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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의 연합부대는 왜 청산리로 갔는가?항일독립군의 보급처, 간도지역 캐나다장로교 지교회들
이이소 | 승인 2021.10.02 16:40
▲ 카자흐스탄 남부 크질오르다 주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 ⓒNewsis

홍범도 장군(1868~1943)의 유해가 서거 78년만인 제76주년 광복절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현장을 돌아보며 장군의 조국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탁월함과 겸허함에 탄복하며 카자흐스탄의 묘소에 가서 참배하기를 희망하였던 나로서는 유해를 맞이하는 마음이 한편으로 기쁘고 감사하며 한편으로는 고난의 현장에서 직접 인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또한 78년 동안 홍범도 장군의 묘지를 지켜온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Қызылорда, Kyzylorda) 고려인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무장독립운동사에서 일제와 싸워 크게 승리한 전투를 꼽으라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꼽을 것이다. 두 전투가 워낙에 유명하므로 두 전투에 참가한 장군이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홍범도 장군과 안무 장군 뿐이다. 최진동 장군은 봉오동전투에만 참여하였고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은 청산리전투에만 참여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6월7일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청산리로 이동하여 청산리전투(10월 21-26일)를 치루었다. 그러나 그의 연합군부대는 이내 식량문제와 탄환 부족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일시적으로 일본군의 막강한 병력에서 벗어났지만 삼면으로 포위되어 쫓긴다. 그 가운데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충분하게 또 무기탄약은 제한 없이 무료로 공급을 받을 것”(1)을 희망하며 서로군정서부대, 광복단 군대, 북로군정서와 함께 ❮통의부❯를 결성하고 러시아 이만을 거쳐서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주도권 다툼으로 막 가는 독립군들의 충돌을 중재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극동비서부의 요청으로 통합된 독립군 부대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1937년 스탈린의 명으로 극동지방 국경 부근에 거주하는 자로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결국 1943년 10월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현지에서 향년 75세에 서거하였다.

이미 여러 글에서 장군에 대하여 글을 썼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봉오동전투가 끝난 후, 홍범도 연합부대가 청산리로 간 역사적인 이유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봉오동전투가 끝나고 숨 가쁜 4개월!

1920년 6월7일,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조선독립군 무장단체들을 탄압할 구체적인 행동을 개시하였다. 화룡현 관할지역 내의 무산, 회령, 종성, 삼봉 등의 두만강 나루터들을 전부 봉쇄하고 교통을 단절시켰다. 그리고 회령에서 삼봉까지 통하는 경편열차의 승객, 화물 운송을 중지시키고 일본군대만 수송하여 6월 12일까지 도합 3천여 명의 육군을 수송하여 종성, 동관, 창수, 삼봉 등지에 주둔시키고 수시로 월강하여 조선 독립군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은 7월16일 제3차 <봉천회의> 직후부터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이라는 계획을 작성하여 8월에는 계획을 이를 확정하였다. 9월2일에는 조선독립군부대와 독립군을 지원하는 조선인마을들 특별히 간도국민회 지회, 곧 캐나다장로회 지회가 있는 마을들을 토벌하고자 일본군 각 부대에 출동을 준비하도록 통첩하였다.

일제는 장작림과 교섭하여 남만의 독립군들의 근거지를 방화하고 훼파하였으며 학살하였다.  그러나 길림당국의 서정림은 일본군의 만주 침략 의도를 간파하고 중국군대를 출동시켜 조선독립군부대를 토벌할 것을 주장하며 일본군이 만주에 출병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으로 중국군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한 중국정부는 연길주둔육군 제2혼성여단 보병 제1퇀장 맹부덕에게 무장독립군부대를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마지못해서 토벌을 수행하는 맹부덕부대는 자기들의 토벌은 ‘일제를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독립군부대에게 요녕성과 길림성 변경오지로 가서 ‘요녕에서 토벌하면 길림으로, 길림에서 토벌하면 요녕성으로 피하는 작전’으로 대응하라고 알리고 토벌을 시작하기 전에 독립군부대에게 부대의 이동경로를 미리 통보를 하여주었다.(2) 중국 정부의 토벌이 시작되자 독립군부대들은 8월 하순부터 근거지대이동을 시작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300여 명은 1920년 8월8일에 의란구를 떠나 명월구로 향하였다. 그들은 로두구에 이르러서 일본총영사관의 쯔바이가 인솔하는 수색대를 발견하고 매복하였다가 일망타진하였다.(3) 명월구에 도착한 홍범도 부대는 옹성나자(4) 국민회(5)와 명월진의 조선이주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6)

그들은 봉오동전투와 로두구전투의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었다. 그 후 부대는 어랑촌을 지나 와록구에서 한 달 동안 체류하고 두도구 일본군영사관 분관을 습격하여 작살을 내고(7) 예수촌에 가서 물품 지원을 받았다.(8) 그리고 8월 말경에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어랑촌에 와서 다시 주둔하였다.

연길현 의란구 이청배에 주둔하였던 안무의 국민회군 200여 명은 8월 말에 맹부덕부대의 토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하여 9월말에 어랑촌 부근에 도착하였다. 국민회군의 목적지였던 어랑촌 일대에는 청산리와 백운평에 캐나다장로교 교회들이 이미 세워져 있어서 국민회군은 그들을 통하여 군수품의 보급을 받을 계획이었다. 안무는 어랑촌 부근에서 홍범도 부대와 만난 후에 현재의 서성진에서 남쪽 인근에 있는 팔가자진 풍산촌으로 이동하였는데 풍산촌(9)은 ‘구세동’으로 불리기도 했던 캐나다장로회 소속 교회가 있는 마을이었다.

훈춘 한민회, 의민단, 의군부, 신민단 등 무장 단체들도 속속 어랑촌으로 집결하였다. 10월13일, 홍범도 연합부대 출범 이후 광복단도 청산리 인근에 도착하였다.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부대를 토벌하려고 했던 일본군은 자기들의 의도가 실패로 끝나자 직접 출병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10월2일에 <훈춘사건>을 조작하였으며 10월14일에 간도출병을 선언하고 10월17일 0시를 기하여 연길도윤에게 조선독립군 토벌을 위하여 군사행동 개시를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10)

일본군은 독립군부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나남에 주둔하는 19사단을 동원, 그중 아즈마지대 5,000명은 용정과 국자가 그리고 두도구 일대를, 이소바야시지대 4,000명은 훈춘과 초모정자 일대를, 기무라지대 3,000명은 왕청 서대파 및 하마탕과 배초구 일대를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그 외에도 사단직할부대, 제20사단 일부, 연해주에 간섭군으로 파견한 블라디보스토크의 제11, 13, 14사단의 일부와 관동군과 연변 영사관과 분관에 있는 군경 등을 총동원하여 25,000여 명의 무력으로 조선독립군 초토화에 혈안이 되었다.(11)

홍범도의 연합부대는 왜 청산리로 갔는가?

이런 전후 상황 속에서 독립군 부대는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으로 나뉘어서 이동하였다. 동쪽으로 이동한 최진동의 도독부, 훈춘 한민회 주력부대와 라자구의사부 부대,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잔여부대 등은 우선 일제의 토벌구역을 벗어나서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 독립군 단체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서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임희준은 『룡정 “3.13” 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225쪽에서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서쪽, 곧 청산리 쪽으로 이동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 방면으로는 화룡, 안도 접경지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하지 못할 경우 황구령을 넘어 포위권을 벗어나 장백산지구에 근거지를 창설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안도현과 화룡현 그리고 삼봉에서 회령에 이르는 두만강 대안에는 캐나다장로회 교회들의 절반 이상이 밀집되어 있었으므로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후방에서 신속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숲이 무성한 삼림지대였기 적은 숫자로 많은 군대를 상대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곳이어서 우리 조선 독립군에게 유리한 전투지였다.

홍범도 연합부대가 어랑촌으로 간 것은 그들의 후원자인 국민회의 계획이며 뜻이었다. 룡정3.13기념사업회가 펴낸 『룡정 “3.13” 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51쪽에서 국민회의 규모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1920년 6월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회는 연변의 연길, 화룡, 왕청 3개현에 7개 지방회와 133개의 기층지회를 확대하였는바 각지의 지회와 기층 지회의 간부와 경위대, 모금대 등 성원만 하더라도 천여 명이나 되었고 무장 력량도 4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국민회의 관할 하에는 명동, 정동, 창동, 광성 등 이름난 반일학교를 포함하여 수십 개소의 반일학교가 있어 청소년들에게 반일교육을 실시하면서 반인인재를 양성하였다.”

국민회는 캐나다장로회 지교회를 지지기반으로 하여 설립되었으므로 기반이 튼튼하였으며 회원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당시 독립의연금 17만원을 모금하였으며 의연금으로 국민회군 뿐만 아니라 대한독립군과 홍범도 연합부대를 지원할 수 있었다. 리광인과 김송죽은 『백포 서일 장군』 373쪽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삼도구(화룡현) 일대의 국민회와 대종교 계통의 군중들은 국민회와 군정서(북로군정서)간의 계선을 타파하고 독립군에 초신(짚신), 의복, 정보 등을 전하고 식량을 등을 거두어 부대 주둔지로 운반하였다.”

이는 크리스천들과 대종교 신도들이 물자조달과 식사 제공, 첩보활동을 통해서 독립군을 도왔다는 뜻이다. 리광인과 김송죽이 말하는 국민회는 캐나다장로회 지교회를 기초로 해서 세운 <간도국민회>를 의미한다. 당시 <간도국민회>는 간도의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였다. 실제로 백운평교회와 청산리교회, 장은평교회 교우들이 식사 제공, 물자 징발과 이동, 첩보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든 캐나다장로회 교회 교우들은 독립의연금을 의무적으로 납부하였다.

한생철은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24쪽에서 모든 사가들이 침묵하고 있는 국민회의 모체에 대하여 마지못해 국민회가 장로교파(캐나다장로회) 교우들이 세운 단체임을 인정한다.

“장로교파가 진행한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사회활동으로 중대한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교회에 몸을 의탁한 연변지구의 사회지명인사들이 <간도국민회>를 세운 그것이다. 1920년 3월 구춘선, 김약연 등은 황병길과 협상하여 그들이 세운 <교민회>와 <한민회>를 합쳐 <간도국민회>를 내왔다. 회장은 구춘선이였다. 본부는 일본 영사관을 피해 국자가에 두었고 아래에 80개 지위를 설치하여 향촌통신기구로 삼았다. 국민회의 활동, 토의. 련락 장소는 그 때 일본 령사관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없었던 <영국더기> 내의 캐나다 제창병원에 두었다.”

한생철의 간도국민회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변의 사가들이 구태의연하게 기록한 것처럼 <간도국민회>는 어느 하루아침에 한 두 사람의 의지와 합의, 영향력으로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다. 실로 10년에 걸친 긴 세월 속에서 <간민교육회>, <간민회>, <독립운동의사부>, <조선독립기성회>를 역사적으로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구춘선, 김약연 등이 1920년 3월에 황병길과 협상하여 세웠다는 부분과 본부를 국자가에 두었다는 것은 바로 잡아야 될 부분이다.

<간도국민회>는 캐나다 지교회에 기반을 두었고 실제로 청산리전투 현장에 백운평교회와 청산리 영신교회가 있었고 가까운 주변에 장은평교회, 의란골교회, 구세동교회, 장암동교회, 명동교회, 로두구교회, 두도구교회 등이 있었다. 이 교회들은 <간도국민회> 서부지방회나 남부지방회에 속하여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에 <경신참변>에 학살과 화재를 당하였다.

홍범도의 연합부대의 규모와 참여한 부대들

당시 어랑촌에 집결한 부대는 대한독립단, 국민회군, 의군단, 의민부, 신민단 등의 부대들이었다. 그들은 10월 13일 이도구 하마탕에서 대표자 연석 모임을 가지고 <연합부대>를 편성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홍범도를 지휘관으로 하여 연합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부대 병력은 대한독립군단 300여명, 국민회군 250여명, 한민회 200여명, 신민단 200여명, 의민단 100여명, 허근이 지휘하는 의군부 150여 명(연합모임 후에 참여), 광복단 200여 명(연합모임 후에 참여) 으로 대략 1400여명으로 추산된다.(12) 그러나 의군단과 광복단은 늦게 도착하였고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곳으로 떠났으므로 주력부대는 일반적으로 1,050명으로 계수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도 있다. “… 무산간도 류동 홍범도 부대 약 300명, 안무가 거느린 국민회군 약 250명, 한민회 약 200명, 의군단 약 100명, 신민단 약 1100명, 합계 1950명”(13)으로 당시 어랑촌에 모인 독립군의 숫자가 1,950명이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기록이 있다.

홍범도 장군의 지휘하의 독립군련합부대가 구성전후 또 의군부와 광복단도 련합부대에 합세하여 더욱 큰 력량을 이루었다. 그 병력정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대한독립군 약 300명(봉오동전투 참전, 홍범도)
국민회군(미주 14) 약 250명(봉오동전투 참전, 캐나다장로회, 안무)
한민회군 약 200명(이명순 단장, 캐나다장로회)
의민단군 약 100명(방우룡 단장, 천주교계)
신민단군 약 200명(봉오동전투 참전, 김규면 단장, 기독교 성리교파)
의군부군 약 150명(이범윤 단장 , 복고주의)
광복단군 약 200명(이범윤 단장, 복고주의, 위정척사)

7개 반일무장부대의 병력은 도합 1,400여 명이였다.(15)

10월13일 홍범도장군은 화룡현 이도구에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한민회와 함께 독립군부대 지휘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하여 연합부대 편성하고 일본의 습격에 군사행동을 통일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통일된 작전 지휘부를 만들고 연합작전에 대한 5개 조항을 결의를 하였다.

1) 상술한 무장단체의 군사행동을 통일한다.
2) 국민회에 등록된 자들을 총 동원하고 예정된 부서에 취임할 것.
3) 군량 및 군수품 징수에 급히 착수할 것. 
4) 정찰대를 조직하여 각 방면에 밀행시켜 일본군대의 동정을 탐지할 것. 
5) 일본군대와의 응전은 그 허를 찌르거나 또는 산간에 유인하여 필승을 기하도록 하고 그 외는 싸우지 말 것.(16)

연합부대가 결정한 위의 5가지 사항은 캐나다장로회 지교회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며 당시 그 상황에서 실행이 불가능한 내용이다. 무장단체의 군사행동을 통일하는 것은 전투의 기본이지만 어랑촌 일대에서 훈련받으며 전투를 위해 대기 중인 그들이 국민회 군적에 등록된 자들을 강제로 독립군에 입대시키거나 예정된 부서에서 취사활동, 군수품이동, 정탐 활동 등의 일을 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나라가 없는 국민에게 국방 의무나 책임은 없다.

그러나 구국 신앙과 구국 교육으로 애국애족의 피 끓는 청년들은 독립을 위해 기도하며 스스로 독립군에 자원한 자들이었으므로 포고문이나 호소문, 안내문만으로도 행동을 촉구할 수 있었다. 군량 및 군수품 징수도 예정된 부서에 취임한 자들이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캐나다장로회 지교회 교우들은 국민회가 정한 대로 독립의연금과 물품을 납부하였다. 첩보를 맡은 자들은 특별히 일본군의 동태를 살펴서 시시각각 독립군에게 정보를 전달하였다.

홍범도 연합부대는 결의한 5개 조항을 차분히 실행하며 13일부터 청산리전투가 시작되는 21일까지 8일 동안 연합훈련으로 호흡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22일에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 3,000명이 넘는 숫자와 완루구에서 조우하여 청산리전투에서 탁월한 전술과 전략으로 최고로 빛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에 봉밀구로 빠져 나가는 중에 어랑촌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고전하고 있는 북로군정서를 도와 협공으로 전투를 역전시켰다. 그 뒤로 고동하곡전투와 천보산 전투를 치루고 연합부대들은 각자 흩어져서 제 갈 길로 갔다.

홍법도의 대한독립군은 황구령을 지나 안도현 대사하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홍범도는 거기서 서로군정서의 교성대(이청천), 광복단군대(조동식)를 만나 연합하여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였다. 그 후 약 400여 명의 <대한의용군>은 사령부와 3개 중대로 편성되어 북상하는 중에 밀산현과 호림현의 경계지대인 십리와에서 북로군정서를 만나 통합을 위해 여러 번 협상 끝에 <통의부>라는 연합조직을 편성하여(17) 함께 이만으로 들어갔으나 우여곡절 끝에 1921년 3월 중순에 220명만 홍범도를 따라서 자유시에 도착하였다.(18) 동부전선으로 갔던 최진동 부대와 허진욱의 의군부는 1921년 1월 말에 자유시에 도착하였고 북로군정서 안무의 <국민회군>은 그들과 다른 루트로 2월 초순에 자유시에 도착하였다.(19) 그리하여 조선독립군들은 독립운동사상 최고의 비극인 <자유시참변>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미주

(미주 1) 반병률,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홍범도 장군』, 174.
(미주 2) 허송남,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청산리 전역』, 511, 512; 김동섭, 『화룡인민의 항일투쟁』, 18.
(미주 3) 『홍범도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63
(미주 4) 1918년에 옹성나자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윤지와 신학봉이 옹성나자에 거주하며 전도하였고 교인이 증가함에 따라 건축을 하였다. 김내범 목회가 설립공인예배를 드렸다. 홍범도 연합부대를 맞이한 이들은 옹성나자 간도국민회 지회를 만든 교인들이었다.
(미주 5) 국민회는 간도국민회 또는 대한국민회라고도 불렸으며 1919년 4월에 조선독립기성회 조직을 그대로 계숭하고 이름을 국민회로 개칭하였다. 간도국민회는 캐나다장로회 지 교회를 근간으로 해서 만들어진 최대 독립운동단체였다. 그러므로 국민회 지회가 있다는 것은 그곳에 교회와 교우들이 있다는 뜻이다. 연변에서 출판된 책들은 기독교의 역사적 기여와 참여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미주 6) 『홍범도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63.
(미주 7)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홍범도 장군』, 87.
(미주 8) 앞의 책, 87쪽, 예수촌은 명암촌으로 지금의 화룡현 서성진에 속하며 진달래민속촌이 형성되어 있다. 함경도 성진 달래동에서 명암촌으로 대거 이주한 마을 사람들은 1911년에 교회를 건축하고 장은평교회로 명명하였다. 당시 명암촌에는 간도국민회 서부지방회가 본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지회장은 한윤극이었다. 장은평교회 교우들은 처음부터 구국신앙과 구국교육에 열심하였다.
(미주 9)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461;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에 의하면 풍산촌에 있었던 구세동교회는 “토벌대에게 혹독한 환난과 형언을 할 수 없이 경과하고 가옥이 역시 피소하였다.”
(미주 10) 장세윤,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168.
(미주 11)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169, 170.
(미주 12) 김택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183.
(미주 13)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173.
(미주 14) 국민회군의 다른 칭호. 각 부대의 괄호의 설명은 원 저자의 글에는 없으나 글쓴이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삽입하였습니다.
(미주 15) 김택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183.
(미주 16)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181, 182.
(미주 17) 반병률,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홍범도 장군』, 177.
(미주 18)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홍범도 장군』, 181, 182.
(미주 19)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홍범도 장군』, 176.

 

참고서적

⦁ 리광인·김송죽, 『백포 서일 장군』, 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5.
⦁ 장세윤, 『봉오동·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 김춘선 외 2인, 『최진동 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 반병률, 『홍범도 장군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 한울아카데미, 2019.
⦁ 김삼웅, 『홍범도 평전』, (사)여천 홍범도기념사업회, 2019.
⦁ 정협화룡현문사자연구위원회 편집, 『화룡문사자료 4집』; 김석, 『청산리대첩❯,1992.
⦁ 김기봉 외 2인,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 연변인민출판사, 1987.
⦁ 호이전 외,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1997.
⦁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 2001.
⦁ 김택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 김양 편, 『항일투쟁반세기』, 료녕민족출판사, 1995.
⦁ 룡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 ❮개척❯ 편집위원회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민족출판사, 1999.
⦁ 양전백·함태영·김영훈,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 김춘선 외, 『최진동 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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