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땅이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할 때하나님의 발판(레 18,24-30; 마 6,9-13)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10.07 16:20
ⓒPeter Dennis / Getty Images

우리 사회는 ‘대장동 사건’으로 또 한 번 깊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달려온 지난 60여년 세월의 실제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어떻게 처리가 될지는 법적인 것이니까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것과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땅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물음도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겠고 그에 대한 답도 그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땅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땅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지가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창조활동 결과이고, 하나님은 뭇생명들과 함께 이를 다스리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셨고(창 1,26!), 사람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복을 주시며 땅을 ‘정복하라’고 하십니다. 정복하라’는 말은 숱한 오해를 낳고 오용되어 왔지만, 그것은 ‘축복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사람이 살지 못하는 자연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꿈으로 사람 사는 지역을 확대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 단순하고 당연한 과정이 축복 실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정복과 탈취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사람과 생명을 먹여 살리는 땅이 생산수단으로서 소유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러한 역사를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그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위의 레위기 본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착과정을 정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부분이 있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 본문에는 어느 민족이든 그들이 거주하는 땅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각 민족은 자신들의 삶의 형식으로 그 땅을 더럽히지 않을 때에만 그 땅에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이 심판의 주체가 되어 그 민족을 그 땅에서 토해냅니다. 이러한 땅 이해도 땅과 거주 민족의 관계도 모두 매우 낯설지요. 하지만 예컨대 화학물질이나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것은 오늘날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땅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들에 의해 더러워진 땅이 그 주민들을 몰아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땅의 독자적 행위일까요? 땅과 하나님의 관계는 창조 때 이미 드러났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명들을 산출했습니다. 양자의 관계는 명령자와 수행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진 땅이 그들을 거부한다면,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본문은 더럽혀진 땅을 하나님이 벌하셨고(창 3장 비교), 땅은 그들을 토해냈다고 묘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너희가 원주민의 성적 풍속을 따라 너희 자신을 더럽히면, 그 땅은 너희도 토해낼 것이라고 경고하는 이유입니다.

이로부터 땅은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점유하고 이를 위해 땅을 더럽히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땅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땅에 들어가 사는 이주민 또는 나그네와 같습니다(레 25,23). 그러니 사람이 땅 소유주인양 행세하고 땅을 사고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소유를 늘리기 위해 정복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배제된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땅 이해는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꿈같은 생각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사적 소유가 기본으로 전제된 사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서의 그 생각은 폐기되어도 좋은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정착 후 토지를 부족의 인구수에 따라 그리고 제비를 뽑아 분배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원칙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땅에 몸 붙여 사는 사람들이 그 땅은 필요한 만큼만 점유하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 이랬다고 끝까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이 유지된다면, 그 사회는 비교적 덜 불평등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토지 소유가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불평등한 토지 세습이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땅 이해는 우리에게 더욱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것의 현실적인 형태는 토지공유제와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토지제도에서라면, 하나님의 발판이신 땅을 더럽게 하는 대장동 사건이나 LH 사건 같은 사건들은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평등한 사회로의 이행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성서는 우리를 그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러한 땅 이해와 맞닿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바로 만나사건입니다(출 16장). 필요한 만큼 주시고 필요한 만큼 쓰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하나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입니다. 어떤 현실이 그 뒤에 있는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불평등한 분배 때문에 오늘 필요한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 기도는 만나 사건을 기억하는 기도입니다. 더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 기도를 불편해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가장 중요 내용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모습은 어떤 것이고 그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포도원 품꾼들과 주인의 관계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0장). 하루 일한 것으로 하루를 살 수 있어야 하지만,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하루를 일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그가 일한 것으로 하루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인의 뜻이고 그 뜻이 실현된 나라가 주님의 나라입니다. 조건과 상관없이 평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 나라와 그 뜻이 실현되기를 기도하라고 주님은 가르치십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시겠습니까? 그 지향과 의지 없이 그 기도를 입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에만 그 기도가 있다면, 주님 안에 있을 수 없고 주님 나라에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사회의 불의한 모습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성서에 묻는다면 성서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성서의 답변이 우리 생각과 실천의 기초가 되기를 빕니다. 그러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그럼으로써 주님과 주님 나라 안에 있게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상기 목사(백합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1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