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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너는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신명기 7:6-11)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1.11.02 16:21
▲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힘써 사랑할지니라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만약 평안하지 못하셨다면, 상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평안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선택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 하나님의 선물인 이 평안을 다시 선택하고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하나님 나라 가까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입술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고백하며, 삶으로는 말씀에 관한 지식은 부족할 지라도, 아는 만큼 행한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 나라 안에 머무는 성도입니다.

한 주간 어떤 삶을 사셨나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 안에 머물며 은혜와 사랑을 누리다가 이 자리에 나오셨나요,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 나라 가까이에만 머물다가 이 자리에 나오셨나요. 하나님 나라 가까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 머무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에서 지금 저와 성도님들이 속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가톨릭은 왜 개혁이 필요했을까요?

가톨릭교회 중에서도 교황이 머물던 가톨릭교회의 핵심인 로마 가톨릭교회가 권력과 돈에 눈이 멀어 타락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루터가 이 ‘면벌부’ 판매를 비롯한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대한 비판의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에 붙이면서 종교개혁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면죄부(免罪符)’로 알려졌지만 ‘면벌부(免罰符)’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어도 죄에 따른 벌, 곧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가톨릭에서 잠벌은 현세나 내세의 연옥에서 받게 되는 잠시 적 벌 인데요.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이 정한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에게 잠벌을 면해 주기도 했습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잠벌을 해결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점을 이용해서 남은 벌을 없앨 수 있는 ‘면벌부’를 돈을 받고 판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부패함을 보면서 마르틴 루터는 ‘죄의 사함도, 벌의 사함도 하나님께만 달려있다.’, ‘교황도 교황이 아닌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주일을 맞으며 오늘날 한국교회를 어떻게 진단 할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지금의 한국교회는 당시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차별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판단하는 권한이 마치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삶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을 부르시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드린 내용들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거룩한 백성이다. 거룩한 이유는 당신들이 잘나서가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로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7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모세는 하나님이 당신들을 선택하신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7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당신들이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을 받고, 선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남들보다 뭐가 더 잘나거나, 흠이 없거나,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지 설명합니다.

로마서 1:1-6 “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3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4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 들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고 부르셨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지난 주 말씀 드렸듯이 우리 자신이 전도지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40편에서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40:5-10 “5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하시며, 우리 위한 계획을 많이도 세우셨으니, 아무도 주님 앞에 이것들을 열거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널리 알리고 전파하려 해도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6 주님께서는 내 두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사나 예물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번제나 속죄제도 원하지 않습니다. 7 그 때에 나는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8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9 나는 많은 회중 앞에서,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아시듯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10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의를 나의 가슴 속에 묻어 두지 않았고, 주님의 성실하심과 구원을 말합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그 미쁘심을 많은 회중 앞에서 감추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자신이 지금 왔다고 고백하며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 그리고 읽어드린 로마서와 시편은 이런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 부르셨다. 구원해주셨다. 그래서 택하신 뜻에 따라 산다. 복음을 전한다. 계명을 지킨다. 주님의 뜻을 행한다.

“9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10 그러나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벌을 내려서 그를 멸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늦추지 아니하십니다. 11 그러므로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민 삼아주셨으면, 성민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기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로운 자로 여겨주셨기에 마땅히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 그러나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말씀인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 48절의 말씀에서 어떤 삶이 거룩하고, 의롭고, 자녀다운 삶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3-3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처럼 흠 많고, 늘 말씀이 아닌 세상 앞에 꼬꾸라지는 사람일지라도 ‘온전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런 너희들일지라도 온전해질 수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화 하나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수도승이 강에 목욕을 하러 왔다. 옷을 벗고 강으로 걸어 들어가 몸을 담그려는 찰나, 새끼 전갈 한 마리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전갈은 헤엄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두면 익사할 게 분명했다. 

집게발을 버둥거리며 가라앉는 전갈의 모습에 연민심을 느낀 수도승은 전갈을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물가로 데려다 주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익사 직전에 구조된 전갈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꼬리의 독침을 수도승의 손바닥에 박았다. 뜻밖의 일격을 당한 수도승은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그는 본능적으로 전갈을 떼어 냈고, 전갈은 다시 물속에 빠졌다.

버둥대는 전갈을 보고 수도승은 또다시 연민의 마음이 일어 그 독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물가에 닿기도 전에 전갈이 재차 독침을 찔렀다. 처음보다 더 강한 독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너무 아파 손을 흔들자 전갈은 또다시 강물에 빠졌고, 이번에도 수도승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전갈을 구조했다.

강둑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보다 못해 소리쳤다. ‘전갈을 내려놓아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 독침에 찔릴 거에요. 전갈은 전갈의 운명에 맡겨요. 독충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 무의미해요. 전갈은 변하지 않을 거에요.’

그 충고를 무시한 채 수도승은 다시 전갈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물가로 향했다. 가까스로 물가에 이르렀을 때 전갈이 세 번째로 독침을 박았다. 폐와 심장까지 통증이 느껴졌다.

수도승은 비틀거리면서도 전갈이 물에 빠지지 않게 보호했다. 지켜보던 남자가 황급히 달려와 수도승을 물 밖으로 끌어냈다. 그 틈을 타 전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래사장으로 사라졌다. 수도승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남자가 어처구니없어 하며 물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미소를 지을 수 있죠? 저놈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요. 전갈은 계속해서 당신을 찌를 게 뻔한 데 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구해 준 거죠?’

수도승이 말했다. ‘당신 말이 옳소. 전갈은 계속해서 나를 찌를 것이오. 그러나 전갈은 악의를 가지고 찌른 게 아니요. 물의 본성이 젖게 하는 것이듯이, 전갈의 본성은 찌르는 것이오. 따라서 전갈은 자신의 본성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요.

전갈은 내가 자기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려고 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소. 그것은 전갈의 본성이 다다를 수 없는 의식의 차원이기 때문이오. 하지만 독침으로 찌르는 것이 전갈의 본성이듯이, 위험에 처한 생명체를 구해 주는 것이 수행자의 본성이오.

전갈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고, 나는 수행자의 본성에 충실했소. 여기에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소. 전갈이 자신의 본성을 저버리지 않는데 내가 나의 본성을 포기할 이유가 무엇이오? 그래서 나는 미소 지은 것이오. 전갈과 나, 우리 둘 다 자신의 본성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오.’

당신은 어떤 본성에 충실한가? 자기 안의 낮은 차원의 본성을 따르는가, 아니면 높은 차원의 본성을 따르는가? 상대방이 당신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관계없이, 당신의 선택이 당신의 본성을 결정한다.”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은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성도님들에게도 이 힘이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이 힘으로 성도도 교회도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갱신되어야 합니다. 정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민입니다. 성민으로 삼으신 이유는 우리의 의나 온전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민이 되었으면 성민답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민답게 산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한 마음으로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되려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 하는 자, 정죄하는 자는 결국 망할 것입니다. 성민으로서, 성민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럼으로 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에서 루터와 같이 불쏘시개가 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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