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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간관과 신관의 출현을 기대한다길희성의 『영적 휴머니즘』, 그 충격과 샘물(3)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신학과) | 승인 2021.10.18 16:15
▲ 새로운 인간관의 출현은 새로운 신관의 출발로 이어진다. ⓒGetty Image

새로운 신관을 모색하고 제시하려는 동기와 목적

이번 나의 ‘독자반응(3)에서는 길희성 교수의 과감하고도 독창적인 새로운 신관에 집중하려고 한다. 줄여 말하면, 저자가 이 책에서 새롭게 제시하려는 신관은 전통적 기독교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초자연주의적’(supernaturalistic) 신앙과 신학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신관이다. 동시에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신앙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한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 ‘자연주의’(naturalism)를 또한 비판적으로 극복하려 한다. 그 두 대립적 실재관과 세계관을 동시에 비판적으로 극복 지양하여 제3의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 제3의 길을 “자연주의적 초자연주의”(natural supernaturalism)라고 저자는 이름 붙이는데 그 표현은 꼭 적절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저자는 전통 기독교 특히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의 신학과 신앙의 주류가 ‘신앙과 이성의 바른 관계’ 정립에 실패하거나 포기하고 심지어 이성은 신앙을 방해한다고 보는 반지성적 맹목적 신앙형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극히 옳은 주장이라고 저자의 생각에 나는 동감한다.

저자 길희성 교수가 시도하려는 새로운 신관의 모색과 주장은 사실 엄청난 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쟁점이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어떤 점이 그러한가 이글 ‘독자반응(3)’ 에서는 그 쟁점들을  제시하고 생산적인 해결을 한국 기독교계에 기대하고 싶다.

인류의 ‘오래된 그러나 늘 새로운’ 일원론적 형이상학적 종교에 기초한 신관

어거스틴, 아퀴나스, 요한 칼빈 등 걸출한 기독교 신학자들이 갈파했듯이 ‘인간관’과 ‘신관’은 상호 해석학적 순환관계를 갖는다. 저자의 이번 역저 책명이 『영적 휴머니즘』이므로 새로운 영적 인간관을 피력하지만, 그 시도는 불가분리적으로 영적 신관을 먼저 정립하지 않고서는 논의를 전개해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저자의 역저에서는 어느 면에서 보면  새로운 신관 모색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점은, 저자 길희성 교수가 이번의 역저에서 새로운 신관을 모색하고 정립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특정종교에 국한되거나 특정종교 경전과 사상전통에 제한받지 않는다. 신관을 ‘성경’과 ‘기독교 사상사’와 ‘교회공의회’ 자료에서만 논하고 그런 신관만 기독교적 신관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신학자들과는 처음부터 충돌할 것이다.

저자의 새로운 신관모색은 (i) 동서 인류 철학사에 등장한 위대한 철인들의 형이상학적 지성, (ii) 세계 종교전통들의 경전이 말하는 실재관과 신론, (iii) 현대 물리학이나 생물학이 발견하고 증언하는 우주 대자연과 인간 생명현상에 대한 진실, (iv) 과정철학과 페미니즘 여성신학자들의 모성적 원리 등이다.

크게 보면 위에서 말한 4가지 전통에서 핵심 진리를 재발굴하여 창조적으로 종합하는 ‘일원론적 형이상학의 철학적 신관’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특히 신플라톤 철학자 플로티누스, 중세 기독교 신비가 마이스터 엑하르트, 스콜라신학의 집대성자 토마스 아퀴나스, 인도와 중국의 사상가들, 현대양자물리학과 진화론적 생물학, 에코페미니즘, 그리고 현대사상가로서 폴 틸리히와 캔트웰 스미스와 화이트헤드는 저자의 새로운 신관 형성에 중요한 길벗들이 된다. 인터넷 신문이지만 공간지면의 제약 상 길희성의 새로운 신관 중 뜨거운 쟁점이 될 3가지 점만 아래에서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쟁점:  창조주에 의한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 vs. 신으로부터 창조(creatio ex deo)즉 신으로부터 출생, 유출, 출현

첫째 쟁점은 전통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에서는 사도신경 첫 구절에서 고백하는 바처럼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이다. 창조주 신앙고백은 전통적 기독교신앙의 핵심 중 하나이다.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 고백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존재이거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실재이거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피조성, 우유성(偶有性), 유한성, 의존성, 존재한다는 현실의 선함과 은총과 감사를 강조하고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데 있다.  그런데 길희성의 새로운 신관은 신플라톤 철학자 플로티누스나 중세신학자 에리우게나(Eriugena,810-877)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전통을 이어받아 창조세계가 신에 의한 창조결과 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유출 혹은 출생이라고 본다. 직접 저자의 말을 아래에 인용해본다.

여하튼 우주만물을 신의 가시적 현시 내지 현현으로 간주하는 유출설에서는 창조는 신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deo)가 되며, 세계는 신이 ‘만드는’ 제작행위이기보다는 세계를 자식처럼 낳는 ‘출산’(出産,birthing)의 산물 같다. 세계만물은 신에서 출현하는 신의 자기현시(顯示)이자 자기 전개(展開,unfolding)의 산물이다. … 유출설에서는 창조란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신이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만물에 나누어주는 자기부정과 자기비움, 그리고 자기초월의 ‘사랑’이며,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는 자기현시이자 자기계시이다.(338-339쪽)

위에 인용한 길희성의 새로운 신관이 주장하는 “출산모델의 창조론”(340쪽)은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일원론적 유출설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사상흐름이 총괄적으로 융합되어 있다. 만물은 그 근원에서 나와서 근원으로 돌아간다는(롬 11:31)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출원(出源)과 환원(還源)의 역동적 존재론, 신의 자기제한과 자기비움 행위를 통한 창조를 강조한 유대교 카발라 신비신학, 그리고 신을 존재자체라고 말한 틸리히 신관과 현대 에코페미니즘의 사상 등 서구 철학사나 그리스도교 전통 유산만이 아니라 힌두교, 불교, 신유학의 실재관도 녹아들어 있다.

길희성이 제시하는 ‘출산모델의 창조론’은 조잡하고 단순환 범신론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어머니와 자식이 구별되듯이, 영원한 신과 유한한 세계 존재자들 사이엔 “존재론적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존재론적 위상 또는 존재론적 위계적 차이가 있다”(340쪽)고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과 세계와의 ‘존재론적 질적 차이’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상 혹은 위계의 차이’만 인정하는 새로운 신관의 특징을 본다.

왜 길희성의 새로운 신관에서는 전통적인 ‘무로부터의 창조론’을 받아드리지 않고 ‘신으로부터 창조를 주장하는 ‘출산모델의 창조론’을 주장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현대인들의 실재관 자체가 대우주 자연이나 생물세계가 ‘과정적 실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되어감, 생성, 형성으로서 세계현실을 경험한다. 둘째, 그동안 서구 기독교가 강조해 왔던 신, 세계, 인간존재 상호관계성 이해에서 지나친 ‘질적 차이’를 강조한 결과 도리어 신의 전능과 영광을 곡해하게 만들고, 인간존재성을 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오를 범해왔다. 초자연주의 신관은 가부장적, 군주론적, 남성적 이미지를 지니며 양욱하고 돌보고 설득하고 자기희생 하는 모성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과 인간존재의 질적 차이 강조는 자연수탈과 환경파괴를 초래하였다. 셋째, 전통 기독교신학에서는 창조와 구원을 별개의 일로 구별하였고, 창조 후 타락된 세계를 구원 속량한다는 구도를 갖는다. 이에 비하여 길희성의 ‘출산 모델의 창조론’은 창조와 구원은 동전의 앞뒤관계라고 강조하며, 날마다 자연과 인생의 삶이 신의 ‘계속적 창조 행위’임을 강조하기에 유리한 사고구조를 갖는다.

이상 3가지 언급한 측면은 길희성의 새로운 신관 곧 ‘출산모델의 창조론’이 갖는 장점들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 신앙고백과 신학전통에서 보면 문제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출산모델의 창조론’이라는 어휘자체가 모순 충돌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출산’은 ‘창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출산’(出山)이라는 메타포는 아이를 엄마가 그 몸의 일부로서 낳는 것을 비유로 삼지만, 사실인즉 ‘출산’ 개념은 ‘유출’(流出)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존재 그 자체’(esse ipsum, being-itself)의 능력이 차고 흘러넘치는 이미지다. 그것은 창조주의 자유로운 은총의 선택과 의지의 결단이라기보다는 자연히 그렇지 않을 수 없는 본성이거나 필연적 사건이다.

길희성은 유출설에 뿌리를 둔 ‘출산모델의 창조론’도 기존의 정통기독교 신앙이 강조해온 것 처럼, 세계의 존재가능성은 “신의 자기부정과 비움, 자기초월의 사랑, 자기현시, 자기계시”(339쪽)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비인격적인 철학적 유출설과 힌두교와 불교와 유교 등이 갖고있는 철학적 형이상학을 저자가 지닌 기독교 신앙과 ‘해석학적 지평융합’을 시도한 셈이다. 달리 말하면 일원론적이고 유출론적 철학적 형이상학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토착화(?)시킨 해석이다. 저자는 형이상학적 신관과 인격신관을 통전시키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 김경재 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에큐메니안

둘째 쟁점: 신의 양극성(the bipolar nature of God)을 강조하는 유일신론 VS. 삼위일체론적 유일신관( the trinitarian nature of God)

저자의 역저 『영적 휴머니즘』을 떠받치고 있는 새로운 신관에서 두 번째로 제기되는 뜨거운 쟁점은 신의 본성에 관한 이해에서 올 것이다. 길희성의 새로운 신관 제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창세기 제1장 1-2절에 나타난 태초 창조설화에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실재”(창1:2b)를 과감하게 “신의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381쪽)이라고 해석하고 영원한 로고스와 더불어 양극성 혹은 양면성을 가진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길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신의 본성이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는 양극성 내지 양면성(bipolar nature of God)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양극적 본성은 결코 이원론이 아니다. 데카르트적인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은 더욱 아니다. 성리학의 이(理)와 기(氣)의 관계처럼 둘은 혼동할 수 없고 확연히 구별해야 하기에 불상잡(不相雜)이지만, 동시에 분리할 수 없는 불상리(不相離)의 관계다. 둘은 상보적 관계에 있다. 우주만물은 바로 신의 본성이 지닌 이 양극의 교호작용(interplay)의 산물이고 만물의 무수한 차이는 이 교호작용의 산물이다.(382쪽)

위에서 보듯이 저자는 전통적 신학이 삼위일체론적 구도 속에서 신의 본성을 담론화 해온 것과는 달리 신의 본성을  양극성 혹은 양면성이라고 보고, 그 하나는 로고스(Logos)이고 다른 하나의 본성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primordial material creative power)l 이라고 본다. 후자 곧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는 개념을 오해없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원초적, 물질적, 창조력이라는 세 가지 성격규정에 주목해야한다. 그 개념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 물질과 정신을 창조하는 근원적 능력이면서 원초적 질료이다. 저자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태초의 원기(元氣) 개념에 가깝고, 결론적으로 보면 세계만물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며 생명을 부여하고 양육하고 창조하는 ‘생명의 영’ 곧 성령이라고 본다.

전통적 기독교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 담론에서 성부-성자-성령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의 ‘신적 존재양식’(神的 存在樣式)이라고 강조해 왔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성부 하나님은 태양 그 자체요, 성자 하나님은 태양의 빛이요, 성령 하나님은 태양열이다. 태양빛은 밝은 광명으로서 태양이 저기 있음을 알리고 만물을 보고 이해하게 한다. 태양열을 만물을 양육 육성한다. 그런데, 전통적 신학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할 때, 창세기 1장 2절에 언급되는 정체불명의 ‘깊고 어둡고 혼돈적 실재’ 해석에 여러 가지 성서주석적, 교의학적 해석이 있었다. 저자 길희성은 과감하게 그 실재를 피조물이거나 창조 이전의 질료라고 해석하지 않고 신의 본성 중에서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고 해석하는 점이 새로운 해석이다.

기독교 교의학(Dogmatics) 울타리에 갇혀 있는 삼위일체론을 인류종교사와 철학사 속에서 조명하면서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 사유지평을 보다 깊고 넓게 열고 가는 저자의 시도에 공감한다. 예를 들면 성령을 동아시아에 말하는 원기(元氣)와 대응하는 사례에서 그렇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을 많이 언급하지만 신의 본성을 양극성적으로 파악하고 특히 다른 한 면을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지론은 신학계에서 격렬한 쟁점이 될 것이다.

셋째 쟁점: 정향진화(定向進化), 신의 섭리, 그리고 신앙주의(fideism) 문제

저자의 새로운 신관에서 세 번째로 토론할 주제는 신의 섭리에 관한 입장이다. 저자는 이 세 번째의 난해하고 신비한 주제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며, 바른 기독교적 신앙태도를 견지한다. 일반학계 특히 생물학이나 자연과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입장 곧 물질계와 생명계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변화, 우발적(chance)으로 발생하는 돌연변이(mutation) 등을 포함한 모든 변화들은, 아무 목적이나 진화방향이나 의미 없이 “우연과 인과율적 필연법칙”(쟈크 모노)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의 본성인 로고스의 인도아래 전개되며, 진화의 과정을 일정한 목적과 의미있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한다”(526쪽)

저자는 진화과정 전체를 섭리하시는 신의 일반섭리가, 개인 개인의 구체적 인생여정을 섭리한다는 기독교 특별섭리와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에 매우 신중한 입장이다. 저자는 “특별섭리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526쪽) 그러나, 특별한 개인인생 섭리는 ‘신앙주의’(fidiem)입장이다. 신앙주의란 개인 삶의 특별한 섭리신앙이나 신유 은사체험 등 기적체험은 실존적 개인의 신앙고백에 멈추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특별섭리 신앙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구체적 사항은 우리의 지식과 이해의 범위를 초월하는 신비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527쪽)는 신앙주의와 기적적 신유체험을 직접 생생하게 간증하거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적극적으로 고백하면서 목숨 걸고 전도하는 바울의 입장사이에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점은 이 책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뜨거운 쟁점이 될 것이다.

훌륭한 좋은 명저를 한국 사회와 기독교계에 주신 저자에게 존경과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신학과)  soombat19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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