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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죽음 이후(사무엘상 28:17-19)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11.07 15:45

17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최근 교계에서는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NCCK 총무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기도를 했고, 이에 대한 비판과 결국 사과까지 이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목사가 어디에서 기도를 하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라는 상황과 NCCK라는 단체의 이름은 잘 어울리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TPO(Time, Place, Occasion)를 무시한 옷차림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NCCK 총무의 기도 자체보다 제가 신경 쓰였던 점은 이에 대한 비판들이었습니다. 소위 살인자라 불리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의 장례에서 목사가 기도하는 일은 올바른가에 대한 지적들이었습니다. NCCK 총무를 향한 비판들은 이 일이 올바르지 않다는 관점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이런 비판들의 근간에는 어떤 신앙이 깔려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원하지 않더라도 성도님들의 장례 예배를 집례하게 됩니다. 때로는 성도님들 가족의 장례를 집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그 가족분이 저희 교회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를 다니신 분이라면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교회를 전혀 다닌 적이 없던 분의 장례 예배를 부탁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목회를 어느 정도 하신 분들이라면 이런 경험이 못해도 한 번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 장례 예배를 집례 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유가족인 성도님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예배를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가 어렵습니다. 돌아가신 가족이 천국에 가셨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니까 지옥 가셨다고 말해야 할지 어렵습니다. 어떤 목회자도 ‘이 분은 지옥에 가셨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고민의 근간에는 거부하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신앙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알 수 없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천국과 지옥이라는 신앙 자체가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고민을 안겨줍니다.

여기에 장례 예배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마치 제문(祭文)과 같은 역할을 해서 돌아가신 분을 천국으로 이끄는, 혹은 천국에 가길 기원하는 주문처럼 인식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또 장례 예배가 돌아가신 분을 천국으로 환송(歡送)하는 의식으로 인식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물론 일반인의 장례와 국가장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규모와 영향력의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일어난 때에 장례와 관련된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한 가지 신앙으로만 설명할 수 없고, 또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되는지, 우리의 삶이 어떤 형태로 이어지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90년대부터 교회를 다니셨던 분이라면 천국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 있을 것입니다. 과거 교회 벽에 걸려있기도 했고, 교회에서 나눠주는 식탁에 단골로 등장했던 로버트 클락의 작품 ‘부활(The Resurrection)’에 그려진 이미지입니다. 왼쪽에는 무덤에서 나오신 예수님과 천사가 있고 오른쪽 위에 구름이 있고 그곳에 수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미지는 한 번 각인되면 떨쳐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어린 시절부터 이 그림을 너무 많이 봐왔고, 천국에 관한 그림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천국 하면 구름 위에 있는 어떤 나라가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신약성경에 파편적으로 흩어져있는 천국의 이미지, 특히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모아보면 그 그림과 같은 형상이 만들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이런 이미지가 나타나는 곳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에 대한 비유일 것입니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떨어져 고통당하였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와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합니다. 우린 보통 천국은 하늘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옥은 땅 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 자체가 하늘과 땅이라는 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부자는 고통 속에 있었지만, 아브라함과 그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볼 수 있었고,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두 공간은 손이 닿을 수 없도록 단절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천국과 지옥은 완전히 별개의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서로 다른 공간이고 단절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위치로 생각되었을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어떤 공간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 Robert Clark, 「The Resurrection」 ⓒGetty Image

사실 누가복음 16장의 비유는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 믿고 선한 삶을 살아가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믿지 않고 악한 삶을 살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나타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의인과 악인이라고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지, 왜 부자는 음부에 떨어지게 되었는지 해석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유추할 수 있는 점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따르면 사람은 죽어서도 자신의 인격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원래의 인격 그대로 새로운 어떤 세계에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평안이 허락된 공간에서 살아가게 되고, 어떤 이들은 고통이 이어지는 공간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말씀이 맞는지 누가복음을 기록한 공동체의 생각이었는지는 더 해석해야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상당히 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죽은 이후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셔서 그에게 어떤 음성도 들려주시지 않자,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낸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약간의 혼란을 주기는 합니다. 사무엘의 영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표현,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낼 수 있었다는 점, 모든 상황이 혼란을 줍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 사람들은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었다는 중세 시대의 신앙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이야기, 그 전 사람들은 모두 땅 밑에 있는 지옥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대 유대인들이 사후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후 세계에 관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의 초기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사후 세계에는 천국과 지옥이 없습니다. 죽은 이는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성경에서 사무엘은 의인입니다. 지금 우리의 개념 속에서 보자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인물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악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인물입니다. 또 사울은 하나님께 끝없이 회개했지만 결국 용서받지 못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의 협력자였기 때문에 선한 이미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사울은 분명 악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과 사무엘이 죽은 이후에는 같은 곳에 머물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는 점은 죽은 이후에도 생전에 가지고 있던 인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무엘의 영혼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생전에는 하나님께 여쭈어서 들어야만 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만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죽어서 같은 장소에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의인과 악인에게 차별이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분명 구약성경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차별이 없습니다만, 죽음 자체에서 차별이 생깁니다. 의인은 오랜 삶을 살게 되고 악인은 원하지 않는 죽음,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우리말에도 ‘천수를 누린다’라는 표현이 있듯이, 의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모두 마칠 수 있고, 또 장수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인은 장수하지 못하고 그 죽음도 처참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신앙은 변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기나 시편에는 악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데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어 있습니다. 의인이 더 잘 살고 장수해야 하는데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오히려 악인들이 더 잘 먹고 잘 삽니다. 이런 현실의 문제가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변화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은 의인이나 악인 모두에게 닥치는 삶의 종착점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을 보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 모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영이 하늘로 올라가는지 짐승의 영이 땅으로 내려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창세기 3장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동산에서 내쫓으시며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께 보상받지 못한 것, 오히려 악인들이 누리고 살았던 것을 삶 이후에라도 보상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생겨났고, 죽음 이후의 세상이 더 구체화되고 세분화됩니다. 그중 하나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언급한 셋째 하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발전해나갔고, 우리가 단테의 신곡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모습으로 만들어져갔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떤 형태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도 죽었다 살아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상 중에 무엇인가를 봤다고 말하고, 최근에도 자신이 천국을 다녀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본 것이 실제 천국인지 그저 꿈이었을 뿐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또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긴 세월이 흘러가는 가운데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의 흔적들은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이런저런 본문을 말씀드렸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에는 사후 세계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온전하게 그려주는 본문이 없습니다. 모두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야기들이고 우리는 그 파편들을 모아서 그 세계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이 이야기가 파편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기록한 이들이 전하고자 했던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분명 사후 세계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것을 전하려고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이고 현실입니다.

죽은 이후에 무엇을 보상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응답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도 충분히 채워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 함께 천국 갑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 천국에 대한 갈망을 너무나 강조해왔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가 아닌 천국을 너무나 강조하다보니 교회의 장례 문화에서도 혼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품어왔던 천국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천국을 바라보며 살기보다 이 땅에서의 삶을 먼저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끊임없는 욕망에 따른 간구로 인해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늘 지키시며 평안 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의 삶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야 우리에게 보상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키시고 충만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그런 믿음을 지키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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