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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여기 있니?”남은 사람, 남긴 사람(왕상 19,16-18; 요 6,66-69)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10.28 16:23
▲ 죽음을 피해 도망간 시내산 한 동굴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 ⓒGetty Image

어느 시대나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찾고 기다립니다. 각 시대마다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에서 위인으로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지탱되고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띄지 않고 이름 없을 지라도 각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런 사람이 있으니’ 하며 살며시 웃음 짓게 하는 사람들이 그 사회를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들이 희망이 되고 반성하게 하는 사람이며, 그들이야말로 진정 시대가 요청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7000명의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고 또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우리이기를 빕니다.

열왕기상 19장은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의 엘리야는 우리가 흔히 예언자에게서 기대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 수백명과 싸워 이겼던 엘리야는 없습니다. 그는 지금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광야에 있는 하나님의 산으로 도주합니다. 나약해보이지요. 게다가 도망가는 길에 그는 한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예언자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지요? 하나님은 그런 그의 소리를 안 들은 척 그를 깨워 먹이시고 하나님의 산에 이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는 왜 그곳에 가려 했고 하나님은 또 왜 그런 그를 끝까지 갈 수 있게 하셨는지 그 이유는 본문에서 얼른 찾아지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그 산에 이르러 한 동굴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 동굴에 오셔서 묻습니다. 너 왜 여기 있니? 이 물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여기 온 목적이나 오게 된 경위를 묻는 것일 수도 있고 여기 있는 것을 탓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일단 오게 된 경위를 묻는 것으로 이해한 듯합니다. 자기 생명을 앗아가려는 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니 그렇습니다. 그의 답변에는 동시에 억울한 감정도 섞여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야훼께 열심이었고 나만 남았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항변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동굴 밖으로 나가 하나님 앞에 있는 산 위에 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앞에서 무언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하나님 앞에서 크고 강한 바람이 산과 바위를 부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는 설명이 따릅니다. 또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있었지만 그것들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 하셨는지요? 엘리야는 세 차례의 대사건에서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 듯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본문에는 이 말이 없지만 들어갔다고 해야 그 다음이 이해됩니다. 동굴로 들어간 그도 왜? 하는 질문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작은 소리로 동굴 밖에서 말씀하실 때 엘리야가 이를 들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조금 전 경험들이 그의 감각을 민감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엔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입구까지만 갑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 왜 여기 있니?’ 엘리야의 귀는 민감해졌지만, 그의 마음은 그대로였고, 그의 답변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묻는 하나님의 의도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억울하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그 감정의 굴레에서 이끌어내려고 하셨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셨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나만 남았는데도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생각의 동굴 속에 갇힌 엘리야입니다.

그 동굴 속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갈멜산에서 본 불이었을까요? 불은 아니더라도 불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큰 기적은 그에게 잘못된 하나님 이해를 낳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산 위에서 그러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그 앞에서 바람과 불과 지진을 일으키셨고, 그것들과 자신을 분리시키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볼 수 없었으니, 그가 갇힌 동굴은 참으로 깊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자기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 이외에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동일시되지 않고 그 무엇으로도 형상화되지 않는 분입니다. 달라지지 않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더 이상 설득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마지막 사명을 부여하고 예언자직을 마감하도록 하시지만, 엘리야는 그 가운데 하나만 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 대신 예언자가 되게 했을 뿐입니다.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엘리사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7000명을 이스라엘에 남기겠다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이는 뼈아픈 말일 것입니다.

7000명의 사람들은 갑자기 만들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이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며 하나님은 그들이 남아있을 수 있도록 그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엘리야가 볼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는 자기 생각에 빠져 주변의 작은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볼 수 없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도 마음으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우리의 동굴 속에 가두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그 동굴 밖으로 끌어내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향해 너 왜 여기 있니 하고 물으십니다. 과감히 그 동굴 밖으로 나가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와 닮은 사건이 요한복음 본문에도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전통과 신앙을 문제 삼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에게서도 다른 엘리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의 동굴에 갇힌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곁에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겨우 제자들만 남았던 것 같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들마저 동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이들이라고 저들과 달리 특별한 깨달음이 있어서 예수를 따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아직 떠나지는 않았지만 웅성웅성하고 있는 것을 예수께서도 아시고 그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참으로 애절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이 말은 마치 ‘너 왜 여기 있니’ 하고 묻는 동굴 밖의 작고 여린 소리처럼 들립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를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었기도 하겠지만, 베드로는 엘리야와 달리 확고하게 대답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모두가 떠나도 이렇게 말하며 끝까지 예수 곁에 남은 제자들, 그들에게서 바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한 7000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기신 사람들, 그들은 예수 곁에 남기로 하고 남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시대가 예수를 모욕하고 예수를 버리는 시대일지라도 예수 곁을 지키며 그 곁에 남는 자가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남겨둔 사람들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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