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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를 넘어서: 보름달과 같은 ‘대승적 기독교’를 지향하며(사 55:6-13; 벧전 1:13-21; 마 6:5-15)창조절 셋째 주일(9월19일) 남신도회주일/한가위감사주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9.17 00:26

1.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창조절 둘째 주일 말씀부터 창조절기 마지막 주일까지의 말씀은 모두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잘 지키고 보전하며 주님 주신 사명을 올 곧게 감당하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존 방식에 관한 말씀이었죠?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염려하지도, 또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면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도 믿음과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주일인 창조절 셋째 주일 말씀은 이렇게 믿음과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일이 남신도회주일이자 한가위감사주일인데, 남신도 회원 여러분들은 물론, 한가위를 맞아 때로는 대면으로, 혹은 비대면으로 만나는 가족들이 모두 믿음과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평안한 날, 좋은 날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저희 가족도 추석 당일, 온 가족이 서설 및 자가 격리를 끝내고 함께 모이게 됩니다.)

서신서 말씀부터 볼까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 전서를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련과 연단을 통해 장래에 주어질 고난의 축복을 이야기 하고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3-16)

왜냐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의 헛된 행실을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사해주신다고도 말합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λυτρόω)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7-19)

여기 ‘대속(代贖)’이라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 ‘남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거나 속죄(贖罪)하는 것’을 뜻합니다. 기독교적인 의미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보혈(寶血)로 만민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십자가 보혈, 그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가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대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대속 신앙을 말했지만, 사도 바울 역시 십자가 대속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그 핵심이 로마서 3장 25-26절인데, 바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ἱλαστήριον, 속죄제물 곧 속죄소)’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5-26)

▲ 성소 내부와 지성소 안 증거궤 앞 대제사장
▲ 증거궤, 속죄소를 열면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십계명 돌판이 있다.

성경과설교연구원 우진성 원장은 ‘화목제물’을 뜻하는 ‘힐라스테리온’을 그냥 ‘속죄소(속죄판)’로 번역하면 바울 신학의 ‘예수의 대속 신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진성 원장의 말입니다.

“성전 지성소 안에 법궤가 놓여 있었다. 이 법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언약을 새긴 돌판, 만나를 넣어둔 금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히 9:4). 이 셋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과 불순종의 죄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들이다(민 16-17장, 출 16장, 32장 참조). 이 법궤를 덮고 있는 윗 뚜껑을 ‘속죄판(히 9:5, 개역은 ‘속죄소’)’이라고 불렀는데, 이 두껑이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이다. 히브리서 설명대로,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 속죄 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의 윗 뚜껑인 속죄판에 피를 바르는 예식을 행하고(히 9:7),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법궤 안 내용물을 보시고 인간의 죄를 기억하는 대신 이 피를 보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도록 중보하며 빌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의 보혈이 친히 속죄소(힐라스테리온)가 되어 인간의 죄를 가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속 사상을 유대교 성전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와 속죄소로 이해하니, 이해가 쉽고, 또한 유대교 전통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그 핵심을 잘 이어오며 극복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어린 양의 피’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바뀌게 된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온전히 바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들에게 알리신 것이죠? 다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볼까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0-21)

이제 말세에 우리들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가까이 계신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사실 오늘 구약 이사야 55장 말씀은 제2이사야(바벨론 이사야)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바벨론 포로시기에 고통 받는 유대민족을 향한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자,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초대’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초청을 받고 응답하라고 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초청을 받고 나아오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인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계속 본문 말씀을 볼까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8-11)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과 뜻은 헛되지 아니하며 형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쁨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가 참된 평안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55:12-13)

3. 너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따라서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여호와의 기념이 되어야 하고 영영(永永, 영원히 언제까지나)한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순간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기도의 정석을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살기 위한 매일 매일의 훈련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에도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죠?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하라는 말씀인가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6-8)

이렇게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과 간구기도 말고, 진정한 기도의 모범을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잘 보여주십니다.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만, 한번 볼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오늘도 이 세상에서 용서하고 시험에 들지 않으며 악한 길로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참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주기도문 마지막에 특별히 용서에 관해 언급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앞서 대속신앙을 말씀드렸는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한가위 명절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대면으로, 혹은 비대면으로 안부를 묻고 건강을 걱정하며 명절 음식을 먹고 즐겁게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가족이라도 남보다 더 못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명절을 맞아 다 용서하고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를 예수께서 사해 주셨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용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저는 이들의 용서와 신앙에는 그 어떤 배타적인 울타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4. 울타리를 넘어서

한신대학교 김경재 명예 교수의 『울타리를 넘어서: 대승적 기독교론 서설』 (유토피아, 2005)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김경재 교수는 ‘개인 영혼 구원’, ‘내세의 영생 복락’ 추구에 치중하여 민족공동체의 역사 현실을 외면해온 기존의 기독교 신앙 행태를 ‘소승적 기독교’라고 질타하면서, 대승적 기독교의 정신을 소개합니다. 물론 여기서 대승(大乘)은 큰 수레입니다. 불교 용어입니다. 초기 소승(小乘)불교가 자기 완성(自利)을 목표로 한 작은 탈것이라면, 대승불교는 많은 사람의 구제(利他)를 목적으로 하는 큰 탈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위: 안창호, 이상재, 이승훈, 김약연, 조만식 / 아래: 이동휘, 김재준, 문익환, 유영모, 함석헌

특히 10인의 그리스도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땅의 MZ세대, 곧 청년들은 물론, 남신도회원 여러분들이 인생의 지표로 삼을 만한 ‘큰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안창호, 이상재, 이승훈, 김약연, 조만식, 이동휘, 김재준, 문익환, 유영모, 함석헌 등 10인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만나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살고 간 영적 교사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위대함이 ‘신앙생활’에 있지 않고, ‘생활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생활신앙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같이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생각했고, 개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민족공동체의 구원을 생각했으며, 내세의 구원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큰 믿음’을 지니고 살아간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김경재 교수가 말하는 대승적 기독교는 이렇습니다.

“첫째, 이원론적 기독교를 극복하여 ‘전일적 실재관’을 회복한다.” 이것은 하늘/땅, 초자연/자연, 거룩한 것/속된 것, 정신/물질, 이성/감성 등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전자를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후자를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온 잘못된 생각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초월을 ‘생명 한복판의 창조적 초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몰역사적 타계주의 신앙을 극복하여 공동체의 역사적 구원을 지향한다.” 이것은 ‘개개인의 영혼을 이 세상에서 구원해 저 세상의 천국으로 인도해내는 것’을 교회의 ‘제일 업무’로 여기는 기독교의 행태, ‘개인의 영혼 구원’과 ‘저 세상 천국의 영생복락’이라는 소승적 타계주의 신앙관과 ‘복음주의’를 극복하고, 현세의 공동체가 자유, 정의, 평화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헌신하는 대승적 구원관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부정하는 숙명론적 인간 이해를 극복한다.” 이것은 ‘원죄론’만을 강조하여 인간의 창조적 가능성을 지나치게 부정하는 폐단을 극복하고, ‘원축복론’으로써 균형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교리주의, 율법주의, 광신주의를 극복한다.” 이것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셈족계 종교가 빠지기 쉬운 세 가지 함정인 교리주의, 율법주의, 광신주의를 극복하고 지성, 덕성, 감성이 함께 숨 쉬는 초월적 영성 안에서 하나로 통전 되는 성숙한 신앙을 통해 인격의 변화와 공동체의 창조적 혁신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한국의 종교 문화 유산과 타종교를 배격하는 배타적 기독교 신앙을 극복한다.” 이것은 오늘날 종교문화의 다양성은 이웃 종교에 대한 관용 정신과 상호협동정신을 요구하며, 빈곤, 환경위기, 전쟁, 질병 등 지구촌 인류가 직면한 근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사상』 2021년 5월호 대담에서 김경재 교수는 대승적 기독교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대승 그리스도교를 말했을 때는, 단순히 그리스도교가 ‘개인 구원’만 강조하고 ‘사회구원’에는 관심이 없다는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교가 세 가지 바벨론 포로 상태, 즉 이스라엘 민족사, 서양 문명사, 성서에 너무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매이면 유대교의 아류가 되어 버립니다. 유럽의 문명사에 매이면 ‘서양 종교’가 되어 버립니다. 성서는 위대한 책이지만, 성서가 있기 전에 하느님이 계셨고 성령이 역사하셨습니다. 성서는 복음의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것을 강조한 것이 대승 그리스도교였습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그리스도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만유를 품으시는 하느님을 믿으며, 인종과 지역과 문명을 포괄하는 큰 종교인데, 현실에서는 너무 좁아졌어요. 그런 종파적 그리스도교를 극복하는 게 내 꿈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는 이스라엘 민족사와 서양 문명사, 성서에 너무 갇혀 유대교의 개신교, 서양의 개신교, 문자 개신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의 개신교, 인종과 지역과 문명을 포괄하는 개신교, 성령 충만한 개신교가 되기 위해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숨겨진 바벨론의 흔적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야만 한국 개신교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 한가위 보름달과 같은 대승적 기독교 신앙을!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은 남신도회주일이자 한가위감사주일입니다. 우리 남신도들의 신앙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렇게 한가위 보름달과 같이 넉넉한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를 품는 보름달같이 포근했으면 좋겠습니다. 밝고 환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지난 2주간 아이들이 코로나 확진으로 격리 시설에 가 있을 때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저 역시 확진을 대비하여 이것, 저것 분주하며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혼란했던 시기가 지나고 다시 일상을 조금씩 찾게 되면서 조금 넉넉한 마음입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위기의 때든지, 평상시든지 늘 넉넉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과거완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좋은 길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말고 차분히 주님께서 주신 길을 자세히 보아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심판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 소망을 품고, 좁은 소승적 그리스도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저 둥근 보름달을 품는 대승적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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