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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3: 눈, 혀, 그리고 머리(잠 3:13-26; 약 3:13-18; 눅 6:39-45)창조절 열한째 주일(11월1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11.12 15:23

1. 평지설교와 산상설교

지난주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다양한 관점과 가치관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맥락과 상황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러한 맥락과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읽어버리는 성경은 그 의미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고도 말씀드렸죠? 오늘 복음서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 평지설교와 산상설교(코시모 로셀리)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6장 말씀은 예수님의 평지설교(눅 6:17-49)의 한 부분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5-7장)와 같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두 설교는 구조나 내용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가령 두 설교 모두 ‘축복선언들(the Beatitudes)’로 시작해서 ‘두 종류의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황금률’, ‘원수를 사랑하고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편 뺨도 대라는 명령’,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을 금하는 것’, ‘눈에 있는 들보와 티’ 그리고 ‘나무와 그 열매에 관한 생생한 예화’들은 두 설교 모두 다 들어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평지설교와 산상설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평지설교가 산상설교보다 훨씬 짧죠? 그리고 장소도 산과 평지로 다릅니다. 이러한 장소적 차이는 마태복음에서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였듯이, 마태는 모세보다 더 큰이가 산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또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고, 반면 누가는 평지라는 장소를 통하여 누가가 가지고 있는 삶의 자리를 반영함으로써, 가난하고, 힘없고, 병이 들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도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누가의 신학적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장소로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두 복음서 저자는 같은 자료(예수어록, Q)를 근거로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를 구성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자료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두 저자 자신들이 속해 있던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환경이나 상황, 그리고 성격들로 인해 기인하였을 것입니다. 같은 자료지만 그들 공동체에 맞게 확대, 축소, 삭제를 통해 변형을 꾀하다 보니, 두 설교의 구성에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손재호, 「산상설교와 평지설교의 유사점과 차이점」 참조).

물론 마태복음의 청자가 유대인이고 누가복음의 청자가 그리스-로마 문화권 사람들이라는 차이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산을 신성시하죠? 그리스-로마 문화는 아고라 같은 광장 문화가 발달해 있습니다. 따라서 평지는 아고라의 다른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문화권에 선포하는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같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복음과 상황’,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며 나아가 ‘텍스트와 컨텍스트’, ‘물음과 응답’으로도 읽어야 합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 역시 지난주와 지지난 주에 이어 계속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관점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이번 주 말씀은 이웃사랑에 필요한 참된 지혜에 관한 말씀입니다. 곧 사랑과 지혜가 주제가 됩니다. 지혜가 있어야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복음서 말씀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형제 눈 속의 티를 보지 말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고 합니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눈뿐만 아니라, 혀에 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곧 말과 혀의 능력과 혀의 위험한 점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사랑을 위한 참된 지혜와 총명은 선행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데, 이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를 통해 가능하다고 소개합니다. 그 결국은 화평하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과 화평, 이웃과 화평,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마지막으로 잠언 말씀은 위로부터 난 지혜를 진주보다 귀하다고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평지설교의 ‘눈에 있는 들보와 티’에 관한 말씀입니다.

2. 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 6:41-42)

우리는 대부분 칭찬에는 인색하고 욕하는 데는 넉넉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욕하는 데는 인색하고 칭찬하는 데는 앞장서야 합니다. 엔도 슈사쿠라는 일본 가톨릭 소설가의 작품을 매달 온라인 비대면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읽는 모임이 있습니다.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엔도 슈사쿠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죄와 구원을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 기독교와 다르게 해석합니다. 전통 기독교에서는 불순종과 교만을 죄로 봅니다. 그러나 엔도는 ‘타자에게 남겨놓은 흔적에 대한 무지’를 죄라고 봅니다. 상대방에게 의미 없이 던진 말, 행동 등등.

그렇다면 엔도가 생각하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구원은 이렇게 상대방에게 남겨놓은 흔적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아가 책임감을 느끼고 상대방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놀랍죠? 교리적인 접근보다 더 잘 이해되고 공감이 되는 분석입니다. 엔도는 이것을 소설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가령 『내가 버린 여자』(어문학사, 2007)라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인 내가 출세하는 데 도움을 줬던 여인(미츠)을 성공하고 난 후 버렸는데, 내가 버렸던 그 여인이 나에게 잊혔지만, 어느 날 그 여인의 존재를 깨닫고 내가 그 여인을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 때 그 사람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내용을 좀 더 소개해 볼까요?

태평양 전쟁 후에 대학생인 주인공 ‘나’가 그녀를 버린 이유는 비누공장에서 일하는 그녀가 너무도 보잘것없고 가난하여 ‘나’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단지 일회용 컵처럼 내 일회성 욕망을 소모하고 싶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일회용으로 자신을 필요로 했던 남자를 통해 자신이 유리컵이 되었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에게 바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그녀가 거추장스러운 호주머니의 쓰레기처럼 시부야역에서 버리고 맙니다. 나중에 미츠를 찾아 사창가로 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주인공 ‘나(의 내면의 목소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엔도 슈사쿠와 『내가 버린 여자』
‘이봐. 네가 그날 그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소리는 속삭였다. 
‘그 여자도 다른 삶을, 한층 행복하고 평범한 인생을 보냈을지도 몰라.’
‘내 책임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쓴다면 아무도 만날 수 없지 않은가? 매일 매일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그래. 때문에 인생이란 것은 복잡한 거야. 하지만 잊어서는 안 돼. 인간은 타인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서는 스쳐 지나갈 수 없는 거야.’
나는 흠뻑 젖으면서 빗속을 계속 걸었다. 마치 시부야의 그 날밤, 강아지처럼 뒤따라온 미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듯이….

엔도에 의하면 구원은 나에게 타자를 향해 행했던 폭력과 미움에 대한 ‘후회와 반성, 그리고 아픔’으로 다가오며 ‘나의 냉정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못 할 짓을 했구나. 저 사람이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행복했을 텐데, 나를 만나 많이 힘들었구나.” 이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선한 사람은 자신이 타자에게 남겨놓은 그 어떤 흔적에 관해서도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못된 사람은 마음에 그러한 미안함이 없죠? 뻔뻔하죠? 그리고 그 못된 마음이 못된 말을 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3-45)

3. 혀: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 혀의 중요성

타자를 눈으로 보고 입으로 비판하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책망인 이러한 평지설교에 야고보 사도는 좀 더 보충합니다. 구체적으로 혀에 대한 말씀이죠? 사실 인간은 언어를 습득함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됩니다. 말을 하는 데 꼭 필요한 혀는 그 사람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출구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혀와 말을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과 혀의 능력, 혀의 폐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3-16)

따라서 우리는 눈과 혀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참된 지혜, 곧 위로부터 난 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결과 화평, 관용과 양순, 긍휼과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편견과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이러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진주보다 귀합니다. 잠언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잠언 3장 말씀은 지혜에 관한 말씀입니다. 3단계로 지혜를 설명합니다. 제1단계는 지혜를 추구하는 방법과 지혜를 얻은 자가 누리는 결과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2단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지혜의 유익한 점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3단계는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지혜의 유익한 점들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2단계 말씀이죠? 지혜의 유익한 점을 소개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

4. 머리: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잠 3:13-20)

따라서 이러한 지혜를 잘 지키라고 훈계합니다.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네가 네 길을 평안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 3:21-26)

사실 잠언은 지혜문학에 해당이 됩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가 바로 지혜문학입니다. 이러한 지혜문학은 크게 보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처세술, 곧 세상살이에 관한 이치를 가르치는 잠언, 전도서와 같은 말씀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성찰, 곧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는 욥기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이것을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잠언은 처세 문학의 일종이기에, 이스라엘 사회가 오랫동안 보존하고 유지해 온 질서와 가치를 지혜라는 이름으로 전수합니다. 가령 부지런해라. 말조심해라. 성실해라. 뇌물을 조심해라 등의 실용적 가르침이 규범적으로 제시됩니다. 물론 문학이기에 특정한 화법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비교법(~가 ~보다 낫다)’, ‘비유법(~와 같다)’, ‘훈계(~하지 마라)’, ‘숫자를 활용한 수수께끼 식의 교훈’들도 있습니다(잠 30:18-28).

이렇게 다양한 문학적 화법을 통해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어른들이 앞으로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지혜문학, 특히 규범적 지혜인 잠언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좀 살아 본 어른들이 앞으로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내 아들아!”라고 하죠?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 6:39-40).”

잠언은 ‘정의롭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라는 충고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겠죠? 요즘에는 이렇게 살면 망한다고 눈을 흘기는 젊은이들이 많겠지만, 무엇이 옳은 삶인지에 대한 규범까지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젊어서는 성공과 출세를 위해 달음박질하는 삶이 좋아 보이겠지만, 결국 살아 보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내가 버린 여자』의 주인공 ‘나’가 깨달은 것이죠?

‘타자에게 남겨놓은 흔적에 대한 무지’가 죄입니다. 상대방에게 의미 없이 던진 말과 행동, 그리고 상대방 눈 속에 있는 티를 악착같이 보려고 하는 모습 등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상대방에게 남겨놓은 흔적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에 기초한 이웃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주제와 연결이 되는 잠언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잠 15:17, 새번역)”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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