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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그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하여
김진호 | 승인 2005.07.05 00:00

<편집자의 글: 이번주부터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인 미국주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한백교회에 협동 목사로 계시는 김진호 목사님의 글입니다. 원문의 각주는 생략하였습니다. 원문 파일은 이 연재가 끝나는 글에 함께 싣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고민해 보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후발대형교회적 신앙과 미국주의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독보적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교회 대형화’의 문제가 비단 양적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현실적 규모에 관계없이 대형화는 거의 모든 교회가 갖는 ‘선교적 욕망’의 대상으로 실재한다. 지금은 좀 덜하기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교회들이 매주 발행하는 주보의 표지에 교회 이미지를 실었다. 이때 그 교회 이미지는 자신들의 예배터인 실재 공간이라기보다 자신들이 동일시하고 있는 대형화된 상상적 가공물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공간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대형 교회의 신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은연중에 표상되어 있는 것이다. 또 “(교회) 부흥하세요” 같은 말이 인사말이 될 정도로 신앙언어에서도 대형 교회에 대한 욕망은 일상화되었다. 요컨대 ‘대형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관계없이 일반적인 한국 기독교 신앙제도의 주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형 교회적 신앙은 힘에 대한 동경과 숭배를 신앙화한 결과이자 원인이다. 이때 힘에 대한 신앙적 욕망은 한국 기독교의 미국에 대한 선망과 겹친다. 이러한 겹침의 역사적 배경과 함의를 살피는 것이 이 글의 과제다.

그런데 대형화된 교회의 신앙제도는 최근 두 가지로 분화된 양상을 띤다. 하나는 1960년대 이후,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의 한국 근대화과정에서 급성장한 교회의 신앙제도와 연관된다면, 1980년대 후반 이후 급부상한 교회의 신앙제도와 연관되는 현상이 다른 하나다. 이렇게 두 가지 이념형으로 유형화할 수 있는 대형교회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일련의 사태들이 최근 벌어지고 있다.

담임목사직 세습, 2003년 이후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반공・친미적 (시청) 집회, KBS와 MBC TV의 기독교 비판 프로들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부적절한 방식의 항의, 아프간・이라크전쟁에 대한 교회의 친미・호전적 태도, 비민주적 권력독과점 관행의 제도화에서 기인한 갈등이 각각의 약한 고리를 통해 표출된 영락교회와 광성교회 사태, 남아시아 해일 재앙에 대한 김홍도 목사의 발언 등, 사회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로 비쳐진 일련의 사태들은 선발 대형 교회적 유형의 신앙이 일반대중의 인식과 불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이 유형의 한 가운데 있는 신앙 기구다.

한편 기독교의 어떤 사회적 행보들은 커다란 반발을 초래하지 않고, 더 섬세하게 사회의 논쟁 지평 속에 우파적 관점으로 개입해 들어가곤 한다. 문화적 영역에서 기독교적인 보수주의적 윤리관을 통한 사회개입에 방점을 둔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이하 기윤실)와 정치적 차원의 개입을 지향하는 ‘기독교 사회책임’ 등, 이른바 ‘기독교 NGO’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기구들은 후발 대형 교회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문화적․정치적 신앙관과 연속적이며, 그 주체들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들(선발 대형 교회든 후발 대형 교회든)은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며, 미국에 대한 선호와 신앙 간의 괴리를 상대적으로 덜 체감한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동시대 한국 근대성과의 호응 차원에서 양자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선발 대형 교회 유형의 신앙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지체된 근대성’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후발 대형 교회 유형은 우리 시대의 합리성과 보다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길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전자가 돌진적 성장(rush-to growth) 시대의 한국 근대성과 맞물리는 시기에 양적으로 급성장한 교회적 신앙 유형이라는 점과 후자가 민주화시대의 한국 근대성과 부합하면서 양적으로 급부상하였다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를 읽는 사회적 맥락을 조명할 수 있다. 민주화시대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와는 다른 방식의 위기를 내포한다.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시대의 야만이 은폐되면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민주화시대의 주된 특징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처럼 후발 대형 교회의 외양은 세련되고 부드러운 듯하지만, 그 담론들을 들여다보면 폭력적인 요소들이 그 존재의 축을 이루고 있다.

내가 여기서 대형 교회 신앙의 두 유형에 관해서 얘기한 것은, 최근 널리 확산되고 기독교(의 선교)의 위기에 관한 논의에 개입하고자 해서이다. 선발 대형 교회가 기독교를 과대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사회적 위상은 급속도로 실추하고 있는 형편에 있다. 비기독교측은 고사하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설문조사들조차 한국의 주요 종교들 가운데 가장 신뢰도가 낮은 집단으로 한결같이 개신교가 지목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민주화가 진전되고 소비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개인적 주체화가 강화되는 현재의 맥락에서 몰개인적인 공동체적 주체성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신앙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위기를 드러내는 요소다. 그것은 교인 충성도의 현저한 약화로 나타났다. 집회 출석률, 전년 대비 헌납 비율, 목회자나 장로 등 교회 지도자에 대한 존경도 등이 낮아지거나, 적어도 성장이 멈추어 있다. 또 가장 개인주의적인 세대인 청(소)년층이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분명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에 기반을 둔 위기론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존재방식과 관련해서 보면 위기론은 아직 현실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 역사에서 개신교는 대중보다는 권력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함으로써 존속・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 등 한국의 정치엘리트 집단 가운데 개신교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요컨대 대중사회의 지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더라도 권력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높은 집단이라는 점에서 기독교는 자신의 주장을 의제화하고 제도화하는 강력한 능력을 담지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기독교사회책임’ 같은 도덕적 지명도나 의사표현의 합리성이 높은 집단이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현상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기구에는, 부패와 오명으로 얼룩진 한기총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는 교계의 명망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보듯 근본주의적 기독교 보수세력의 정치개입은 ‘정치의 (근본주의적) 도덕화’를 낳을 우려가 있다. 정치가 (근본주의적으로) 도덕화된다는 것은, 민주적 의사소통 과정보다 ‘원리’에 준거한 정치행위가 강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질서로 양분된 세상에서 선을 배타적으로 대표하는 도덕의 존재란 그것을 둘러싼 모든 논쟁과 대화를 중단시킨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에서 합의는 공론을 통하기보다 감정 편향적이고 도그마적 신념에 좌우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특히 9.11사태에서 비롯된 일련의 미국 사회의 합의 양상은 매우 강한 도그마적 편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도그마적 합의의 핵심에 있는 부시 미 대통령이 근본주의적 종말론을 신봉하는 ‘메시아적 군사주의자’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정치의 도덕화는 국제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실행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특히 제리 폴웰(Jerry Falwell)이 창설한 근본주의적 기독교 우파 정치조직인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는 낙태, 아동, 여성, 음란비디오 등에 관한 숱한 보수주의적 입법을 주도하였는데, 이들의 신앙적 신념은 바로 도덕적 절대성에 기반을 둔 도그마적 태도에 준하고 있다.

몇 년 전 ‘기윤실’ 등이 주도한 대중음악이나 영화의 음란성에 대한 보수주의적 개입도 위와 같은 미국의 근본주의적 도덕관과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인적, 신앙적 차원에서 기윤실과 깊은 연계성을 맺고 있는 기독교사회책임도, 비록 아직까지는 정치적인 보수주의에 경도된 듯하지만, 조만간에 도덕의 정치화를 일상 속에서 강화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 예상된다. 여기서 ‘일상화’ 현상은 근본주의적 도덕의 정치 문화를 고착화하고 제도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체감되는 이러한 정치 문화를 거의 불편해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감수성이 퇴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중사회에 대한 ‘무례함의 제도화’를 뜻한다. 그것은 타자화된 존재를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배제하는 틀이다. 동시에 타자를 생산하는 체계이다. 권위주의시대는 이러한 무례함의 제도화를 통해 사회적 동력이 추동되던 시대였다. 반면 민주화시대는 그것을 지양하려는 사회적 욕망에 의해 발진되었다. 백성이 아닌 시민으로 주체화되었고, ‘양(羊)’이 아닌 ‘성도’로 주체화되었으며, 식솔이 아닌 가족으로 주체화되었다. 한데 민주화는 ‘그 이후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힘과 그것을 막는 힘의 격전의 장이다. 비시민, 비성도, 비가족 등의 주체화와 타자화의 대립이 민주화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이때 민주화된 사회의 무례함의 제도화는 이들을 타자화할 뿐 아니라, 그 메커니즘을 은폐함으로써 작동한다. 내가 여기서 민주화 사회의 은폐된 야만에 대해 얘기한 것은 기독교의 정치의 도덕화가 바로 야만을 은폐하면서 작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의 미국주의를 다루려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이러한 기독교적 ‘무례함의 신앙’은 힘의 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무례함의 신앙이 포교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힘’이다. 선교 대상을 압도하는 힘이 수반되어야만, 그 대상인 대중의 삶의 틀, 그 고통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녀/것)를 자기의 삶의 틀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 개신교가 그토록 맹목적인 친미주의를 신앙의 내적 언어로 이해하게 된 것도 (선교 종주국인 미국의) ‘힘에 대한 선망’을 신앙으로 오인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북미와 독일에서 각각 출간된 두 권의 문제작은 팍스아메리카나와 팍스로마나가 담론 구조상 등가물이라는 점을 논증함으로써 힘을 숭배하는 무례함의 신앙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보였다. 특히 리처드 호슬리는 미국판 힘의 종교인 팍스아메리카나가 형성되는 과정이 미국적 기독교인 근본주의 신앙의 형성 과정과 긴밀히 맞물리고 있음을 주장한다.

나는 다음 절에서 한국의 ‘힘 숭배 신앙’이라 할 수 있는 대형교회 신앙의 뿌리에는 미국식 힘의 종교인 근본주의 신앙의 이식과정에서(특히 해방 전후기) 식민지적 무의식으로 고착화된 ‘부적절한 모방’이 있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부적절한 모방의 결과, 한국적 근본주의 신앙은 은연중에 미국적 이상과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동일시하며, 나아가 내・외부에서 타자화된 대상에 대한 식민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적 신앙의 심성적 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김진호  kjh5594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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