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명기 24:17-22)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1.08.30 22:18
▲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의 임시 거주지인 충북 진천에 걸린 환영 현수막 ⓒNews1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은 우리의 밖이 아닌 내면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특정한 조건을 갖춘 누군가만 누릴 수 있는 세상의 평안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내면에 주어진 이 평안을 날마다 선택하고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며칠 전 ‘미라클’이라는 작전명으로 온 국민을 감동시킨 아프가니스탄 구출 작전 소식을 뉴스를 통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의 헌신 덕분에 390명이나 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전쟁과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감동적인 소식도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 국제공항 인근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70명의 사망자와 1천300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암울한 소식도 있었습니다.

이 테러로 인해 미군의 경우 13명이 죽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테러를 당한 이후 미국은 바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 안에 있는 이슬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 IS를 공습해서 테러에 가담한 인원을 살해했다고 밝혔습니다. 민간인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밝혔지만 사실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끝까지 추적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응징할 것을 공언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인 바이든이 가톨릭 신자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에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을 잡아가려는 한 종의 귀를 예수와 함께 있던 누군가가 칼로 쳐서 잘라버렸을 때 예수님은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시며 폭력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본때는 사랑으로만 보여주어야 합니다만 오히려 세상은 폭력엔 더 큰 폭력으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더 큰 폭력으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할까요? 그래야 ‘무서워서’ 또 다른 폭력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적을 폭력으로 짓눌러야만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쟁과 폭력은 국가 간에 또는 국가와 무장단체 간에 복잡한 이해관계 그리고 강대국의 무기산업과 뒤엉켜있어서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내 땅에서 벌어지는 일도 아니고, 나와 관계된 일도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모른 채 넘어가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 청어람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이런 기도문을 올렸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오니, 혼란 속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기억하시고, 평화로 임하소서. 탈레반의 정권 이양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카불에서 끔찍한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목숨을 잃은 이들과 가족들을 위로하시고, 아프가니스탄이 속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폭력과 폭력이 켜켜이 쌓인 참혹한 현실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풀리지 않는 질문과 함께 그래도 기도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아프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분명한 평화를 주옵소서. 무엇보다 여성들과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주시며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자들이 넉넉히 공급되게 하소서. 위협과 불안 속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이들이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게 하시고, 국제사회가 이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며 난민 수용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이 공동기도문에 ‘풀리지 않는 질문과 함께 그래도 기도합니다.’라고 쓰여 있듯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평화를 바라며, 힘과 폭력을 휘두르는 모든 이들의 온전함이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놈들이 나가 죽게 해주세요. 싹 다 망하게 해주세요.’와 같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된 원형이 있는 것을 알기에, 그들 안에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테러를 자행하고 또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이들의 모습 너머를 바라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 설교 시간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이 변할 수 있느냐, 변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느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 그 완전함을 상대방을 통해 보게 된다면 그 순간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매번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모습만을 상대방을 통해 봤는데 어느 순간 이런 보이는 모습 너머로 하나님의 형상, 완전함을 그 사람에게서 보게 된다면 그게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보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봄으로써 나와 상대방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완전함을 보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하는 길입니다.

이번에 한국으로 입국한 아프가니스탄 분들에게 붙여진 호칭이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들어보셨을 텐데요. ‘난민’이 아니라 ‘특별공로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내전이 일어났고,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나라를 탈출했기 때문에 사실은 ‘난민’이 맞지만 한국인을 도왔기 때문에 ‘특별공로자’라는 호칭으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왜 호칭을 달리했을까요? ‘난민’이라고 했을 때와 ‘특별공로자’라고 했을 때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난민이라는 편견은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여러 사건들로 인해 이미 판명이 되었습니다만 난민은 곧 ‘혐오의 대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이 ‘난민’이냐, ‘특별공로자’냐에 따라 바라보는 시선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난민’이냐, ‘특별공로자’냐,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 해주지 않았느냐 와는 상관없이 사랑하고 섬깁니다. 어떻게 불리건, 어떤 삶을 살아왔건, 누구이건 간에 보여 지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며 섬기고 사랑하면 그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41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44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비유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도와주었던 그가 또는 너희들이 외면했던 그가 바로 ‘나, 예수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실까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그들에게도, 예수님에게도,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렇기에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누구도 그렇게 바라보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원망하고 저주할 때 우리는 모두의 평화와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컷 욕을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라도 악인들을 위해, 우리의 적을 위해, 원수를 위해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외국 사람과 고아의 소송을 맡아 억울하게 재판해서는 안 됩니다. 과부의 옷을 저당 잡아서는 안 됩니다.”

왜인가요? 외국사람, 고아, 과부는 대신 변호해 줄 수 있는, 신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의 재판은 쉽게 억울한 상황으로 변질 될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재판했다고 해서 누가 나서서 항의해줄 이도 없습니다. 그럼 재판에서 이들이 이길 수 있도록 유리하게 해주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떤 배경이나 편견 없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재판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은 심각한 죄를 지어도 풀려납니다. 우리는 얼마 전 뉴스를 통해 S그룹의 부회장이 풀려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감옥에서 몇 년, 몇 십 년을 보내야만 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받은 형량을 다 채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를 하면서 제대로 재판을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희들이 종살이, 이방인이었을 때에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셨는지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18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거기에서 속량하여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재판도 그렇지만 이방인, 고아, 과부가 굶지 않도록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하라고도 명령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19 당신들이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입니다. 그래야만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20 당신들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마십시오.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입니다. 21 당신들은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마십시오.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명령 하십니까? 재판 때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설명합니다. “22 당신들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살이하던 때, 너희들도 이방인 이었고, 고아였고, 과부였던 처지를 잊지 말아라. 그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듯이 이제 너희가 구원의 도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4:1-2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알려주시는 모든 명령은 반드시 지켜라.’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지금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는 규례와 법도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아서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곳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2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한 말에 한 마디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지켜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는 까닭은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실현이 이루어져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목적이 이루어져야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이 유일하게 살 수 있다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선포 가운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처럼 이방인,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따라 실천하면 “그래야만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가 우리 삶에서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이런 사회적 약자를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말씀, 명령은 구약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 이후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야고보서 1:27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함으로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이방인,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사랑이 계속해서 흘러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신분이냐,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사랑으로 행할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께 작년에 이어 올 해도 제안을 드립니다. 우리 지역에 외국인 노동자 분들이 계십니다. 작년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 나왔을 때 지원금의 십분의 일을 헌금으로 내주셔서 정말 감사하게도 지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 분들에게 120만원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재난지원금이 나옵니다. 우리 중에는 88%에 속하지 않아 받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도 재난지원금의 십분의 일을 기쁨으로 내주셔서 지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 분들을 도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할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내가 너희를 구원했듯이 너희도 그들을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 

저와 성도님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마음에 어둠이 짙었던 그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는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고 속량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믿은 자들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도록 하셨기에, 먼저 믿은 자들이 우리에게 섬기는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도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은혜 받은 것을 흘려보냄으로써 누군가의 삶에 희망이 되어줄 수 있는 저와 성도니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이해인 수녀님의 ‘비오는 날의 일기’라는 제목의 시 중 한 부분을 읽어드림으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논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비 고운비
맑은 비가 되자.’

아멘.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