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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대접하며 섬기라!(대하 1:7-12; 살전 5:12-28; 마 7:1-12)창조절 넷째 주일(9월2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9.24 16:02

1.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주의 백성을 제대로 재판하게 하소서!

창조절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잘 지키고 보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곧 주님께서 주신 창조 질서 보전의 사명을 올곧게 감당하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이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위정자들은 지혜를 통해 백성들을 잘 섬기고, 또한 사람들, 곧 형제간에는 서로 대접하며 섬기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러한 삶을 살도록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흠 없이 보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루카 조르다노, <솔로몬의 꿈>(1694-96)

먼저 구약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꿈꾸었을 때 간구한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더불어 부귀와 영화까지 솔로몬에게 주셨습니다. 복음서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천국 시민이 지녀야 할 신앙 자세로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참된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신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사이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그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시니, 솔로몬이 하나님께 말하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내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시고 내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같이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사오니,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대하 1:7-10)

솔로몬이 무엇을 구합니까? 지혜와 지식이죠? 통치자로서 세상의 이치에 관한 지식과 사람들 간의 도리와 규범 지식에 대한 지혜로운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백성들 앞에 나아가 올바른 재판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정자들은 제대로 재판해야 합니다.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젊은 나이에 법조문에 관한 얕은 지식으로 판단하고 기소하는 판사, 검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식뿐만 아니라, 참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솔로몬의 요청에 하나님은 부와 재물과 영광도 더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대하 1:11-12)

우리가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지식과 지혜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을 올바로 이끄는 것이었죠? 사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분쟁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분쟁을 조정하는 것이 위정자이고, 재판인데, 솔로몬은 바로 그 재판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올바로 판결했던 것입니다. 서신서 본문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재판하는 사람, 곧 다스리며 권하는 사람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다스리는 자들을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울은 서로 간에 ‘사랑하고 화목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천국 시민의 삶의 자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과 자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 도메니코 페티, <티와 들보의 우화>(1619)

사실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된 ‘산상수훈’의 결론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으로 잘 요약합니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글인데, 아주 충격적이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한번 소개해 봅니다.

“80대 치매 노인이 60대 아들에게 ‘아저씨, 저 새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 저 새는 까치예요’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똑같은 질문이 5~6차례 이어지자 화가 난 아들은 ‘아버지 이제 더 묻지 마세요. 도대체 몇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80대 노모가 오래된 일기장 한 권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펼쳐진 빛바랜 일기장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빠 저 새 이름은 뭐예요?’ ‘아들아 저 새는 까치란다.’ 아들은 오늘 까치란 새에 관해 30번이나 물었다. 30번 다 까치라고 대답해 주었다. 우리 아들은 훌륭한 조류학자가 되려나 보다.”

부모의 입장에도 서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고 대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입니다. 작아도 그냥 자기 눈에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볼 수 없습니다. 커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눈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늘 항상 남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내면의 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자기 성찰이자 거룩한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눈의 티만 바라보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늘 거룩한 것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내면의 눈을 뜨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게 되면 구하는 것마다 다 받을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왜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실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9-12)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내면의 눈을 뜨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흠 없이 보전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바로 그런 말씀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3.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실 오늘 본문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 말씀은 바울 사도의 마지막 권면과 인사입니다. 바울의 서신서에서는 물론, 신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먼저 쓰인 데살로니가전서는 후서와 더불어 ‘재림서신’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혼란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본서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문제, 곧 종말론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룸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을 다루는 말씀의 마지막은 너무 평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勸戒, 타일러 훈계함)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 5:14-15)

종말의 때에도 늘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잠시 로마의 멸망 때로 돌아가 볼까요? 410년 8월 24일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날입니다. ‘영원한 도성’이라 불리던 로마가 멸망한 것입니다. 이 당시에 살았던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북아프리카 히포(현재의 알제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입니다. 교회사가인 후스토 곤잘레스는 『초대 교회사』에서 로마 멸망 당시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 히포의 어거스틴

“어거스틴이 숨을 거둘 때, 반달족들은 히포를 포위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그들은 이집트를 제외한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장악했다. 그보다 수년 전인 A.D 410년에는 알라릭이 이끄는 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되었다. 그보다 앞서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는 황제가 고트족에게 참패를 당하고 살해되었으며, 고트족 병사들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까지 접근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는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313년)한 이후, 교회에 대한 핍박이 사라진 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로마에 의해 핍박받던 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한 편으로는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강인한 신앙이 세속적으로 타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학과 교리 연구가 진척이 된 시대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핍박을 받지 않고 평안한 때에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서로마 제국의 멸망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믿은 로마는 이방인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도성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때문에 로마가 멸망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방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자는 뜻으로, 또한 로마의 멸망이 그리스도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최초의 역사철학에 해당하는 『신의 도성(De civitas Dei)』(413-426)을 저술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의 도성과 세상 도성(civitas terrena)은 인간 역사상 언제나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불신자는 인간들의 방법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며 살도록 예정되어 이 두 가지 세력이 세상에 존재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영원한 도성(나라)’인 로마의 멸망은 이방인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교 때문이 아니라, 로마가 ‘하나님의 도성(신의 도성)’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로마는 세상의 도성이라고 합니다. 로마는 불완전하며, 결핍되어 있고, 욕망과 죄가 가득한 곳이라고 역설합니다. 비록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믿고 있지만, 따라서 로마에 약간의 선과 의로움이 있지만, 결국 세상의 도성이기에 심판받아 마땅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영원한 도성은 어디인가요? 바로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은 이 세상의 도성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도성을 통해 ‘세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을 구분하고, 로마의 멸망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잘못이 아니라, 로마가 세상의 도성이기 때문이라고 변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세상 왕국의 할 일은 땅의 평화(Pax terrena)를 실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은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행동양식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말하는 도성(나라)은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 도성의 차이점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세상에 대한 사랑’, ‘자기를 경멸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자기의 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두 도성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성은 의로운 자의 나라를 사모하고, 세상의 도성은 악한 자의 나라를 사모하는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이렇게 세상의 도성에 살지만,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6-22)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따라서 인간들 가운데 확립된 이 두 도성은 마지막 심판 때에는 서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사람들은 선한 천사들과 연합하여 그 왕과 함께 영생을 향유하고, 세상의 도성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천사들과 함께 연합하여 그 왕과 함께 영벌에 던져질 것입니다. 물론 두 도성은 그 본질상 신비적이며 초자연적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진리-선-질서-평화의 나라’이며 참된 사회이고, 세상의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을 거부하는 사회로 ‘오류-악-무질서-혼란’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흠 없이 보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 절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잘 지키고 보전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께서 주신 창조 질서 보전의 사명을 올곧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스리는 자리에 있다면 겸손함으로 지혜를 통해 백성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또한 서로간에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며 대접하고 섬겨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서신서 본문 말씀 마지막에 이렇게 당부합니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5:25-28)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따르며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또한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날까지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흠 없이 보전하실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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