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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완성되다칼빈주의의 전개과정과 성서 ⑵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1.10.02 16:31
▲ 칼빈을 이어 개혁교회 신학을 정립한 테오도레 베자 ⓒGetty Image

창조적인 시기가 지나면 침체의 시기가 뒤따른다는 것은 역사의 일반적인 규칙인 듯하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활동할 때, 칼빈주의는 서유럽에서 로마 가톨릭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칼빈의 사망(1564) 이후 칼빈주의는 ‘체계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의식하게 되었다.

칼빈주의자들,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다

이는 우선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의 반대에 직면하여 자기를 방어해야 했고, 또 서유럽의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에 의해 보다 많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칼빈주의 저자들이 주목한 것은 당시 파두아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발전시킨 모든 학문에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방법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었다. 이제 칼빈이 얼마간 의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동맹으로 간주되고 칼빈주의의 내적 일관성과 항구성을 보여주기 위한 요긴한 도구로 받아들여졌다.

칼빈주의자들이 채택한 이 새로운 신학방법의 4가지 특성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신학의 탐구와 옹호에서 인간의 이성의 주된 역할을 인정한다. 둘째, 기독교 신학은 알려진 공리에 근거한 삼단 논법에서 이끌어낸 논리적으로 정연하고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체계로서 제시된다. 즉, 신학은 제1원리로부터 시작하여 그 토대 위에서 교리들을 추론해나간다. 셋째,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리고 특히 방법의 본질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에 근거를 둔다. 후기 개혁교회 저자들은 성서적 신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 신학자로서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넷째, 신학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질문들, 특히 하나님의 본성, 인간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질문, 무엇보다도 예정의 교리에 관련된 질문들에 관심을 갖는다.(1)

따라서 신학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닌 일반 원리가 되었다. 칼빈과 대조하면 이 차이가 분명해진다. 칼빈에 의하면 신학은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또 그 사건에서 파생된다. 그러나 후기 칼빈주의에서는 일반적 원리들이 그리스도 사건 대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칼빈주의는 유럽의 많은 대학들은 물론 하버드 대학, 메사추세츠 대학 등에서 주도적인 학문적 운동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때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주의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강조했던 교리가 바로 예정의 교리였다. 원래 칼빈은 예정사상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는데, 그의 후계자들은 그 교리를 대단히 중요시했다. 이러한 발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사회학적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이유이다.(2)

예정론의 사회적 기능

기독교 교리의 기원, 본질과 기능에 대한 최근의 분석은 어떤 교리가 사회적 구별인자로서 기능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인다.(3) 이 연구에 의하면 어떤 종교집단이든 다른 종교집단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변 세계와 관련하여 자신을 정의하려는 명백한 요구가 있다. 이때 일반적으로 교리가 그 집단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종교개혁의 초기 단계에서 교리의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특히 마르틴 루터와 관련된다. 루터파는 명백하게 의인 교리(Justification)라는 교리적 표준으로 자신을 정의하고자 했다. 이 교리를 기초로 하여 루터파는 곧바로 루터교회가 되었고, 교황권과 주변 세계에 대하여 자기입장을 취했다.

루터교회의 교리적 공식화는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교리적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정의할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트렌트 공의회(1545-63)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세 초기의 공의회들은 이단적인 견해를 받아들였거나 혹은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을 교회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하며 단순히 정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는 의인 교리를 심의하면서 단순히 루터의 이념들을 비난하는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의 위협에 직면하여 그것에 맞서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는 자기 정체성의 표준을 제시할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 시대에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았던 교리가 사회적 경계결정의 표준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칼빈주의는 교리적인 수준에서 루터교와 많은 점에서 비슷했다. 양쪽 다 성서의 우위성, 자국어에 의한 예배와 설교의 적극적 기능을 크게 강조했다. 둘 다 교황의 권위, 한 종류의 성만찬,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직제를 거부했다. 그들 사이에는 교리적인 차이점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신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파악하기가 어려울 만큼 그렇게 미묘했다. 이때 예정 교리는 이 두 집단을 구별하는 명백한 신학적 차이를 마련해주었다.(4) 이후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비슷한 집단들과 구별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그 교리가 갖는 유용성 때문에 그것을 점차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정론의 신학적 기능

칼빈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체계’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에게 신학은 일차적으로 성서의 강해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성서의 기본 사상들을 정연한 표현으로 이끌어낸 ‘성서신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 전체의 칼빈파 목사들을 위한 신학훈련기관인 제네바 아카데미의 원장이자 칼빈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의 저술에는 방법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표출되어 있다. 자료의 논리적 정리와 제1 원리에 기초한 배열이 최고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의 영향은 베자가 예정론을 다룬 방식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베자의 세 권으로 구성된 『신학논문』(Tractationes theologicae, 1570-82)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토대로 개혁교회 신학의 주된 요소들을 합리적이며 정연하게 설명하는 작품이다. 그는 여기서 논리적 명확성을 갖고 칼빈에게서 해결되지 않았던 긴장 요소들 가운데 일부, 곧 예정과 속죄에 관한 교리를 해명해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발전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처음에 일반적으로 스콜라주의에, 그리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립된 한 운동이 그 설립자의 죽음 이후에 그렇게 쉽게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예정론이 강조되게 되었는가?

후기 르네상스 내내, 파두아 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요새로서 남아 있는 인문주의 세력을 대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우선 관심을 갖는 중세 스콜라철학자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방법의 질문들에 관심을 갖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자코모 자바렐라(1532-89)에서 절정을 이루는 파두아 학파의 저자들에게, 원칙적으로 모든 학문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을 발전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이 방법은 원칙적으로 논리학과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삼단 논법의 역할을 명백하게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중요시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만일 신학이 하나의 학문이라면, 16세기 후반에 그것은 파두아 학파가 모든 학문분과들을 위해 규정한 방법의 일반적인 규칙을 따를 수 있어야 했다. 이와 같이 잔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취임 강연에서 신학은 논리학이나 수학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그 정도로 주의 깊게 그것의 토대를 놓고 원리들을 확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560년대까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유럽의 대학들 도처에서 널리 확립되었다. 필립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의 교과과정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도입했고, 마찬가지로 칼빈의 후계자 베자는 제네바에서 그러하였다. 가능한 경쟁자들은 - 예컨대 피에르 라무스의 체계 – 배제되었다.

16세기말 칼빈주의 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분명하다. 형식적인 연역적 삼단 논법이 도처에서, 특히 잔키의 저서들에서 발견된다. 신학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들이다. 그러나 이 일반 원리들은 순전히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공표로 이해되었다. 이 발전은 우리에게 예정의 교리에 부과된 새로운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칼빈이 예수 그리스도의 특정한 역사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의 함의들을 탐구하기 위해 신학에 대한 귀납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을 채택한 곳에서, 베자는 일반 원리들로부터 시작했다. 즉 기독교 신학을 위한 그 결과들을 연역해나가는 연역적이고 종합적인 접근법을 채택하였다. 베자가 파두아의 이 방법론을 베르미글리 혹은 잔키를 통해서 배웠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 일반 원리들은 -하나님의 결의들- 예정의 교리와 관련하여 결정되었고, 이렇게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두 본성, 믿음에 의한 의인, 그리고 성례전의 본질 등의 다양한 교리들의 위치 선정과 토론에 영향을 미치는 통제하는 원리의 지위를 차지한다. 물론 베자는 하나님의 결의들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사변적 구성이 아니라 성서에서 유래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에게 성서는 그로부터 예정의 본질이 추론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 사건에 대한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결의들이 연역될 수 있는 일련의 명제들이었다.

이러한 발전의 주된 결과가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원래 이 질문은 9세기의 중대한 예정론 논쟁에서 제기되었다. 그때 베네딕토회 수사 오르베이스의 고데스칼크는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을 연상시키는 후대의 이중 예정론의 교리를 발전시켰다.(5) 그는 그리스도가 오직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은 그의 죽음의 유익에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는 것이었다. 9세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단언에 불신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그것은 후기 칼빈주의에서 다시 표면화되었다.

미주

(미주 1) A. E. McGrath, Historical Theology, 소기천·이달·임건·최춘혁 옮김, 『신학의 역사』 (서울: 지와 사랑, 2002), 265.
(미주 2) 필자는 여기서 맥그래스를 전적으로 의지한다. A. E. McGrath, A life of John Calvin, 208-218을 참고.
(미주 3) 예를 들면, A. E. McGrath, The Genesis of Doctrine (Oxford/Cambridge, Mass., 1990), 37-52.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분석이 이 책에서 제시된다.
(미주 4) 이 교리에 관하여 그들의 차이점을 요약하는 것으로는, A. E. McGrath,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2 vols, Cambridge, 1986), vol. 2, 39-50을 보라.
(미주 5) McGrath, Iustitia Dei, vol. 1, 130-1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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