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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휴머니즘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길희성의 『영적 휴머니즘』, 그 충격과 샘물 (2)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신학과) | 승인 2021.10.04 16:45
▲ 모든 것이 과학과 합리성이라는 개념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영적’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Getty Image

1. ‘영적 휴머니즘’은 세속적 휴머니즘과 어떻게 다른가?

이번 두 번째 나의 독자반응은 이 책의 핵심 화두인 ‘영적 휴머니즘’ 이해에 집중하련다. 그런데 줄곧 따르는 염려 하나를 떨쳐버릴 수 없다. 길희성 교수가 제시하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이라는 고심 끝에 선택하였을 어휘 자체가 과연 성공적으로 일반 종교인과 대중에게 전달될 것인가의 염려 아닌 염려다. 왜냐하면 ‘휴머니즘’ 앞에 붙인 관형사 ‘영적’(spiritual)이라는 어휘의 본래적 의미를 현대인들은 잃어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근대 사회 이후는 물론이요 근대 이전부터 인류정신사를 보면 ‘존재망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Sein)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다. 온갖 종류 철학과 신학이 말해온 하느님 담론은 알고보면 만신전(萬神殿) 맨 윗자리에나 모셔놓았던 최고 ‘존재자’(seiende)에 관한 담론이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정통 기독교신학에서 영(靈, Ruach)은 인간학적 개념이 아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피조물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별칭 곧 거룩하신 하느님의 존재양태(存在樣態)를 의미했다 그런데, 그 본래적 의미는 인류정신사에서 점점 세속화 되면서, 영적(spiritual)이라는 단어 뜻은 정신(mind), 이성(reason), 심층심리(deep psychology) 같은 개념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즘은 생물학적 뇌과학 환원주의에 압도당하여 인간 영성도 인간 두뇌세포들의 고도로 복잡한 조합적 발현(組合的 發現) 결과 곧 지성과 같은 개념으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희성은 인간 영성이 깊은 의미에서의 이성이나 지성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성은 일반 상식적 의미에서의 이성이나 지성이 아니다.

길희성 교수가 비교종교학자로서, 철학자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60년간 탐구해본 결과 ‘영성’(spirituality)은 세계적 고등종교들과 인류 최고 철인들의 일원론적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오래되고 늘 참신한” 인간 본성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상 영적 존재다.”라는 가르침에 현대인들은 겸허하게 경청하여 탕자처럼 되돌아와야 한다고 길희성은 주장한다.

세속적 휴머니즘도 인간의 존엄성, 자유, 정의, 평등 같은 양도할 수 없는 권위를 주장하고, 그것의 쟁취와 역사 속에서 실현을 위해 꾸준히 투쟁해 왔다. 그 점에서 길희성은 영적 휴머니즘은 세속적 휴머니즘과 동지적 결속과 협동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영적 휴머니즘이 세속적 휴머니즘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세속적 휴머니즘은 정통적 세계종교들이 주장하는 것, 곧 인간 본성은 궁극적 실재에 뿌리박고 있으며, 신성과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다는 주장을 거절한다. 세속적 휴머니즘은 철저하게 인본주의를 주장한다. 인간 자신의 스스로 힘으로 인간 존엄성, 자유, 평등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길희성은 현대 세속적 휴머니즘은 잎이 메마르고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아서 그 능력을 잃고 세속적 자본권력, 정치권력, 과학기술, 세속문화, 생물학적 인간관등에 지배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2. 세속적 휴머니즘은 이성의 본래적 깊이와 신적 조명능력을 부정

세속적 휴머니즘이 본래는 힘이 있고 권위도 있었으나, 점점 권위와 힘과 매력을 잃어간 근본 원인은 이성에 관한 이해의 변질에 있다고 길희성은 진단한다. 신학자 폴 틸리히에 의하면 본래 ‘이성’ 개념에는 4가지 의미가 있었다. 존재론적 이성(ontological reason), 직관적 이성(intuitive reason), 비판적 이성(critical reason), 그리고 기술적 이성(technical reason) 개념이 그것이다.

‘존재론적 이성’ 개념은 이성이 ‘신적 로고스’ 빛을 조명하고 신적 실재를 근거로 하는 ‘신성과 인성’이 접촉하고 결합되는 신령한 능력이다. 그런데, 인류문명이 중세기를 지나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점차로 이성의 ‘존재론적 기능과 사물의 보편적 실재성’을 부정해왔다. 이른바 오캄이 주장한 유명론(唯名論)이 득세해 왔다. 점차로 이성은 비판적 기능과 기술적 기능으로 축소되었다. 기술문명과 사회적 비판기능은 발전되어 왔지만, 이성은 ‘인간 마음속에 있는 빛’(눅 11:35)을 잊어버렸다.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 초기엔 계몽주의라는 영어 단어가 표현하듯이 인간 마음속의 빛, 이성의 존재론적 빛을 다시 회복하여 빛나게 하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후대로 가면서 그 신령한 빛을 잃어갔다. 긴 안목을 가지고 역사를 뒤돌아보거나 오늘날 현실을 직시할 때, 실존적 이성은 모호성과 당파성에 물들기 쉽고, 무명(無明)과 이기심에 침윤당하여 타락하고 굴절한다.

저자 길희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성 신뢰자들에게 다음 같은 놀라운 말을 한다. 독자인 나는 아래 인용한 놀라운 말을 듣고 신약성경 요한1서 3장 9절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성은 타락할 수 있지만, 영성은 가리어 한동안 무시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타락하거나 마비되거나 아주 지워지는 법은 없다. 어디까지나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54쪽)

종교적 체험과 종교적 진리표현에는 비합리성(irratonality) 또는 초합리성(superrationality) 측면이 있음을 길희성은 잘 알고 있다. 비합리성과 초합리성은 반합리성(anti-rationality)과는 다른 개념이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절대은총, 하나님의 예정론적 절대주권, 섭리신앙, 그리고 대속 신앙 등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지닌 비합리성 혹은 초합리성에 근거하고 있고, 기독교의 매력이자 강점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점차로, 특히 종교개혁이후 기독교(개신교) 정통주의 신학과 신앙은 초합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이성과 신앙’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반지성주의 신앙, 소위 “묻지마 신앙”으로 치달아 갔다. ‘오직 은총만, 오직 믿음만, 오직 성서만’이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이성의 존재론적 기능을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토마스 아퀴나스로서 대표되는 신학적 명제 “계시(은총)는 이성을 파괴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명제를 부정하였다.

보수정통주의 신학 흐름과 반대 방향에서 18-19세기 이후 극단적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은 임마누엘 칸트의 이성 비판에 승복하여 기독교 진수를 도덕종교로서의 우월성에서 찾으려했다.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 흐름은 대체로 도덕적 이성종교에로 전락하여 사슴에서 뿔을 빼버린 형국의 기독교가 되었다. 길희성은 신본주의를 강조하는 타율적 정통신학과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자율적 자유주의 신학을 동시에 비판·극복하면서 신율적 신학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길희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어조로 주장한다.

영적 휴머니즘은 결국 영적 인간관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현대 지성계에 만연한 각종 ‘생물학적’ 인간관을 넘어 인간을 영적 존재(homo spiritalis)로 보는 인간관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영적 휴머니즘은 세속적 휴머니즘과 달리, 당연히 종교에 대한 관심과 논의를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다. 영적 휴머니즘은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휴머니즘이다.(17-18쪽)

위에 인용한 길희성의 신앙고백적 선언은 기존 전통종교에로 단순히 복귀하자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길희성은 한국 최고의 종교학자이면서도 종교시대는 끝나가고 영성시대가 열린다고 본다. 그러나 지혜로운 서양속담처럼 “아이를 목욕시킨 더러워진 물은 버리지만, 아이를 함께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를 위시하여 힌두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천도교, 원불교 등등 세계종교들은 인간이 영적 존재라고 가르치는 점에 있어서 “역사적, 경험적, 사실적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귀중한 종교적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가려는 “종교다원주의적 신학과 영성”(18쪽)을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만이 아니라, 플라톤, 플로티누스, 노자, 맹자 등 걸출한 인류 정신사의 거성들의 가르침과 현대 과학철학자들의 소리에 마음 문을 열고 경청하려는 것이다. 인류 최고 지성과 감성과 덕성과 영성이 함께 숨 쉴 수 있는 새로운 보편주의적 영적 휴머니즘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에큐메니안

3. 영적 휴머니즘의 파격적 두 가지 주장: 보편적 성육신(universal incarnation)론과 인간학적 성령관

이번 글에서는 길희성 교수의 이번 역저에서 가장 큰 논쟁 주제가 될 ‘새로운 신관’에 대하여 아직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새로운 신론’ 주제는 워낙 중요하고도 이 책의 핵심이기 때문에 별도로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러나 ‘영적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를 서론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길희성 교수가 강조하는 ‘보편적 성육신’ 이론과 성령 이해에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의 틀을 깨고 과감하게 ‘인간학적 성령론’을 주장하는 저자의 의도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통신학에서 성육신론은 주로 요한복음 1장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본성에 관한 기독론의 태두리 안에서 논의되어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말씀의 육화’ 결과라는 이론이다. 이러한 정통적인 ‘로고스 화육 기독론’은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유일무이한 ‘계시사건’이며, 다른 장소나, 다른 사람 안에서 ‘로고스 육화’는 인정되지 않아 왔다. 그러나, 길희성은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은 유일회적으로 베들레헴 말구유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 홀로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을 모든 피조물에게 나누어주는 “보편적 육화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459쪽). 보편적 육화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이나 이후에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 안에도 육화하신다. 그리하여 만물 안에는 합리적 질서와 아름다움이 생기고, 신의 영광이 드러나며, 신의 지속적 창조(creatio continua)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길희성의 ‘보편적 성육신’ 사상은, 특별 계시론에 메여있는 전통적 기독론이나, 특별계시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의 타종교에 대한 우월성 주장을 무효화 시킨다. 로고스의 보편적 화육은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 출현 이전과 이후의 무수한 지구상의 위대한 거성들 플라톤, 고타마 붓다, 공자와 맹자, 왕양명, 노자와 장자, 그리고 한국의 최치원, 원효, 의상, 지눌, 퇴계, 율곡, 수운, 해월 안에도 진리의 말씀에서, 진리의 빛으로서 육화하였다는 ‘종교다원론’이론이 가능하게 되었다. 역사, 언어,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 인류성현들이나 현자들의 인간본성에 관한 표현은 달랐다. 하나님의 형상(모상), 아트만, 불성, 본연지성, 양지, 시천주 등등 우리들이 한번쯤 들어본 명칭들이다.

길희성의 영적 휴머니즘에 의하면,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명칭들은 모두 인간 본성 안에 자기를 분여(分與) 해주신 하나님의 로고스의 빛들이며, 성령이 모든 인간들 본성 안에 주어지고 있다는 징표로 본다. 길희성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의 성령론도 이와 같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영적 휴머니즘의 인간관은 성령은 하나님이 특정인에게만 베푸는 차별적이고 특별한 은총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영적 본성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성령을 갈구하는 마음이나 성령에 따라 살고자하는 마음의 성향(inclination)으로서, 모든 사람의 영적 본성에 차별 없이 주어진 하느님의 선행적(prevenient) 은사, 즉 보편적 은총이고 자연적 은총(natural grace)이라는 것이다. 인간학적 성령관이다.(752쪽)

위에 인용한 길희성의 성령론적 인간관은 그의 영적 휴머니즘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성령을 기독교 교회당 안에서, 성령집회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종’의 능력으로 인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받는 ‘특별 선물’이라는 기존의 성령론에 비하여 가히 파격적이고 도전적이 아닐 수 없다. 길희성은 성령을 독점지배 관리한다고 확신하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교만과 성령은 기도원 특별집회에 가서 받는 ‘특별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충격적이고 도전적이다. 한국 기독교는 거기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영적 휴머니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위에서 언급한 세계 고등종교들의 보편적 인간영성의 선험성, 선행적 은총은 마치 씨앗과 같아서 싹이 트고 자라서 그 영성이 구체적으로 발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수행(修行)과 실천적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 맘속에 불성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붓다가 아니고, 하나님 형상을 지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다. 값싼 싸구려 은총신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길희성의 영적 휴머니즘은 숙연하리 만큼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는 점이 독자인 내게 참신한 샘물 같은 충격이었다. “영적 휴머니즘이 요구하는 ‘참 나’는 가혹할 만큼 자기완성을 요구한다. …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높은 성인(聖人)의 경지를 아무렇지 않은 듯 우리 모두에게 요구한다”(23-24쪽). 이것은 길희성의 도덕적-영적 래디칼리즘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예수의 가르침으로서 전해오는 놀라운 말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5:48)는 말씀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인 나를 숙연케 하고 그동안 너무나 세속에 물들어 타협하면서 살아온 나의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길희성의 영적 휴머니즘의 진가는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음 글에서 이 책의 핵심 쟁점이 담겨있는 저자의 새로운 신관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신학과)  soombat19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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