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수수께끼 같은 해양민족과 이스라엘의 사사들이스라엘 역사 알기 ㊻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9.30 15:22

사사 시대 배경

지난 글에서 저는 사사 시대가 주전 1230-1220년경에 시작되어 왕정이 시작된 주전 1029년까지 약 200년간 지속된 것으로 판단한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전 1200-1100년은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청동기가 끝나고 철기로 전환되던 시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갔다면 상당한 수준의 문명 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시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암흑기로 불립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약 50여년에 걸쳐 청동기 붕괴가 일어납니다(주전 1206-1150년경).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이 시기에 광범위한 도시 붕괴도 일어납니다.

청동기 시대까지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은 주로 낮은 지역에 촌락을 만들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수많은 촌락이 고지대로 옮겨가는 양상을 보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계단식 농법이 도입되며 농지가 고지대로 옮겨진 이유도 있고, 철기를 지닌 세력이 저지대를 점령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문명의 전환기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몇 가지 이유만으로 시대의 변화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고고학자들이 이 시기를 암흑기로 부르는 이유는 발전상보다 붕괴의 흔적이 더 많이 발견된다는 점, 새롭게 정착한 고지대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청동기 시대의 유물에 비해 기술적으로나 정교함에서 뒤쳐진다는 점, 거대 제국들(이집트, 히타이트, 미케네 등)이 제국의 형태를 잃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암흑기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너무나 분분합니다. 대규모 자연재해(화산, 지진, 가뭄)로 인해 이런 파괴가 일어났다고 말하기도 하고, 철기가 시작되면서 군비확산에만 집중하다보니 식량문제에 당면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치, 사회, 경제 체제의 변화가 시작되며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이와 함께 거론되는 것이 해양민족의 침입입니다.

해양민족의 침입

해양민족(Sea Peoples, 바다 민족이나 해상민족으로도 부름)이라는 이름은 1850년대 프랑스인 이집트학자 엠마뉴엘 드 루제(Emmanuel de Rougé, 1811-1872)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됩니다. 그는 메디넷 하부(Medinet Habu) 유적에서 발견된 람세스 3세(주전 1184~1153년)의 ‘델타 전투(주전 1175년)’에 관한 기록을 통해 해양민족을 설명하였습니다.

▲ 메디나트 하부 유적 ‘델타 전투’ 묘사도 ⓒ위키피디아

이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3세는 해양민족의 침략을 잘 막아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람세스 2세 통치 말부터 시작된 해양민족의 침략은 이집트를 외부적으로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람세스 3세의 아들인 람세스 4세(주전 1153-1147년) 때부터 이집트는 쇠퇴기를 거치게 되고, 결국 이집트 신왕조(제18-20왕조)는 주전 1,069년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이집트 제21왕조(주전 1069~945년)부터는 이집트의 제3중간기(주전 1069-664년)로 불리며, 이집트가 제국의 형태를 잃었던 시기로 분류됩니다. 특히 이집트 제21왕조는 내분으로 인해 주변 국가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거대 제국 이집트에까지 혼란을 야기한 집단이 해양민족인데, 이들은 그리스 북부에서 기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다만 당시에 남아있던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이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는 있었습니다.

▲ 해양민족 이동경로 ⓒ위키피디아

위의 지도는 옥스퍼드 출판사의 Atlas of World History에 실린 도판인데,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충돌 지역도 보라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또 주전 13세기 거대 제국이었던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세력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세 개의 거대 제국은 초기 철기 시대에 제국으로의 힘을 잃게 됩니다. 히타이트와 미케네는 붕괴되었고, 이집트 신왕조도 붕괴되어 제3중간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위의 지도는 주전 12세기에 파괴 행위를 일으켰던 이들을 해양민족으로 칭합니다.

해양민족에 관한 이론도 상당히 다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이론을 모두 다룰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들의 파괴 행위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파괴의 목적이 불분명합니다. 우가릿에서 발견된 토판에는 이들의 침략과 불타는 도시에 대한 묘사, 이로 인한 구원 요청이 담겨 있었습니다. 약 3,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토판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 토판이 고열에 구워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우가릿 지역의 도시는 어떤 도시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으나 우가릿 지역 역시도 해양민족에 의해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구원 요청이 적힌 토판만 남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해양민족은 광범위한 침략 행위를 벌인 후, 침략한 도시를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라져버립니다. 해양민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이들의 파괴 행위에 목적을 알 수 없다는 점, 침략한 도시를 불태워버려서 붕괴시켰다는 점,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점 때문에 이런 민족의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 초기 철기의 도시 파괴 ⓒ위키피디아

위의 지도는 주전 12세기에 파괴가 일어난 도시와 침략을 막아낸 도시가 나타나 있습니다. 전투 기록이 남아있는 지역은 연대도 표시되어 있는데, 이 침략 행위가 주전 1210-1110년까지 대략 100년에 걸쳐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앞선 지도와 이 지도의 차이는 이 침략 세력을 해양민족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이동 경로에 따라 그 지역에 있던 세력들이 이동하며 침략 행위를 일으킨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의문점은 생깁니다. 약 100년의 기간 동안 최소 네 개의 집단이 거대 제국들을 침략하며 파괴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들은 왜 자신들끼리 충돌하지 않고 제국만을 표적으로 삼아 파괴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좀 더 납득할만한 학설이 나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팔레스타인은 청동기 붕괴와 더불어 가장 혼란을 겪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블레셋의 발흥

해양민족에 대한 여러 이론 중 한 가지는 그들이 팔레스타인 서편 해안지역에 정착했으며 블레셋 족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3장 3절」은 블레셋을 ‘다섯 통치자들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사사기 3장 3절」에도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이 언급됩니다. 또 「사무엘상 6장 4절」에서 언약궤가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블레셋에 재앙이 내렸고 이를 해결할 방법이 나타나는데, 블레셋 사람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속건 제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블레셋이 단일 민족이 아닌 최소 다섯 부족의 연합체에서 시작했음을 보여주는데, 그렇다고 블레셋의 전신이 해양민족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블레셋 지역은 주전 13-12세기경 에게해나 동부 지중해의 문화를 가진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㉟ ‘이스라엘 왕국의 실제 모습은 무엇이었나’」에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블레셋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입니다. 블레셋은 ‘함’의 자손으로 표현되고(창10:14), 실제적인 등장은 ‘아브라함’ 시대에 나타납니다. 「창세기 20장」에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나타나는데, 「창세기 21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그가 블레셋 땅으로 갔다고 말합니다(창21:32). 「창세기 26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아버지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 그때 연루된 왕도 그랄 왕 ‘아비멜렉’입니다. 「창세기 26장」은 그를 블레셋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그랄 왕이 블레셋의 왕으로 불린다고 해서 ‘아브라함’ 시대에 블레셋이라는 국가가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과거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했던 이집트의 기록에는 블레셋이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랄이 당시에 블레셋 지역이었기 때문에 블레셋이라는 이름이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출애굽기」에는 블레셋이 종종 나타납니다만, 가나안에 있는 족속이라고만 나타납니다. 앞서 언급한 「여호수아 13장」은 블레셋 땅을 아직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 나타난 블레셋은 특정 국가를 지칭하고 있다기보다 지리적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블레셋이라는 국가의 영역을 알고 있는 후대 역사가들의 첨언일 수도 있습니다.

블레셋이 분명하게 적대 국가로 등장하는 것은 「사사기 13장」의 ‘삼손’ 이야기 이후입니다. 「사무엘상」에서는 블레셋이 거의 유일한 적대국으로 나타납니다. ‘사울’과 ‘다윗’은 거의 블레셋과 전쟁을 벌입니다. 특히 「사무엘상 9장 16절」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은 블레셋을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확정 짓습니다.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이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에 최대 적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사기 3-5장」에는 블레셋에 관해 생각해볼 만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사사기 3장 31절」은 ‘삼갈’이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삼갈’의 이야기는 단 한 절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주지 못합니다. 그가 대적한 블레셋이 국가를 의미하는지, 그 지역 사람을 의미하는지 모호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사기 4-5장」에 나타난 ‘드보라’의 이야기는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줍니다.

‘드보라’가 상대했던 적은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였습니다. 학자들은 이때 가나안 왕이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가나안은 한 번도 단일 국가로 묶여서 가나안이라는 국명으로 왕을 세운 일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나안 지역의 왕이 나타나는 경우, 가나안 지역 어디의 왕이라던가, 가나안 지역의 왕들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사사기 4장 2절」에 나타난 가나안 왕은 잘못된 표기로 해석되며 ‘야빈’은 가나안이라는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솔 지역을 통치하던 인물로 보입니다.

「사사기 4장」에서 ‘야빈’보다 더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인데, 최근의 연구는 ‘시스라’가 루비어(Luvian) 계통의 이름이라고 봅니다. 루비어는 히타이트 지역에서 사용되던 언어입니다. 위의 지도에서 하솔은 해양민족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얀 데 브레이(Jan de Bray, 1627-97), “야엘과 시스라” ⓒ위키피디아

그런데 ‘드보라’ 시대에 이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있었는데 그가 특정 국가의 왕은 아니었고, 그의 군대 장관 이름에 팔레스타인 북부 아나톨리아 지역 언어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이들은 북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내려와 새롭게 정착한 인물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드보라’의 시기를 주전 1100년 이후로 본다면 이들은 해양민족으로부터 쫓겨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인물들로 볼 수 있지만, ‘드보라’의 시기가 주전 1200년경이었다면 이들은 해양민족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사기 5장 6절」을 보면 ‘드보라’는 이전의 사사 ‘삼갈’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드보라’가 싸운 집단이 해양민족이 맞다면, ‘삼갈’이 싸운 집단도 해양민족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전승을 전달한 이들 또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블레셋과 해양민족을 동일한 집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갈’이 블레셋 사람을 죽였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봤을 때, 「사사기」에는 서두에 블레셋의 전신일 수 있는 해양민족과의 전쟁을 적고 있고, 마지막에는 하나의 국가를 이룬 블레셋과의 전쟁을 적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사무엘」로 이어져 왕정이 수립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사의 역할과 연대

지난 글에서 사사라는 이름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사사는 히브리어 사파트(שׁפט)에서 나온 말로 ‘재판하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그런데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의 역할은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주된 역할은 전쟁 수행, 군사 행동에 있었습니다.

예외적인 사람이 ‘드보라’인데, 「사사기 4장 4-5절」은 여예언자 ‘드보라’가 사사가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재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드보라’의 경우에도 모호함이 남아있긴 합니다. 그녀가 재판을 수행한 것이 사사였기 때문인지, 여예언자였기 때문인지 모호합니다. 만약 「사사기 4장 5절」의 재판이 사사가 되기 전에 했던 일이라면, 그녀가 사사가 된 후로 행한 것은 전쟁입니다.

사파트의 어근을 당시 주변의 언어들과 비교해서 살펴보았을 때, 재판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주로 정치적 행위, 통치 행위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또 페니키아 지방에서는 사파트의 파생어인 소페트가 최고 행정관에게 사용된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사사들은 재판을 수행하는 이들이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이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건달이었던 ‘입다’나 왠지 힘쓰는 일만 잘 할 것 같은 ‘삼손’이 사사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사는 야훼의 능력에 힘입어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전쟁은 야훼가 행하는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사사기」가 본래 ‘구원자들의 책’이었다가 편집과 수정 과정을 거쳐서 지금 우리 손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원래 「사사기」는 이스라엘 각 지방에서 외부의 침략을 막아낸 구원자들의 이야기가 모인 것인데, 이들의 활동이 야훼의 활동과 연결되면서 ‘야훼의 전쟁’, ‘거룩한 전쟁’의 개념이 포함되고,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도식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가 「사사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만, 자료에 관한 설명은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정도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사들은 각각의 지방에서 전쟁을 수행한 인물들이고, 언제 처음으로 형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들에 관한 전승들이 모여서 하나의 책을 이루게 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 기간을 순차적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어쩌면 ‘드보라’와 ‘삼손’이 동시대의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학자 중에는 「사사기」에 나타난 연대를 적당히 수정하고, 여기에 ‘사울’, ‘다윗’, ‘솔로몬’ 4년을 합쳐서 480년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성경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다른 점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수없이 나타나는 40년(웃니엘, 드보라, 기드온, 다윗, 블레셋 통치 기간)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한 성경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서 연대를 추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사사기」에 나타난 사사들의 연대를 정확하게 추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또 해양민족 또는 침략자 집단이 근동 지역을 광범위하게 파괴하고 있는 가운데 모압, 미디안, 암몬이 이스라엘 백성을 장기간 통치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집트마저도 팔레스타인 땅을 포기했는데, 그 안에 있던 족속 중 강대국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속국화 시켰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이 지파 동맹을 꾸리고 단일 국가 체계를 만들어내고 왕을 세우게 된 원인은 주변국의 국지적인 도발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사사 시대에 12지파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이 각자 지파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한 지파에서 일어난 전쟁을 나머지 지파가 신경 쓸 이유는 없습니다.

이들이 하나로 뭉치게 되고, 국지전이 아닌 전방위적인 전쟁을 수행할 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한 침략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즉 해양민족의 침략과 그들에 의한 광범위한 파괴 행위가 이스라엘 민족이 지파 동맹으로 묶을 수 있는 원동력이었고, 왕을 세우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입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의 다른기사 보기
icon관련기사 icon사사기는 이스라엘 역사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될까 icon남왕국 예언자들은 어디에 icon실로의 흥망성쇠 icon왕 곁의 예언자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다 icon이스라엘 왕정 체제 기반을 닦은 사람들 icon다윗, 사울의 종교정책을 뒤집다 icon다윗 왕에 관한 세 개의 역사 전승 icon솔로몬의 황금시대, 생각보다 초라했다 icon하나님의 뜻도 백성들의 뜻도 아닌 왕을 세운 사람들 icon누가 이스라엘의 왕을 결정했는가 icon이스라엘 왕국의 실제 모습은 무엇이었나 icon누가 야웨 신앙의 적자(嫡子) 국가인가 icon여로보암, 고대 이스라엘 전통의 계승자인가 파괴자인가 icon분단의 시작 icon이스라엘 성전과 지방 산당의 거룩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icon하나의 왕조가 야훼 하나님의 뜻인가 icon여호사밧, 역대기 역사가들이 사랑한 왕 icon‘바알’이냐 ‘똥’이냐 icon아합은 나쁜 왕이어야 한다 icon여호람, 예후 반란의 원인 icon무르익은 반란의 기운 icon권력을 가진 왕과 권력을 가지려는 제사장 icon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역 icon실재 역사와 역사가의 역사 icon역사가와 예언자의 차이 icon어떤 왕도 다윗과 솔로몬의 업적을 넘어서면 안 된다? icon이스라엘 열왕의 공백기 icon북왕국 이스라엘은 정말 멸망한 것일까? icon솔로몬, 70평의 성전을 7년 동안 지었다? icon북왕국의 역사, 남왕국 역사가에 의해 서술되다 icon므낫세는 야훼와 성전을 버렸을까 icon유다 왕 ‘히스기야’를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icon유다 왕 므낫세에게 따라 붙는 꼬리표 icon유다 왕 아몬의 죽음과 암-하아레츠의 혁명성 icon요시야 종교개혁의 심장, 율법책은 어디에 있었을까 icon난민 여 예언자 훌다, 요시야 종교개혁의 중심 icon서기관 사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다 icon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과 대제사장 힐기야 icon후기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왕들과 그 땅의 사람들 icon이스라엘 마지막 왕들의 연대기 icon우리를 힘들게 하는 열왕기의 왕들 역사 연대 icon이스라엘 역사 연대 추정을 위한 기준점 icon‘이스라엘 역사’라는 상상력 icon성경만으로 이스라엘 역사 연대 추정이 불가능한 이유 icon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었으나 감히 이집트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1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