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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는 이스라엘 역사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될까이스라엘 역사 알기 ㊺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9.23 15:57

사사들

지난 글들에서 ‘사울’, ‘다윗’, ‘솔로몬’이 통치했던 초기왕정 시대는 대략 100년으로 보이기 때문에 주전 1029년에서 930년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이 기간 안에는 ‘사무엘’의 통치 기간도 포함됩니다. 이제 왕정 이전 사사 시대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 연표

위의 표는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의 활동과 기간을 정리해놓은 표입니다. 표에서 혼동을 일으키실 수 있기 때문에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두 번째 사사 ‘에훗’의 활동기간은 80년으로 적혀있는데, 「사사기 3장 30절」에 따르면, 이는 ‘에훗’의 활동 기간이라기보다 ‘에훗’ 이후로 이스라엘이 평온했던 기간입니다. ‘에훗’의 정확한 활동 기간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경우 그의 활동이 「사사기 3장 31절」과 「사사기 5장 6절」 ‘드보라’의 노래 속에 나타납니다. 그가 몇 년 동안 사사로 활동했는지, 어디에서 활동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블레셋과 대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드보라’의 노래 속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은 그가 분명히 ‘드보라’보다 앞선 시기의 인물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때로 인터넷상에서 사사 시대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면,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사사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적어놓은 글이나 도표를 보게 됩니다. ‘바락’을 사사라고 표기하진 않더라도 ‘드보라’의 이름 옆에 ‘바락’을 함께 적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과도한 남성중심적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기는 ‘드보라’와 함께 ‘바락’이라는 남성 사사가 있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사사기 4장 4절」은 분명하게 ‘드보라’가 사사였다고 말합니다. ‘바락’은 ‘드보라’와 함께 전쟁을 치른 장군 정도로 보는 편이 옳습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경우는 사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회색으로 음영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기드온’이 죽은 이후 사람들을 선동하여 왕위에 오릅니다. 어찌보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는데, 통치 3년차에 세겜 사람 ‘가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아비멜렉’을 빼고 본다면 「사사기」에는 12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이때 12라는 숫자의 사사는 의도적인 편집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 18절」은 실로의 제사장 ‘엘리’가 사사로 세워진 지 40년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또 「사무엘상 8장 1-2절」은 ‘사무엘’이 자신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사사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는 히브리어 샤파트(שׁפט)의 번역으로 본래 의미는 재판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사사기」가 아닌 「판관기」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사사들의 모습은 재판관의 모습보다는 전쟁 지휘관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사사기」에서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드보라’ 밖에 없습니다(삿4:5). 

재판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사는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보다는 「사무엘」에 나타난 ‘엘리’나 ‘사무엘’이 더 적합해 보입니다. 「사사기 11장 6절」에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가 자신들의 사사가 되기를 구하지 않고 ‘장관(카진 קצין)’이 되어 달라고 말하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과는 대조적으로 ‘엘리’나 ‘사무엘’은 전쟁의 전면에 나서지 않습니다.

만약 사사들의 주된 역할이 처음 왕위에 올랐던 ‘사울’과 마찬가지로 전쟁 수행에 있었다면, 그들을 부르는 명칭이 ‘재판’과 연결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출애굽에서 왕정 이전 시기까지 사사라고 불린 인물들은 「사사기」에 나타난 12명 외에도 더 많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도 전쟁만 치른 인물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사들 중에서 12명이 선별된 점과 이 12명에 관한 전승 중에서 전쟁과 관련된 내용만 취합 편집되었다는 점은 「사사기」가 어떤 의도로 기록되고 편집되었는지 알게 합니다.

여러 곳에서 많이 보셨겠지만, 「사사기」는 기본적으로 아래의 순환 도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사사기 구성 도식

「사사기 17-18장」에 나타난 ‘미가’라는 사람의 집과 그의 제사장 이야기, 「사사기 19-21장」에 나타난 레위인의 아내 이야기와 베냐민 지파 몰살 이야기는 이 도식과는 맞지 않지만, 이는 이스라엘이 어떤 죄를 범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삼손’과 블레셋의 전투 이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평안을 이룬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렀다는 내용으로 「사사기」는 마치게 됩니다.

사사들의 연대

「사사기」는 처음에 제시한 표에 적혀있는 사건들, 타국의 압제와 사사의 등장이 순차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드보라’ 이야기의 마지막인 「사사기 5장 31절」의 마지막과 ‘기드온’ 이야기의 시작인 「사사기 6장 1절」의 도입을 보면, ‘그 땅이 40년 동안 평온하였더라’로 끝났다가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로 시작됩니다.

이런 연결 문구로 인해서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의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쭉 나열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사기」는 앞서 언급한 순환 도식이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들이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열거되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의 활동기간과 아비멜렉의 통치기간을 모두 합치면 299년이 됩니다. 또 이방 민족으로부터 압제를 받았다고 말한 기간을 모두 합하면 111년인데, 이 둘을 합하면 410년이 됩니다. 여기에 「사무엘」에 통치 기간이 나와 있는 ‘엘리’와 ‘다윗’의 연대 40년씩 80년을 합하면 490년이 되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열왕기상 6장 1절」에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지 4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고 말하는데, 이때가 출애굽으로부터 480년이 지난 때라고 말합니다. 학자들은 이 480년이 출애굽에서 성전 건축까지의 기간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는 시점으로부터 역산된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과 ‘고레스’ 칙령을 시작과 끝으로 잡고,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그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말하기 위한 후대의 편집이라고 말합니다.

▲ 성전건축 시작부터 고레스 칙령까지의 도식

분열왕국 이후 「열왕기」에 나타난 남왕국 왕들의 통치 기간을 겹치는 기간 없이 모두 합하면 393년입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한 시기는 40년간 통치한 ‘솔로몬’ 4년차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하기까지의 기간은 37년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시드기야’ 시기 성전이 파괴된 주전 586년부터 ‘고레스’ 칙령이 있던 주전 536년까지로 50년입니다. ‘솔로몬’ 통치 37년, 분열왕국 이후 남왕국 왕들의 기간 393년, 바벨론 포로기 50년을 합하면 480년이 됩니다. 「열왕기상 6장 1절」에 나타난 연도 표기 방식이 후대의 바벨론 달력 체계에 따르고 있으며 단어도 후대의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받아들일만 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후대의 편집에 의한 숫자일지라도 그 내용이 앞선 역사 기록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솔로몬’ 이전까지의 490년은 ‘사무엘’과 ‘사울’의 시기가 빠져있습니다. 그런데도 480년보다 10년이 많습니다. 이점이 「열왕기」를 마지막으로 편집한 역사가들의 실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이 「사사기」를 몰랐을 가능성도 없다고 봅니다.

이들은 고레스 칙령으로부터 12×40인 480년 전에 맞춰서 성전 건축 시작점을 잡았습니다. 어쩌면 「열왕기」에 나타난 몇몇 왕들의 재위 기간이 이상하게 어긋나 있는 이유가 여기에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은 이들이 「열왕기」에 나타난 연표의 숫자를 수정하면서 「사사기」와 「사무엘」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분명히 포로기를 겪었던 어떤 집단에 의해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성전 건축 시작점부터 고레스 칙령까지 480년은 맞춰놓았는데, 그 이전의 기간은 애매하게 만들어놓았다는 점이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어쩌면 이 역사가들이 「사사기」에 나타난 기간을 차례대로 단순 합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들이 어떤 이유로 「사사기」 안에 사사들과 압제의 기간을 410년으로 그리고 있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적어도 「열왕기」는 솔로몬 4년, 성전 건축이 시작된 때로부터 480년 전에 출애굽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워낙 고대의 역사 기록이기 때문에 몇 십년의 오차는 감안하면서 본다면, 이를 바탕으로 출애굽까지의 연대를 추정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출애굽 연대와의 연관성

어쩌면 사사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출애굽 연대를 추정한다는 이야기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연대와 가나안 정착 연대는 사사 시대의 시작점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사사 시대를 추정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연대를 추정하는 작업은 바벨론 포로기 연대부터 시작해서 역산하는 방식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온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업을 수행할 때 온전히 성경에만 근거해서 추정할지, 고고학 자료들을 함께 보면서 오차를 수정해나갈지, 성경을 무시하고 고고학 자료만을 이용할지를 판단하면서 연대를 추정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왕정 시대의 연대를 추정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연대와 고고학 자료를 최대한 조화시키며 융합시켜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경의 연대에서 조금 벗어난 연대표가 작성되기는 했지만, 그 오차는 아무리 커도 30년이 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오차는 허용범위 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출애굽 연대는 오차가 너무 크게 발생합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출애굽 연대를 추정했습니다. 저희가 판단한 초기 왕정의 시점이 주전 1029년이었고, 여기에 ‘엘리’가 사사였던 40년, 「사사기」에 나타난 410년을 합하면 대략 주전 1480년이 됩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기간이 10년 정도였다고 본다면 주전 1490년이 되고,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헤맸던 40년을 합하면 출애굽을 시작한 시기는 주전 1530년경이 됩니다.

주전 1550-1530년은 이집트 제15왕조인 ‘힉소스’가 팔레스타인으로 쫓겨나던 시기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⑶ ‘이스라엘 역사라는 상상력’」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50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힉소스’였거나, ‘힉소스’보다 더 큰 개념인 ‘아아무’의 일원이었다고 본다면, 둘 사이에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이집트 제18왕조의 창시자인 ‘아흐모세(주전 1550-1525년)’에 의해 추방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추방’이라는 표현에서 느끼실 수 있겠지만, 이는 「출애굽기」의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다가 ‘탈출’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힉소스’는 하부 이집트를 다스리다가 이집트 제18왕조에 의해 점령당하고 추방당한 인물들입니다. 노예라는 상황에도 맞지 않고 탈출이라는 상황도 맞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에 나타난 연대의 숫자만 일치합니다.

이와는 다르게 「출애굽기 1장 11절」에 나타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바탕으로 연대를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집트 왕조 중에서 람세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제19왕조와 제20왕조에 11명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 건축 사업을 일으킨 왕들도 몇 명 있습니다. 학자들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파라오가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주전 1279-1213년)’일 것으로 봅니다. ‘람세스 2세’는 제19왕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이기도 합니다.

‘람세스 2세’ 때 출애굽이 일어났다면 그의 다음 왕인 ‘메르넵타(주전 1213-1203년)’ 재위 5년에 세워진 석비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또 예전 글에서도 언급한 일이 있지만, ‘람세스 2세’는 다른 파라오에 비해 장수했기 때문에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아들이 그보다 일찍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주전 13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요단 서편의 광범위한 파괴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이 파괴 흔적이 단일 집단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고, 「여호수아」에 나타난 점령지에서 벗어난 지역들도 있었으며, 군사적 침략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곳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 파괴 흔적을 무조건 「여호수아」에 나타난 전쟁의 증거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파괴의 흔적 중 일부는 「여호수아」와 연결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헷족속에 대한 언급입니다. 성경에서 헷족속이라고 일컫는 이들은 철기 문명의 대표주자로 알려져있는 히타이트입니다. 히타이트 제국은 주전 13세기경 상당히 세력을 확장하여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충돌하게 되었고, 주전 1274년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주전 1,295-1,272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전쟁이 카데쉬 전투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이집트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결국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평화 조약으로 이어졌고,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통치권 일부를 히타이트에 넘기게 됩니다. 이때 맺은 조약이 ‘카데쉬 평화 조약’이며 고대 최초, 유일의 평화조약으로 평가됩니다.

▲ 카데쉬 조약 석판 일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소장 ⓒ위키미디어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람세스 2세’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집트로부터 도망쳐서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수 있었는가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바로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지 못하고 40년간 광야를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사기」가 헷족속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사기」에서 헷족속에 관한 언급은 ‘여호수아’ 시절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에 한정되어 나타납니다. 「사사기 1-3장」은 「여호수아」와 거의 겹치는 내용입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 지역에는 헷족속이 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후에는 헷족속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만약 출애굽이 주전 16세기에 이루어졌고, 주전 15세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있었다고 한다면, 자신들을 침략한 이방 민족으로 헷족속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팔레스타인 지역에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 히타이트 제국 주전 1350-1300년경 ⓒ위키피디아

하지만 헷족속에 대한 언급이 정착 초반에만 나타나고 이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사사 시대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1세(주전 1274–1245년경)’의 등장과 함께 히타이트 제국이 몰락한 이후였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런 몇 가지 사항을 따져보았을 때 출애굽 시기는 주전 13세기경으로 추정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들과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을 연결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추정이지만, 성경에 나타난 연대는 무시하거나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출애굽이 주전 16세기에 일어났을지, 주전 13세기에 일어났을지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둘 사이에는 최소 200년에서 최대 3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크기 때문에 저희는 둘 중 한 가지를 조심스럽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어쩌면 이 문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성경에 나타난 연대를 고고학적 발견들과 잘 조합하면서 사사 시대를 추정하고 출애굽 연대를 추정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역산해나갈지, 여러 정황을 토대로 출애굽 연대를 확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사사 시대를 재구성할지의 문제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타난 사건의 기록들은 모두 출애굽을 주전 13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연대 기록만 주전 15세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분명 모든 사건이 순차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적어놓고 있지만, 이를 마지막으로 정리했던 역사가들은 그것을 순차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만약 이들이 「사사기」에 나타난 연대를 단순 합산해서 410년으로 읽었다면, ‘다윗’의 통치 40년과 ‘솔로몬’의 성전건축 시작 4년을 합쳐서 어떻게든 480년으로 수정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사사 시대가 이집트 ‘람세스 2세’ 통치 말기에서 ‘메르넵타’ 재위 5년 사이에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대략 주전 1230-1220년경입니다.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왕정시대는 주전 1029년에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사사 시대는 200년정도 지속되었다고 판단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200년의 기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사사들은 어떤 인물들이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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