생만 할 뿐입니다. 평안은 우리 내면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에, 마음에 주어진 이 평안을 날마다 선택하고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순간순간, 언제, 어디에서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아 하나님이 내 어려움을 아시고 책임져 주실 테니까. 언젠가는 해결이 될 테니까.’ 여서가 아닙니다. 평안하지 못하게 한 여러 이유들이 별 것 아님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자주 부르는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라는 제목의 486장 찬양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내 주 예수 날 사랑 하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건져 주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근심된 일은 여전히 있고, 곤고한 일도 많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 같고, 쉬는 날도 없이 바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내가 주님 안에 있음으로 평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쉽니다.’ 라고 고백하는 찬양입니다. 변한 것 하나 없지만, ‘주님 안에서’, 곧 달라진 삶을 살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찬양을 장례식장에서 많이 부르다보니, 이 가사의 고백이 죽어야 누릴 수 있는 평안, 비현실적인 평안이라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찬양에서 고백하는 평안과 쉼은 지금, 여기에서도 마땅히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평안과 쉼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상황이 변해야 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상황이 달라져야하기에 평안과 쉼은 먼 미래에 존재하고, 불확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간성에서 스타렉스를 타고 시동을 켠 채로 주차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 방 사장님이 나오시더니 저에게 ‘시동 좀 꺼주세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네? 왜요?’ 라고 질문을 드렸더니, ‘너무 시끄러워 서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차량 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저에게 시끄럽다고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리가 딱히 크거나 시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문제는 책 방 사장님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다음부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생겼습니다. 시동을 켜고 있으면,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하지 않을까?’, ‘새벽기도를 갈 때 지역 주민들이 차 소리 때문에 뭐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게 되었습니다. 때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며칠 동안 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재미있지 않나요? 전혀 문제라고 여기지 않고 살아왔는데, 어떤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들어온 이후부터는 문제가 되었고, 고통이 되었다는 점이 말입니다. 차는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데, 차를 타는 저의 태도가 변하면서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었습니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이 상황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하면서 삶이 달라져버렸습니다.

이 반대의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은 여전하지만 상황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함으로써 더 이상 고통으로 여기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의 찬양 가사가 바로 이런 변화된 시선과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이 모든 상황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고, 경험하겠다는 결단의 찬양입니다.

이번 2020 도쿄올림픽 여자 창던지기에서 폴란드의 마리아 안드레이라는 선수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매달을 목에 거는 건 그들의 간절한 꿈입니다. 평생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운동하며 힘들고, 어렵게 획득한 매달이라면 소중하게 다루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안드레이아라는 선수는 자신의 은메달을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12만5000달러 약 1억 4607만원에 낙찰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선수는 이 돈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자신의 모국에서 심장수술비가 부족해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던 8개월 된 아이를 위해 기증했습니다. 이 선수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매달은 단순히 하나의 물질이지만 누군가에겐 더 훌륭한 가치가 있다. 은메달이 옷장에서 먼지가 쌓이는 것보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데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박스)

‘매달은 단순히 하나의 물질이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안드레이아는 2017년 어깨 부상을 당했고 이듬해에는 뼈에 종양이 생겨 목숨과 선수생명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풍파가 삶을 대하는 태도, 물질과 생명을 대하는 태도를 새롭게 하거나, 또는 더욱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건들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삶의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삶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가 변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변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는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를 위해 덧붙여 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나지 않으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다른 세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보고 경험해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물세례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성령 세례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이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끊어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8:31-32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는 바뀌어야만 합니다. ‘뭐야, 대체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있다는 거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환경이 달라지기라도 하나? 똑같은 땅에 발 붙이고 살고 있고,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거야!’ 제자들도 굉장히 혼란스럽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예수님과 어떤 차이가 있기에 예수님의 눈에는 보이고, 제자들의 눈과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자신이 보는 것을 보고,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있으셨 듯, 우리도 예수님 안에 말씀 안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깨닫게 된 이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바타>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명언은 “아이 씨 유”입니다. 내가 당신을 본다는 간단한 문장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뜻이라면 명대사가 되지 못했겠죠? 이 영화에서 ‘I see you’는 내가 당신의 영혼을 봅니다. 내가 당신의 내면을 봅니다. 나는 당신의 완전함을 봅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보나요? 사람들은 누군가를 본다고 할 때 외모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학력에 집중하기도 하죠.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성격에 집중하기도 하죠. 그 사람의 부모나 배우자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보셨을까요?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 여전히 그 안에 존재하는 완전함을 보십니다. 세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혼란스런 세상 자체를 한계라고 보시지 않고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사람은 안 될 거야.” 얼마나 많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며 말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배우자? 자녀? 부모? 이웃? 직장동료? 이렇게 판단하고 말한다면 아래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 해 여전히 변화되지 못 한 사람이고 묶여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상대방을 판단합니다.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행과 불행을 결정해 버립니다. 그리곤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이미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넌 지금 불행한 거야, 넌 불쌍한 거야, 넌 아무것도 아닌 거야.” 하고 말이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이 변하냐 변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 그 완전함을 상대방을 통해 보기를 원하고 또 보게 된다면 그 순간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매번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모습만을 봤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의 형상, 완전함을 그 사람을 통해 보게 된다면 그게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보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겠습니까? 완전함을 보는 것, 바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주님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볼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알았습니다. 자신의 눈이 열려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쓰여 진 법의 글들이 아니라 법 안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기 원했습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시리아의 왕이 전쟁을 걸어왔을 때 하나님은 엘리사가 본 것을 시종도 볼 수 있도록 기도해, 하나님께서 시종의 눈을 열어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6:15-17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는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일반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을 너머서 볼 수 없던 것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육으로 볼 것인지, 육으로 경험 할 것인지 아니면 영으로 보고, 영으로 경험할 것인지 묻고 계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늘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과 사람과 세상과 상황을 믿음의 시선과 태도로 경험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성도로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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