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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왕국 예언자들은 어디에이스라엘 역사 알기 ㊹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8.26 16:23

분열 왕국의 예언자들

이스라엘 왕국 분열 이후 「열왕기」에 나타난 예언자들을 생각해 보면,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와 같은 인물들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열왕기」에는 이 세 사람의 예언자 외에 다른 예언자들에 관해서는 짧은 언급만 나타납니다. 우선 「열왕기」에 짧게 언급된 남북왕국의 예언자들을 왕국별로 구분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북왕국의 예언자로는 ‘여로보암’ 때, 벧엘의 늙은 예언자가 있었고(왕상13:11-32), ‘예후’ 왕조를 단절시킨 ‘바아사’ 시절에는, 그의 잘못을 지적했던 예언자 ‘예후’가 있었습니다(왕상16:7, 12). 또 ‘아합’의 죽음을 예언했던 ‘미가야’가 있었고(왕상22:7-28), ‘여로보암 2세’ 때, 북왕국의 영토 회복을 예언했던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있었습니다(왕하14:25). 이름 없는 예언자로 「열왕기상 20장」에 나타난 어떤 예언자도 있습니다.

남왕국의 예언자로는 북왕국을 향한 ‘르호보암’의 진군을 막았던 ‘스마야’가 나타나는데(왕상12:21-24), 그에게는 ‘예언자’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수식이 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스마야’ 직후에도 한 명 더 등장합니다. ‘여로보암’의 벧엘 제사를 규탄하기 위해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왕상13:1-10). 이 사람에 관한 언급은 이후 ‘요시야’ 때에 다시 나타나는데, 이때는 예언자로 표현됩니다(왕하23:18).

하나님의 사람과 예언자를 같은 사람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호한 측면은 있습니다. ‘엘리야’는 때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표현되고(왕상17:18, 24; 20:28; 왕하1:10ff), ‘엘리사’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립니다(왕하4-8장; 13:19). ‘하나님의 사람’은 예언자와 조금은 구분되어 보이지만, 큰 범주에서 보면 예언자 집단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Lambert Jacobsz, 「The Prophet of Bethel Meets the Man of God from Judah」 (1636) ⓒUSEUM(www.useum.org)

열왕기상 1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에 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부분도 있습니다. 「열왕기상 13장」은 「열왕기하 23장 15-20절」에 나타난 ‘요시야’의 벧엘 제단 파괴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장 전체가 ‘요시야’ 이야기를 위한 복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3장 3-6절」에 나타난 상황은 ‘여로보암’ 시절 실제 벧엘에서 벌어진 사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벧엘 제단에 관한 전승 자체가 ‘요시야’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유다 사람’이었다는 표현도 역사가의 첨가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그 ‘하나님의 사람’이 실제 유다 출신이었다 하더라도, 그에 관한 전승은 북왕국에서 계승되던 전승입니다. 「열왕기상 13장 24절」에 따르면 그는 유다로 향하는 길에 죽어버렸고, ‘벧엘의 늙은 예언자’에 의해 장례를 치루었기 때문에 그의 전승이 남왕국에서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에 관한 전승은 북왕국에서 전해지던 전승입니다.

역사서의 범위를 넓혀서 「역대기」까지 살펴본다면, 몇 명의 예언자를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대하 9장, 12장, 13장」에는 ‘르호보암’ 시절의 예언자 ‘잇도’가 나타납니다. 때론 이 ‘잇도’가 벧엘로 향했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과도한 연결로 보입니다. 「열왕기」에 나타나지 않고 「역대기」에만 등장하는 ‘잇도’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열왕기상 1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역대기」는 예언자들이 왕에 관한 글을 남겼다고 적고 있는데(대상29:29; 대하9:29; 12:15; 13:22, 26:22; 32:32), 이는 「역대기」 역사가 집단의 의도적 삽입구이지 실제 그들이 어떤 기록을 남겼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역대하 15장」에는 남왕국 ‘아사’ 시절에 활동했던 예언자 ‘오뎃’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역대하 28장」에서 ‘오뎃’은 남왕국 ‘아하스’ 시절에 활동한 북왕국 예언자로 나타납니다. 이 두 사람이 그저 동명이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15장 1절」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고 말하면서 실제 예언을 선포한 사람은 ‘오뎃’이라고 기록하는 혼동을 보입니다. 어쩌면 「역대하 15장 1-9절」이 ‘오뎃’이라는 후대 북왕국 예언자의 전승을 ‘아사’ 시대에 삽입하여 편집하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남왕국 예언자의 부재

「역대기」에만 나타나는 예언자들은 모호한 점이 있기 때문에 제외하고, 「열왕기」에 나타난 예언자들을 구분해 보면, 어딘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북왕국의 예언자는 ‘벧엘 예언자’, ‘어떤 예언자’, ‘예후’, ‘미가야’, ‘엘리야’, ‘엘리사’, ‘요나’ 일곱 명이 등장하는데, 남왕국의 예언자는 ‘스마야’,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앞선 언급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을 북왕국에 속한 인물로 본다면, 북왕국 예언자는 여덟 명이고 남왕국 예언자는 두 명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기 직전과 직후 남왕국 역사가에 의해 기록된 역사서입니다. 「열왕기」의 기록 연대는 아무리 빠르게 잡아도 히스기야 시절(주전 725-695년)이며, 최종 편집 시기까지 따진다면 바벨론 포로 기간 중(주전 586-36년)에 형태가 갖춰졌을 것입니다. 시기의 문제보다 중요한 점은 저작 집단이 남왕국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왜 남왕국의 역사가들은 남왕국 예언자들이 아닌 북왕국의 예언자들로 자신들의 역사서를 채웠던 것일까요? 이 역사서의 주된 독자층이 북왕국 출신의 난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남왕국 백성들이 역사서의 주된 독자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층을 배려하여 북왕국 전승을 이용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마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남왕국에는 예언자가 거의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열왕기」 안에도 다른 남왕국 예언자들의 존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왕하21:10; 23:2; 24:2). 또 열두 소예언서에서 출신이 적혀있지 않은 예언자들을 제외하더라도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던 ‘미가’, ‘요시야’ 시대에 활동했던 ‘스바냐’는 남왕국 출신의 예언자입니다.

특히 ‘미가’는 「예레미야 26장 18-19절」에도 나타나는데, ‘히스기야’ 시절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고,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지 않았다고 「예레미야」는 전합니다. 「예레미야 26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열왕기」가 기록되던 시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던 ‘미가’에 관한 진술은 「열왕기」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미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사야’의 이야기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 Gustave Dore, 「Micah Exhorts the Israelites to Repent」 (1866) ⓒ위키피디아

지면이 부족했기 때문에 남왕국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제외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면의 문제는 아니더라도 동시대 예언자들이 나타나지 않는 문제는 얼핏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예레미야’와 같은 동시대 예언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시대 예언자들의 정보를 몰랐을 가능성도 있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제대로 된 예언자인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는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되던 주전 586년경을 ‘예언의 종말기’라고 표현하였는데,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나타난 모습을 보면, 당시 너무나 많은 예언자가 존재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예언자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예언도 존재했습니다. 하나의 예로 「예레미야 28장 2절」을 보면 ‘예레미야’ 당시의 예언자 ‘하나냐’는 바벨론 포로기가 2년 만에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기가 70년간 지속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25:11f; 29:10).

「열왕기」 역사서의 작성은 바벨론에 의한 국가 위기 상황에도 이루어졌을 것인데, 이 시기는 검증되지 않은 예언들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작성된 예언서는 많지 않습니다. 포로 후기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있지만, 「스가랴 13장 1-6절」은 이후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이기 때문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변화들을 본다면, 이 시기를 ‘예언의 종말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남왕국의 성전 특수성

「열왕기」에 동시대 예언자가 제외된 점은 앞선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면, 그 이전 예언자들에 관한 기록은 왜 남기지 않았을까요? 남왕국 종교 정책의 특수성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남왕국의 종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언자들의 모습도 북왕국과 남왕국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북왕국 예언자들이 나타나는 상황을 살펴보면, 이들은 지역에 크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북왕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은 굳이 ‘사울’이 살고 있던 기브아에 가서 예언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특정 장소에서 왕을 만나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여로보암’에게 분열 왕국을 예언했던 ‘아히야’도 마찬가지이고, ‘아합’에게 예언을 선포했던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의 경우는 한 절에서만 언급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예언을 선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북왕국 예언자들은 사마리아 왕성을 찾아가거나 그 주변에 거주하면서 예언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남왕국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는 예루살렘에 ‘르호보암’의 군사가 모였을 때, 그들을 향해 예언을 선포합니다(왕상12:21참고). ‘이사야’는 조금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만, 일부 학자들은 ‘이사야’는 예언자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열왕기」나 「이사야」에서 ‘이사야’는 왕과 너무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이사야 8장 2절」을 보면 제사장 ‘우리야’와도 친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지리적으로도 왕이나 제사장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을 것입니다.

남왕국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종교 체계를 확립해 나갔기 때문에 예언자와 제사장을 유사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남왕국의 예언자는 북왕국에 비해 적게 등장하지만, 북왕국에는 없는 제사장 전승이 나타납니다. ‘아달랴’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요아스’ 시절의 제사장 ‘여호야다’(왕하11-12장), 아시리아 제단을 본 따 성전 제단을 만들었던 ‘아하스’ 시절의 제사장 ‘우리야’(왕하16:10f), ‘요시야’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제사장 ‘힐기야’(왕하22-23장)가 있습니다.

「열왕기」가 남왕국 종교의 중심 역할을 예언자에서 제사장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야’와 ‘힐기야’ 사이에 예언자 ‘이사야’가 나타나는 점을 본다면, 「열왕기」가 제사장에게만 집중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두 제사장의 시대 중간에 있는 남왕국의 왕 ‘므낫세’ 시절에도 많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고 전합니다(왕하21:10).

예루살렘 성전이 종교의 중심이었던 남왕국에 있어서 예언자들의 전승만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름 있는 제사장들 활동 또한 남왕국 역사가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신앙 전승이었을 것입니다.

야훼 신앙의 흐름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열왕기」 역사가들이 제대로 된 예언자인지 알 수 없는 동시대 예언자들의 이야기는 생략했고, 예언자 대신 제사장들의 이야기를 첨가했다 하더라도, 이들이 어떤 기준으로 예언자나 제사장의 전승 자료를 취사선택했는지의 문제가 남습니다.

예전에 ‘엘리야’와 ‘이세벨’에 관한 글에서 야훼 신앙은 북왕국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㉘ “‘바알’이냐 ‘똥’이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글에서 제가 놓쳤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עמרי)’입니다. ‘오므리’ 이름의 앞 세 글자는 아람어에서 온 말로 ‘예배하다’ 또는 ‘살다’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글자인 요드(י)는 야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므리’는 ‘야훼의 예배자’, ‘야훼에게 예배한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오므리’의 통치기간은 주전 885-873년이기 때문에 남왕국 ‘여호사밧(주전 870-849년)’보다 앞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모든 왕 중에서 ‘야훼’라는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사용한 왕은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입니다. ‘아합’ 시절에 남왕국은 북왕국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오므리’의 통치 기간 중에 북왕국의 영향력이 커졌을 것입니다. 남왕국에 야훼 신명을 가진 왕들이 나타나는 현상은 북왕국 영향력과 함께 야훼 종교가 전해졌음을 알게 합니다. ‘아하스(붙잡다)’, ‘므낫세(잊게 하다)’, ‘아몬(신실한)’을 제외하면 모두 야훼 신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훼 신앙의 본류가 북왕국에서 나왔고, 특히 ‘엘리야’를 비롯한 예언자 집단을 통해서 강화되었다면, 남왕국 역사가 집단이 그들의 전승을 사용하는 일은 당연해 보입니다. 저는 「열왕기」의 편찬 작업이 ‘요시야(주전 638-608년)’ 때에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이 시기에 과거 북왕국에서 계승된 야훼 신앙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재구성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다루었던 지난 글 중에서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⑽ ‘난민 여 예언자 훌다, 요시야 종교개혁의 중심’」에 여예언자 ‘훌다’가 북왕국 출신 난민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훌다’가 살고 있던 지역이 아시리아와의 전쟁에 의해 발생한 난민, 특히 북왕국 난민을 위해 확장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훌다’가 북왕국 출신이 맞다면, 「열왕기하 22장 14-20절」에 나타난,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그녀에게 검토받았다는 사실은 ‘요시야’ 종교개혁의 핵심 내용을 북왕국 예언자에게 점검받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때 생각해 볼 문제는 ‘요시야’ 이전 왕들도 야훼 신명이 들어간 이름을 사용했고 야훼를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요시야’ 때에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역사서를 편찬하면서까지 북왕국의 신앙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분명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해 보이는 점은 ‘요시야’ 이전, 조금 더 길게 보자면 ‘히스기야’ 이전에 남왕국은 북왕국의 야훼 신앙을 받아들였고, 야훼 제의를 행했을 것이지만, 이들의 신앙 체계는 지금 구약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야훼 신앙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그의 아들 ‘므낫세’에 의해 와해 되기 때문에 당시 야훼 신앙 체계를 확립하려고 했던 이들이 바벨론 포로기 직전까지 주류 세력을 형성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야훼 신앙을 선포했던 ‘예레미야’나 그를 도왔던 ‘사반’ 집안의 서기관 집단은 이 신앙 체계를 지켰을지도 모르지만,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들은 주류 세력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포로민들 사이에서 이들은 오히려 비주류였을 지도 모릅니다.

역사가의 정치적 특성

간혹 북왕국 야훼 전승에 대한 우리나라에서 나온 논문들을 읽을 때면, 결론적으로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이 전승을 받아들이고 전한 이유가 포로민을 위로하고 참된 신앙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학자는 ‘엘리야’를 통해 심판과 경고를 전하고 ‘엘리사’를 통해 치유와 회복을 전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북왕국 멸망 이후에 지금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 보게 되는, 야훼 신앙이 북왕국에서 남왕국으로 전달되었고, 남왕국의 역사가 집단이 북왕국의 신앙을 통해 영적 치유를 얻고 이를 전했다고 본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열왕기」에 대한 겉핥기식의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북왕국 난민 유입 이후 북왕국에서 전해진 야훼 신앙 전승 중에는 지금 우리 손에 놓이지 않은 전승들도 많이 존재할 것입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자신들의 손에 놓인 자료를 그대로 역사서에 옮기지 않았습니다. 전승을 취사선택 했고, 이를 조합하며 편집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엘리야’입니다.

앞서 언급한 지난 글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㉘」에서도 다루었지만, ‘아합’과 ‘엘리야’에 관한 전승들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실제 ‘여로보암 2세’ 때의 사건이 ‘아합’에게 돌려지기도 했고, 「열왕기」가 ‘이스라엘 왕’이라고만 적고 있기 때문에 실제 어떤 왕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합’만큼이나 다양한 전승이 혼재된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나타난 본문의 전승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안에서 다양한 전승을 찾아냅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많기 때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점은 ‘엘리야’에 관한 기록들 속에서 ‘엘리야’ 본인에게 속한 전승보다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북왕국 예언자들의 전승이 더 많다는 점입니다. 이런 연구에 비춰 본다면, 「열왕기상 17장」에서 「열왕기하 2장」까지 나타난 ‘엘리야’ 이야기는 「열왕기」 역사가의 의도에 따라 잘 짜맞춰진 이야기입니다.

역사가의 의도에는 야훼 신앙이 자리하고 있겠지만, 저는 그와 함께 역사가의 정치 성향도 들어 있다고 봅니다. 지난 글들에서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외세에 의존하는 정치 성향을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드렸습니다. ‘엘리야’와 ‘아합’의 대립도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야’와 ‘이세벨’의 대립이며, 이는 이스라엘과 페니키아 연합과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특히나 아시리아에 의존하는 왕들은 악한 왕으로 그리고, 반아시리아 정책을 펼쳤던 왕들은 선한 왕으로 이야기합니다. 앞서 야훼 신명이 들어가지 않은 남왕국의 세 왕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이 왕들은 모두 아시리아에 조공 외교를 펼쳤던 왕들입니다.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4-727년)의 비문을 보면, ‘아하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비문에는 ‘아하스’가 아닌 ‘유다의 여호아스(Ia-u-ha-zi)’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ANET 282). 학자들은 ‘아하스’의 왕명이 ‘여호아스’ 또는 ‘여호아하스’였을 것이고 ‘아하스’는 축약형이라고 추정하는데, ‘여호아스’나 ‘여호아하스’가 왕명일 경우, ‘야훼를 붙잡다’라는 뜻을 갖게 됩니다.

▲ 「디글랏빌레셀 3세 요약 비문 7」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

만약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왕명이 ‘여호아스’ 또는 ‘여호아하스’였다면,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그의 이름에서 ‘야훼’를 제거하고 ‘아하스’라는 이름으로만 기록하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는 ‘므낫세’나 ‘아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들 이름이 왕명임에도 불구하고 그 뜻이 다른 왕들과 다르게 애매한 상태인 점도 그 증거라고 봅니다.

「열왕기」 역사가가 북왕국 야훼 예언자 전승을 취사선택하고 편집하는 과정에는 왕권 강화와 같은 초기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고, 포로기 이후 포로민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봅니다. 신앙적으로 보자면, 외세가 아닌 하나님만 의존하는 신앙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되던 시기, 친바벨론 파벌, 친이집트 파벌, 친아시리아 파벌이 난립하던 상황에서 자주독립을 원하던 집단의 정치 성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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