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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우리 안의 것들목표에 이를 때까지(민 20,6-12; 고전 9,23-2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10.21 15:55
▲ 모세가 바위를 향해 명령하고 있다. ⓒGetty Image

모세의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음미해볼만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탐 사건 이후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출애굽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모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은 연기되었습니다.

출애굽 세대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은 그 기간 중에도 그 이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을 늘어놓고 하나님과 대립하는 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절정은 여기 이 사건 바로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와 아론에게 주님의 백성 위에 군림한다며 250명의 회중 대표들과 함께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들은 사제직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 약속이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반발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모세와 아론과 광야세대 사이의 불화가 말끔히 해결되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다루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을 때 일어났고 가데스 므리바 사건으로도 불립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생활 처음에도 물이 없어 모세에게 원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출 17장).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생활 끝무렵에 동일한 사건이 반복되니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 경우 역사의 반복은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처음 사건이 이스라엘에게 남긴 교훈이나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건은 몰라서 그랬을 수 있다고 해도 두 번째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동일 사건의 반복은 오직 그들의 완고함과 불신만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이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사건을 암시하며 그때 죽은 사람들과 함께 죽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 너희 때문에 우리와 우리 가축이 모두 여기서 죽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따집니다. 지난 사건 때도 자신의 일을 부정당한 모세는 몹시 화를 냈었습니다. 과연 지금은 어떨까요?

모세와 아론은 회중을 떠나 회막문 앞으로 가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팡이를 잡고 바위에게 명령해서 물이 나오게 하라! 처음 사건에서는 바위를 치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그와 달리 바위에 명령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생명 없는 바위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창조 때에도 땅에게 생물을 내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는 자연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보여주려고 하신 것일까요?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팡이를 잡고 이스라엘을 바위 앞에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반역자들은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해 이 바위에서 물을 내야 하냐?

반역자들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대로 모세에게 그들은 고라와 뜻을 같이 하는 자들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미완료형은 여러 가지 뉘앙스를 나타낼 수 있어서 ‘… 내다’는 말은 다르게 번역되기도 하지만 위와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문문은 수사학적 의문문으로 읽히기에 모세의 분노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모세가 서있는 방향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을 때 서있을 방향은 같지 않습니다. 회중에게 말하는 지금 그는 회중을 바라보고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위에게 명령했다면 그는 회중을 등지고 바위를 향해 서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들었고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하는 사람으로 섰지만, 그는 분노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고라 사건 때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저들의 봉헌물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들을 위해 물이 나오게 할 수 없다는 투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좀 이상하지 않은지요? 하나님께서 바위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게 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물이 나오게 할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금 마치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상시 그의 모습이 아닙니다. 분노 때문에 그는 스스로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회중들의 태도에 분노하는 것은 이해 못할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조차 그르치는 데까지 이르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분노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분노가 아닙니다.

모세는 바위를 향해 돌아섰지만, 바위에 명령하는 대신 지팡이를 바위를 두 번 칩니다. 이것은 물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 분노의 표시에 가까울 것입니다. 모세의 이 같은 태도는 하나님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상황이 이런데도 하나님은 물을 내야 할까요?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솟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지 않았다고 그를 책망하시고 그에게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기회를 박탈하십니다. 분노 탓에 모세는 일생의 꿈을 접어야 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모세를 어떻게 볼지 우리는 바울의 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달리기 경주에 비교합니다. 자신은 달리되 목표 없는 것처럼 하지 않고 싸우되 허공을 때리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자신을 쳐서 달리기가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복종시킵니다. 이에 비춰 모세를 보면, 그에게 목표는 분명했고 이를 위해 그는 힘써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목표지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 경주가 요구하는 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거룩함을 백성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달리기가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순간 그는 분노하는 대신 자신을 쳐서 그 요구에 복종시켜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그는 광야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했지만, 자신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 자신은 실격당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몇 번이나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야속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뜻은 이처럼 단호했고 그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실격은 절제하지 못한 그의 분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달리기에서 실격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분노입니까? 절제를 간구하십시오. 두려움입니까?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신뢰를 배우십시오. 욕심입니까? 사랑의 폭을 넓히십시오. 어리석음입니까? 말씀에서 지혜를 배우십시오. 불의가 세력을 떨치고 자연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진리를 기뻐하고 자연과 연대하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마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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