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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누구인가?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㉚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1.08.30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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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기독교의 주요 교리 가운데 하나인 삼위일체론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한 위격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삼신론(三神論)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식이자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역사상 매우 논쟁적이고 복잡한 신학적 주제이기에, 별도의 자리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의 한 위격인 ‘성령’은 누구이고, 어떤 분이신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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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 전승되는 성령 이야기는 매우 다양합니다. 성령강림사건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렇게 서로 다른 전승들은 성령이 누구인지, 성령은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성과 은사의 풍성함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 하여, 예수님의 생애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를 증언합니다(마 1,18; 눅 1,35).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났습니다(마 3,16-17; 막 1,10; 눅 3,21-22). 같은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셔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게 하셨고(마 4,1-2; 막 1,12-13; 눅 4,1-2), 그 후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눅 4,14-19).

성령은 예수님의 삶 처음부터, 그리스도로서의 그의 사역에 동행하신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성령 임재의 강력한 표징은 치유와 귀신 축출에서 드러났습니다. 공관복음서 가운데 오직 마태만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고 합니다(마 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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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다양한 임재 방식과 여러 가지 기능이 복음서들에 전승되고 있지만,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복음만이 유일하게 성령을 ‘보혜사’(parakletos)라고 표현합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일반적으로 ‘위로자’, ‘상담자’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의 본래의 뜻은 ‘누군가를 대신하여 함께 계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변호사’라는 의미가 헬라어의 뜻에 가장 가까운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에 따르면,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 후에 제자들에게 보내시는 진리의 영입니다(요 16,7).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십자가 죽음으로 제자들을 떠나신 역사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재림하실 때까지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하시는 현존 양식입니다. 성령은 이미 오신 역사적 예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실 분으로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영입니다(요 16,16).

처음 제자들은 역사의 예수님은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의 독자들은, 거의 2세대(60년) 후의 독자들로서 예수님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고, 다만 구두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공관복음서보다 늦게 작성된 요한복음서는 주후 1세기 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했던 박해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제자들과 달리, 이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의 박해와 추방, 심지어 환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제자들과 더 이상 함께 머물 수 없는 안타까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둘 수 없기에(요 14,18),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성령은 박해와 추방의 위협, 순교의 위험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 시련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하여, 보혜사로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진리의 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모든 위험과 고통, 환난과 고난이 그리스도인들만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몸의 속량을 고대하며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령은 악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면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고난 받는 현실이 너무 무거워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성령은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심으로(롬 8,23-27),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은 중보의 기도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롬 8,27)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금방 응답받지 않는다고, 성령의 중보기도가 하나님께 들리지 않는 것 같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롬 8,25).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 ⓒGett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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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 다른 전형적인 성령강림 사건 이야기는 누가의 사도행전에 실려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다고 합니다(행 2,13).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예언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예언은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행 2,15-18)는 약속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 사건은 방언 현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방언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천사의 비밀스런 말로(고전 13,1; 14.2), 성령 임재의 표징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례를 받은 신도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행 19,6). 그러나 방언은 성령의 여러 은사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병 고치는 은사를,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예언하는 은사를,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시는데,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신다.”(고전 12,8-11)고 합니다.

바울은 방언이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나누어 주시는 수많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이고, 성령을 통하여 그런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12,7). 그런데 방언은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니, 오직 자기에게만 덕을 끼치지만, 예언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은사이므로, 오히려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4,2-5).

그렇습니다. 방언을 비롯한 모든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기에, 우리가 받을만한 자격이나 능력을 갖추었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는 단지 은혜의 선물이고, 우리는 다만 간절히 은사를 사모할 뿐이고(고전 14,1; 14,12),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딤전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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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성령강림 사건을 예언자 요엘의 말씀이 성취된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나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행 2,17-1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임하는 때, 어디에서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 차별, 젊은이와 늙은이 사이의 세대 차별, 주인과 종 사이의 계급 차별이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마지막 날은 핵전쟁이나, 기후위기와 자연재해, 감염병 재난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지구가 파괴되는 날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세상,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환상이 없고, 늙은이들에게 꿈이 없는 때,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미래가 없는 때가 사실은 마지막 날이지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오늘, 이런 차별로 신음하고 있고, 환상과 꿈 없는 미래 때문에 탄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힘입어, 이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롬 8,21)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마라나타! 우리 주님, 오시옵소서!”(고전 16,22).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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