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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무기악을 무력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에베소서 6:10~1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1.10.27 17:02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친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또한 일부 사본에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어서 에베소서라는 명칭이 붙기는 했지만, 일부 사본에는 수신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특정 공동체에게 주어진 서신이라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독자를 유념한 회람서신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서신은 사도들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본격적인 교회의 시대로 접어들 즈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관한 권면을 포함하고 있고, 교회의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끼친 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에베소서의 마지막 권면으로서, 그 메시지가 매우 선명합니다. 묵시문학적 대결구도에 우화적(알레고리) 수사로 되어 있는 까닭에 한 마디 한 마디 그 표현을 음미해봐야 하기는 하지만, 메시지의 초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한 마디로 악마와의 싸움을 위하여 성령의 무기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대결해야 할 대상이 무엇이고, 이와 대결할 때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언뜻 보기에 새로운 시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밝히고 구체적 생활윤리를 가르친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처한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태도를 비장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본문말씀의 첫 대목(10~11)은 그 메시지의 초점을 집약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악마의 간계를 물리치도록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싸워야 할 상대로서 악마의 실체에 대한 언급(12)과 더불어 그에 맞서는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상세하게 부연하고 있습니다(13~17).

먼저 악마의 실체를 언급하는 대목을 볼까요?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12)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신화적 표상들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먼저 여기서 언급하는 인간은 그야말로 평범한 인간을 말합니다. 청중, 우리 자신 역시 그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 듭니다. 혈과 육을 지닌 인간, 명확하게 한계를 지닌 인간입니다. 어떤 악이 구체적인 한 인간에게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넘어서지 못할 대상은 아닙니다. 이미 한계를 지닌 인간 안에 있을 뿐입니다. 한 개인으로서 인간에게 깃든 악은 그 인간이 뉘우침으로 해결될 수도 있고, 아예 사라짐으로써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이 아니라, 악마로 표상되는(11절) 악의 실체입니다. 에베소서의 앞부분에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2:2)는 이 대목에서 네 가지 이름으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 ‘권세자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이 네 가지 세력들은 각기 다른 개별적 실체를 뜻한다기보다는 악마로 통칭되는 악의 실체의 다양한 현존방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을 통해 관철되고 있고, 어두운 세계의 지배원리로 작동하고 있고,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실체를 말합니다. 개별적 인간들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압도적인 힘을 말합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말씀을 준비하는 날 아침 신문(한겨레, 2021.10.22)을 보니 가톨릭 강우일 주교가 칼럼에서 흥미로운 주제를 다뤘습니다. 일본의 영화감독 미쓰다 야쓰히로의 <카우라는 잊지 않았다>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려진, 1944년 오스트레일리아 카우라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 탈출 사건입니다. 제네바협정에 따라 관대한 처분을 받고 있는 상황에다 탈출해도 성공할 수 없는 조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탈출 시도였습니다. 1천여 명이 탈출을 시도했고 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의 비밀은 당시 일본 군부의 훈령에 있었습니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훈령입니다. 포로들은 살아서 돌아가면 오히려 ‘비국민’으로 따돌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와 같이 불합리한 행동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특수한 상황에서 예외적인 사태가 아니라 언제든 이와 같은 집단의 폭주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칼럼입니다.

벌써 몇 차례 언급했지만 <오징어게임>이 그리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참여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을 멈출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게임을 중단하지만, 그렇게 중단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던 이들이 모두 다시 게임으로 복귀합니다. 오히려 일상의 현실이 탈출구 없는 지옥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자발적 선택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듯하지만, 사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태입니다.

본문말씀이 말하고 있는 악마의 실체는 그런 것입니다. 인간을 넘어선 전지전능한 힘으로 다가오는 악의 실체입니다. 가장 물질적이지만 가장 비물질적인 힘으로 다가오는 힘의 실체라고 할까요? 구체적으로 힘 있는 인간들을 움직이고, 사람들이 힘겹게 느끼는 세상의 질서를 속속들이 지배하지만, 마치 그 인간들과 땅을 초월하여 공중에서 지배하는 듯한 힘의 실체입니다. 오늘날 자본의 힘만큼 그 분명한 실체를 드러내주는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공중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초과이익을 누가 전유했느냐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 하는 공방을 벌이는 대장동 개발 사태 역시 그 한 단면을 드러내주는 사례입니다. 본문말씀이 말하는 악마의 힘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 성서의 말씀은 검과 같다. ⓒGetty Image

본문말씀은 인간이 그렇게 악마의 노예로 붙잡혀 있는 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것을 역설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13)

인간의 구원, 곧 자유를 향한 희망의 선포입니다. 불가항력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악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희망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희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14~17)

그야말로 우화(알레고리) 형식으로 된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요? 악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당대 상황에 비추어볼 것 같으면, 그야말로 로마군대의 병사와 같은 모습을 취합니다. 머리 가슴 허리 손발을 완전무장한 모습입니다. 외관상 그렇게 비유되고 있습니다. 악의 세력에 맞서는 태도는 그렇게 비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는 로마 병사를 움직이는 가치와는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가슴막이, 평화의 복음을 전할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성령의 검으로서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한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힘에 의한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사랑에 의한 그리스도의 평화, 그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맞서는 대결, 악에는 악으로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그 악한 힘을 무력화시킬 방법으로 맞서는 그리스도인의 지향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더 많은 권력을 쥔 존재가 아닙니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권력은 자신의 의지로 남을 부리는 능력이요, 이를 발휘하는 현실적 수단은 이른바 당근과 채찍입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권력의 철칙은 통용되지 못합니다. 악마의 힘은 무력화됩니다.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무장을 권하는 본문말씀의 이 마지막 대목을 유심히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알레고리로 표현된 말씀의 의미를 하나하나 음미할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마지막 구절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완전무장에 동원해야 할 모든 장비가 방어용 무기인데, 마지막 하나만이 공격용 무기입니다. 곧 성령의 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악마를 최종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주문을 외우듯 성경말씀을 문자적으로 반복하라는 뜻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으로 표현되고 있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는 것, 문자로 표현되는 것을 뛰어넘습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사도 바울이 선포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문자의 한계, 문자로서 율법조문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영이 일깨우는 참뜻이야말로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며, 그 말씀을 무기로 삼는다는 것은 그 뜻을 실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에베소서의 말씀 문맥에서 헤아리자면, 에베소서가 서두에서 선포한 중요한 한 말씀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에베 2:14~22)

놀라운 선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차별의 장벽을 허무시고 하나 되게 하였다는 진실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죄의 수단이 아니라 원수였던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을 이루는 궁극적 근거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가 아닙니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망각해버린 진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신문에 보도된 <2021 아시아 미래 포럼>(한겨레, 2021.10.21) 주 발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말하기를, 오랫동안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통해 생존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다정한 존재였던 탓에 살아남았다고 주장합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본성’을 운위하게 된 것은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 볼 때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가로서 그는 ‘노예제 폐지’처럼 인류는 얼마든지 더 나은 현실을 추구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말씀을 매주일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새삼스러워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말이지요. 성경 말씀이 어째서 표독스러운 무기가 되어야 하고 어째서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거가 되어야 합니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악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무기입니다. 그 진실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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