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생활 칼럼
나는 강요된 청빈이 싫다사자모 소리
장사모 | 승인 2021.10.28 16:27
▲ 그리스도교의 청빈의 삶을 대표하는 성 프란치스코. 그를 기념한 성 프란치스코 성당. 프란치스코가 시성되던 해인 1228년에 공사를 시작해 1230년에 성당의 하부를 완성하고 성인의 유해를 모셨다. ⓒGetty Image

몸에서 계속하여 열감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체온계로 측정되는 열이 아니다. 가슴도 답답하고, 기력도 없다. 백신의 2차 접종에는 후유증이 더 크다고 하더니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하는 것 일뿐 사실 그것도 일주일이 벌써 다 되었다.

일단 진통제를 하나 꺼내어 먹었다.

원래 성인은 2알을 먹으라지만, 나는 정량의 절반만을 먹는다. 정해진 용량을 복용하였을 때 오히려 이상반응 발현의 경험이 적지 않았던 개인적 경험이 누적된 까닭이다. 평소에 다른 약을 많이 복용하지 않아서 약물반응이 빠른 것일까? 아니면 대체로 백인성인남성을 기준으로 약이 만들어져서 성별에 따른 약물동력학적 차이가 나타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전세계적으로 여성만 아니라 소아와 다양한 인종의 임상시험참여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복잡한 변수들이 많고, 고려되어야 하는 조건이나 제외가 많아 이러한 대상의 참여율이 저조하다고 한다. 결국 비용의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약회사들이 인류에 공헌을 위한다기보다는 최소투자에 최대이익이라는 원칙에 따라 의사 결정 될 것이니 사실은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비단 회사의 경영에서만 아니다. 일반의 개인들도 삶에서 믿을 구석을 위한 투자로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방식을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돈을 버는 것에 더 나아가 모으고 쌓는 것에 너나할 것 없이 천착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을 많이 하면 좋은 일이 아니냐는 고전적인 것 같은 말을 듣는 것이 어렵지 않다. 최신의 부동산 정보를 수집하고 발품 파는 것, 주식의 장세를 파악하고 코인의 등락을 밤새도록 확인하는 것도 수고로운 노동이 아니냐는 자본에 물든 논리도 적당히 이해해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목회를 잘하는 것일까?

우리 부부는 돈이 없다. 치솟는 아파트값. 로또라는 청약에 다자녀 특별공급으로 분양받으란다. 자본이 없다면 대여라도 해줄 테니, 이익을 나누자는 교인의 권유도 받는다. 어떤 때는 테마주들을 추천하는 이들도 있다. 돈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돈버는 방법을 몰라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때면 미련하게 살 것을 다짐 또 다짐한다. 바르게 잘 벌고, 잘 쓰려고 작정하면 모으고 쌓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불교의 사찰경영에 대한 책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나는 종교에 대하여 경영한다는 개념을 사용한 것부터도 동의는 어렵다. 목사의 목회방식도 부자교회들의 재산증식 방법도 회사 경영과 별반 차이가 없어지고 있는 세태에 대하여 비판과 반성을 아니 할 수도 없다.

호기심으로 빠르고 가볍게 훑어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고 묵직하게 생각해 볼 것이 있었다. 헌금을 왜 해야 하며,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이다. 아울러 목회자의 생계에 관하여도.

승려들은 원래 빌어먹는 것이 바른 정진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으로 탁발托鉢하는 것이 아니라 공양을 통한 삼보의 정재淨財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란다. 그런데 문제는 갈수록 보시가 줄어들고 자구책을 마련하기에 이르러있단다.

구차하지 않을 만큼의 생계가 보장되어야 한다. 목회자 자신은 청빈하되 청빈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파트타임 부목사제도를 도입하겠다는 한 교단의 이야기를 들었다. 목회자의 이중직을 허용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는 하나 구조적으로 기능인으로 사용되고 말며 책임질 수 없음을 제도화하는 이런 법이 어떻게 공동체의 그리스도적 가치 실현으로 볼 수 있는가 납득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교회성장이 최우선되어 지탄받는 교회, 천박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말았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목사들을 외면하는 부자 교회, 부자 목사는 무엇을 위해 곳간을 채우고 있는 것인가? 초대교회의 이상과 헌신을 강조하는 그들은 능력에 의한 차별을 보장받는 것, 결과의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오늘도 대형교회는 규모의 경제로 골목의 상가교회들을 위협한다. 자본윤리로도 규제되지 않는다. 해외의 선교를 위해서만 아니라, 작고 건강한 교회들이 건강한 핏줄로 자양되는 국내선교, 사회선교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힘을 써야할 때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그나저나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도 돈 때문이다.

목회에 성공하여 은퇴하는 담임목사를 위한 큰 아파트와 고급 차량, 퇴직금과 전별금 등등을 지출하는 것을 본다. 동시에 은퇴할 목사의 거처라도 마련해야하니 후임 목회를 위해서 돈을 준비하라는 당면한 목회현실도 마주한다.

목사로 남편이 소명을 감당하겠다는 동안, 우리에게 지난날도 오늘도 가난한데 어찌할까. 말씀대로 살아도 칭찬은커녕 모아 놓은 돈도 없냐는 현실의 무게가 버겁다. 말씀만 아니라 삶에 밑줄을 긋겠다는 당당한 목사의 아내는 다시 열이 오른다.

쌓는 그들에게 과연, 보이지 않는 것인가, 보지 않으려는 것인가.

장사모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사모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