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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도 만들지 말라(출 20:8-10, 32:1-6; 신 9:6-29)십계명 다시 읽기 ⑶
홍인식 목사(에큐메니안) | 승인 2021.08.30 15:59
▲ 아르헨티나 루한 성당 내부 ⓒGetty Image

유럽이나 혹은 남미의 오래된 성당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그것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성자들의 형상이 무수히 많다는 것입니다. 당장 아르헨티나 루한(Lujan) 성당에만 가보아도 우리는 성당 내에 얼마나 형상이 많은 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매번 특정한 성인의 날이 되면 그 성인의 형상을 만지거나 그 성인 형상 앞에 와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의 발걸음이 끊임이 없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실업율이 높아지면 많은 사람들이 ‘성 까에타노’ 성당을 찾습니다. 그의 축일이 되면 며칠 전부터 밤을 세면서 기다리는 신자들도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합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가톨릭 교인들에게는 이처럼 성인 혹은 마리아의 형상은 매우 익숙한 것들입니다.

그 반면에 개신교 교회에 가면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디에도 성자 심지어는 예수님의 형상도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십자가 하나 일뿐입니다. 가끔가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혹은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과격한 개신교회에서는 십자가조차도 걸어 놓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개신교회 내에서 십자가 외에 다른 조각물들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톨릭과 개신교는 교회의 건축 스타일에 있어서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개신교인들은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성인과 마리아의 상이 많은 것을 보면서 우상을 숭배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과연 가톨릭 교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일까? 그리고 과격한 어떤 개신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걸어 놓는 것도 우상 숭배일까?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두 번째 계명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에 대한 명령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실 상 교회나 성당 내에는 어떤 상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形像(형상, image)의 의미를 확대 해석한다면 어떤 그림이나 장식구라도 교회 내에 걸어서는 안 될 것이고 심지어는 믿는 이들을 십자가 혹은 하나님과 관련된 그 어떤 모양이라도 목이나 반지 혹은 귀걸이로 만들어서 달고 다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연 오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가 그런 것일까요?

먼저 오늘의 계명을 성찰해 보기 이전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의 차이점을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각각 열개의 계명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출애굽기 20:1~17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가 계명에 대하여 번호를 매기는데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개신교의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한 계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의 10번째 계명을 두 개로 나누어서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를 9계명으로 그리고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를 제10 계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내에서는 가톨릭교회를 향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형상을 만들지 말라’라는 계명을 없애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우상과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우상숭배 종교라고 까지 혹평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제1 계명과 2계명을 하나로 보는 곳은 가톨릭과 루터교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리해서 보는 곳은 유대교, 동방정교 그리고 일반적인 개신교입니다. 이 분리 방법은 양쪽이 나름대로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개신교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가톨릭이나 루터교회에서 형상을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둘째 계명을 의도적으로 없앴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입니다. 하여간 이 문제로 토론을 하고 싸움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인 사고와 문화 철학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것은 형상 자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주위를 기울여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세 개입니다. 1. 섬김, 2. 우상, 3. 절함이 그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하는 것은 모양을 본뜨는 활동이 아닙니다. 그 결과입니다. 그 형상을 절대화 하여 섬기고 절함으로서 우상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상을 본떠서 만드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절대화 하여 신격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문화적 동물입니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문화적 창조 작업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그 어떤 것들’을 모방으로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문화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본뜨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간은 본 따서(모방하여) 형상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만일 오늘의 계명을 형상을 만들지 말하는 단순한 말씀으로 해석한다면 인간에게 모든 문화적 활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계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절대화 신격화 하여 우상으로 섬기거나 절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계명은 형상을 만드는 일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의 계명은 단순하게 형상 만드는 것을 그침으로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교회처럼 우리는 아무런 형상을 교회 안에 만들어 놓지 않았기에 우리는 제2 계명을 범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외에 절대적인 존재는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상은 무엇입니까?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면서 마치 하나님처럼 절대자인 ‘척’하는 것입니다. 아닌데 ‘그런 척’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절대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마치‘하나님처럼 절대적인 존재’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생각하고 있다면 제2 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내에 예수님의 형상 혹은 그 외의 그림이나 장식품 십자가가 있느냐 없느냐가 오늘의 계명의 준수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의 계명은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모두 유한한 그리고 상대적인 존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리고 어느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가 상대방을 향하여 절대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2 계명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향하여 겸손한 태도와 사랑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유한하고 상대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서로 도우면서 협력하면서 연대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2 계명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땅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하늘과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는 삶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상대적인 세계를 우상으로 섬기면서 이 세계에 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그것에 절하고 사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에도 절하거나 그것을 우상화 하여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제2 계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향한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상대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의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역사적인 한계 안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이시지만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라는 명령은 하나님을 인간의 잣대나 생각으로 제한시키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인간의 생각)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분외에는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에 절하거나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계명을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형상’이라는 말이 외쳐 질 때 당시 청중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스쳐갔을까요? 아마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집트 왕들이 일으켰던 수많은 건축현장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형상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건축하기 위하여 강제노역의 현장에서 당했던 고생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 화려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형상 뒤에는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의 피와 땀 그리고 강제노동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의 만리장성을 보면서 놀라워합니다. 웅장하고 위대한 그 형상 앞에 감탄사를 연발 합니다. 그러나 만리장성 뒤에는 수많은 힘없는 백성들의 죽음이 있었음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사가 자랑하는 위대한 형상 뒤에는 이러한 억울한 죽음과 눈물과 한이 맺혀 있습니다. 하나님의‘형상을 만들지 말라’라는 명령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자유의 기쁨으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강제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해방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종교가 이러한 ‘형상’을 만드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건축이다 혹은 위대한 교회 사역이다 하면서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요구해 왔습니다. 어떤 때는 회유도 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그렇게 희생을 요구해 왔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의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종교의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제 2 계명을 귀담아 듣고 진지하게 받아들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건축하는데 온 관심을 쏟는 데에서 벗어나서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온통 건축과 세계제일의 위대한 교회를 만들겠다는 욕심을 절대화하여 형상화 하는 일을 그만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제2 계명은 종교가 만들어 내는 각종 우상과 형상에 시달려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과 희락, 환희와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믿음의 본질을 회복시켜 주는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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