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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으로 살아가십시오그리스도인의 길, 자유인의 길(갈라디아서 5:1~6)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1.11.04 02:39

인간은 주어진 조건으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또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한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에 대해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그야말로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어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곧 ‘자유’입니다.

본문말씀의 첫머리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5:1) 갈라디아서의 사실상 결론으로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종의 멍에에 매이지 않고, 그 종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벗어나야 할 종의 멍에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는 곳곳에서 종의 멍에로부터 해방을 말합니다.

우선 그것은 악한 세대로부터 해방을 뜻합니다(1:4). 주기도문이 말하는 것과 같은 악으로부터의 구원(마태 6:13), 그리고 지난주일 말씀의 주제인 악마로부터의 해방(에베 6:10 이하)입니다. 그것은 폭압적인 세상의 권세와 그로 인한 온갖 차별로부터의 해방(3:26~28)을 뜻할 뿐 아니라 잘못된 믿음, 곧 우상숭배로부터의 해방(4:8~10)입니다. 나아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결코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 종교, 곧 율법을 강요하는 종교체제로부터의 해방(2:19)을 뜻하기도 합니다.

본문말씀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의미를 역설합니다. 인간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인간을 종으로 만드는 종교로부터의 자유, 그 허구를 타파하고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주의에 대항해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율법주의는 마치 유대인들에게 운명의 굴레, 운명의 덫처럼 씌어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유대의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유대의 관습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율법주의 운명론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선민인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이 선민 유대인이 되는 절차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5:2)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입니다.”(5:4)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운명의 굴레에 매여 산다면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5:6)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참 자유를 누릴 소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째서 그렇게 율법에 대해 분투했을까요? 어째서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역설했을까요? 오늘은 마침 1517년 종교개혁을 기리는 주일이기도 하여, 그 뜻을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다시 새겨보고자 합니다. 루터는 마치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종교체제, 기존의 교회와 싸우면서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특별히 <갈라디아서 주석>을 통해 사도 바울이 분투했던 그 뜻을 당대의 상황 가운데서 되살리면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로 삼았습니다.

루터는 율법의 이중적 사용에 대해 말합니다. 첫째는 시민적 사용이요, 둘째는 신학적 또는 영적 사용입니다. 율법의 시민적 사용은 죄를 억제하기 위한 법의 사용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법으로 규제하는 차원입니다. 그것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은 한계를 지닙니다.

율법의 신학적 또는 영적 사용은, 율법으로 인하여 범죄가 더하여지는 차원입니다. 본문말씀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가 생깁니다.” 일단 율법준수 원칙을 따르면 준수해야 할 항목이 늘어납니다. 그것을 과연 완벽하게 준수할 수 있느냐, 그것이 인간을 의롭게 하느냐, 그것으로 인간이 자유롭게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 인간의 곤고함만을 확인할 뿐입니다. 외적 조건과 권위에 매여 있는 인간의 실존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 율법으로 인간이 구원을 누리고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요 기만이며, 심지어 오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를 속이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그 길을 강요함으로써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를 뒤집어씌웁니다. 루터는 그 자기기만, 자기교만의 결정체를 당대 로마 교황체제에서 봤습니다.

루터는 이를 두고 “너무나도 추악하기 때문에 만일 적그리스도가 온다고 할지라도 이 간악(奸惡)에는 아무 것도 자신이 더 보탤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그리스도인의 자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로마교회가 요구하는 의례와 절차를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철저히 배격하고 그 체제에 대항해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체제와 싸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교회 역시 그 자기교만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루터는 사도 바울을 따라 믿음으로 누리는 구원과 진정한 자유를 역설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5:5) 바로 이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한 행위를 누적함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자기 업적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요, 그 구체적 표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데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종의 멍에, 운명의 족쇄는 ‘이렇게 정해진 길밖에는 없다’는 철칙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 철칙을 넘어섭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죽으라는 법이 없는 삶의 진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아는 삶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가면서도, 언제나 미처 자기가 알지 못했던 것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자유로운 삶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Getty Image

사도 바울이 여기서 완결된 형태로 선포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한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비로소 인간이 의로워질 가능성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터 역시 그 점을 잘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강조했을 이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였는지는 <갈라디아서 주석>에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루터는 이 주석에서 마치 인간의 그 어떤 선한 행위도 무가치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직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한 행위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우선 루터가 사도 바울을 따라 율법을 따르는 선한 행위 또는 선한 것처럼 보이는 행위의 무용함을 말하는 맥락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우선 루터는 당대 로마의 교황체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야 하고, 더 나아가 그 깊은 신학적 의의를 헤아려야 합니다.

루터가 율법을 따르는 선행의 무용성을 말한 것은 아예 선행을 부정하거나 신앙인의 어떤 행위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초점은 선행을 쌓음으로써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착각을 경계한 것입니다. ‘털끝만큼이라도 선행으로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으로 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기의의 교만의 탑을 쌓게 되어 있다.’ 루터가 경계한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파국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일깨워주고,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은총의 세계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인간이 결코 완벽하게 의로울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여 주시기에 그렇게 인정받는 가운데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사도 바울을 따라 그 현실을 가능성으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완전하게 순결한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성경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인간들은 모두 흠을 지녔습니다. 다윗이, 베드로가,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그렇습니다. 바울도 스스로 곤고한 존재라고 고백했습니다.

루터 역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시험거리를 안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을 보면 살며시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년기에는 육체의 정욕이, 중년에는 야망과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노년에는 탐욕이 사람들에게 닥쳐온다. 성인들 가운데 그가 살아가는 동안에 육체가 조급함과 분노 등을 가끔 충동질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갈등하는 존재로서 인간, 선악이 혼재되어 있는 인간 삶, 그래서 분투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실상을 진솔하게 들여다보게 해줍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새로 찍어내는 주형이라기보다는 낡은 인간을 우선 들여다보게 해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인간을 완전한 해방, 완전한 자유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만, 우선은 인간 실상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갈등하는 인간 삶의 실상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과 파멸로 인도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갈등하는 인간 삶의 실상을 모르거나 무시할 경우 그 가능성이 차단됩니다. 바울이 보기에, 루터가 보기에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명확하게 율법조문을 지시하는 대로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갈등하는 인간 삶의 실상을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암만 해도 스스로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해주며, 오히려 거기서 인간은 자유함을 맛보는 것입니다. 오히려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겸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삶이 적극적인 선행을 과연 배제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5:6) 믿음이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사랑의 덕목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목으로서 그것이 믿음의 열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갈라디아서는 놀랍게 요한서신과 닮아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을 따라 행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요 가치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드러내거나 어떤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루터는 이에 깊이 공감합니다. 믿음이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 선한 행위로 이끕니다.

루터는 이를 더욱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저작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실 두 가지 명제로 집약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것에도 매일 수 없는 자유인입니다. 폭압적인 세상의 권세와 그로 인한 온갖 차별로부터, 동시에 잘못된 믿음 곧 우상숭배로부터, 구원을 보장한다고 여겨지는 종교제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또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의 의무를 짊어진 인간 삶의 측면을 말합니다. 세상을 섬기는 존재, 다른 사람을 섬기는 존재, 만물을 섬기는 존재, 그것은 곧 온 생명 안에서 삶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며, 사도 바울이 역설한 삶이며, 종교개혁자 루터가 다시 일깨운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싸구려 믿음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헛된 미신과 우상숭배를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종으로 만드는 권력에 굴해서도 안 됩니다. 만물 가운데서 서로 섬기는 가운데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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