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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 대하여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㉞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1.10.04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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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창세기는 오랫동안 잘못 해석되거나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그 첫 번째 오해는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 보다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 남자를 만드실 때는 흙으로 빚는 등 정성을 들여 만드셨는데, 여자를 만들 때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 그것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며,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두 번째 오해는 노동과 해산의 고통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면서 자식을 낳을 것이다.”(창 3,16). 그리고 남자에게는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창 3,17)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노동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인간의 책임적인 과제입니다. 앞서 있었던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2)는 복은, 해산의 고통과 땀흘리는 노동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이미 들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해산과 노동의 고통을 타락의 대가나 원죄의 결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노동은 오랫동안 인간의 원죄의 결과, 곧 타락의 결과로서 인간의 삶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노동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지요. 그래서 노동의 분업과 함께 가능한 힘들지 않은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힘들게 땀 흘리면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정당화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블루칼러와 화이트칼러 등이 분리되었고, 심지어 계급화 되어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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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노동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의 저자,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유발 하라리’는 “인공지능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기술”이라며,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권위의 원천이 인간에서 기계로 옮겨가면서 인류가 운명의 조종간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또 “앞으로 30년, 40년 후엔 인공지능이 다는 아니어도 거의 모든 직업에서 인간을 몰아낼 것이고, 기술을 지배하는 극소수 엘리트가 세상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게 점점 더 쉬워질 것”이라고 이미 2016년에 예상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를 어떤 영역에서 어떻게 근본적인 변화를 강요할 것인지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사건이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인공지능만이 아닙니다. 로봇과 결합한 인공지능은 앞으로 로봇이 대체할 수 있는 모든 일자리에서 인간을 축출할 것입니다. 지금의 직업 가운데 거의 절반이 사라질 전망입니다.

기계가 일을 대체하는 상황에서 노동의 미래, 노동의 의미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노동이 직업과 동일시되고, 직업이 경제력과 직결되고, 돈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어가는 상황에서는 실업, 퇴직, 가난은 삶을 파괴하는 악순환 고리입니다.

▲ 외주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망은 해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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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은 노동을 달리 이해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흔히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후, 곧 실낙원 이후의 피할 수 없는 숙명, 죄의 결과라고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를 근거로 오해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사실 두 가지 상이한 낙원 밖의 생활양식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과 19절의 상반부는 중동지역 토경민(농부)의 생활과 경작지에서 소출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겪어야 하는 끝없는 노고를 안중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 18절, 19절 하반부는 초원 지대에 사는 베두인의 생활을 안중에 두고 있는데, 그들의 삶의 특징은 경작의 수고보다 생계의 빈궁과 쪼들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노동 자체를 형벌이나 저주로 평가하는 데 관심이 있지 않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두 가지 생활양식의 곤궁에 대한 원인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해석됩니다. 즉 창세기 저자는 ‘노동이 왜 삶을 그다지도 고달프게 만들고, 노동이 헛수고로 끝나고 좌절될 위험 속에 있는지, 왜 노동이 기울인 노력에 비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소득을 가져 오는지라는 창조의 본래적 질서로부터는 설명될 수 없는 인간과 땅 사이의 불가해한 관련성’, 즉 소외된 노동의 관련성을 단순히 하나의 사실로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당시 고대 근동에 유포된 노동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즉 한편으로는 노동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비관적인 숙명으로 이해하는 태도와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을 이상화시키려는 태도에 대하여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노동을 통하여 생존해야 하며, 노동은 인간의 삶에 속한다는 사실’을 어떤 과장도 없이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경제적 활동의 기초인 노동은 타락 이전의 창조 질서의 본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창조의 질서 안에서 노동하도록 부름 받았고, 노동은 야훼 하나님의 창조를 책임적으로 보호하고 가꾸는 데 그 목적을 가집니다(창 2,15; 2,5). 하나님은 창조 질서의 유지와 돌봄을 위해 파트너를 만드셨고(창 2,21-25), 이로써 창조의 돌봄은 ‘일부의 사람들’만의 과제가 아닌 ‘모든 사람’, 곧 인류 전체의 과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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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는 노동을 표현하는 두 개의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보다’(aboda)로서 ‘봉사’에서 유래했고, 다른 하나 ‘멜라카’(melaka)는 ‘보내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해하는 노동이 야훼 하나님에 대한 봉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성경의 노동은 신적 위임의 성취로서 파악된다는 점에서 노동을 ‘자연의 질서’, ‘숙명’, ‘고통’으로 이해하는 그리스 세계의 노동관과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봉사로서 이해되는 노동은 강요된 필연적인 자연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의 표현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동역자로서 인간이 참여하는 것인데, 이 참여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위임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 없습니다. 노동은 개인의 과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과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교회는 노동하는 개인을 돌보는 것만이 아니라,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도 나누어야 합니다. 최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이 갑자기 늘어나고 있습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우리를 분노하게 합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자존감을 상실하는 젊은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원하는 일자리에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노동을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과제입니다. 노동이 단순히 생계 수단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길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키고 가꾸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이 되게 하는 것이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과 함께 가야할 길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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