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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지체가 된 거룩한 산 제물(신 26:1-11; 롬 12:1-8; 막 6:30-44)창조절 열 둘째 주일(11월21일) 추수감사주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11.19 01:43

1. 창조절과 한해의 마지막 추수감사주일

▲ 추수감사주일

오늘은 한해의 결실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또한 이번 주일은 삼위일체 교회력 창조절기의 마지막 날이죠? 지난 3년 동안 삼위일체교회력 세 본문 말씀으로 주일낮예배 말씀을 전했는데, 그 마지막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올해 처음으로 참여한 ‘2021년 다니엘 기도회’도 저녁 간증의 밤으로 끝이 나는데, 정말 귀하고 은혜로운 감사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기도에 반드시 필요한 낙타 무릎

다니엘 기도회 21일간을 참여하면서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는데, 먼저 신앙은 ‘낙타 무릎’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2~3시간 동안 앉아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게 인내하고 앉아 있다 보면 그 채워진 시간만큼의 인내가 생기고, 또 그 인내는 다시금 하나님 앞의 겸손과 신앙의 성숙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진득한 사람에게 진한 맛으로 우러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5달란트 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사명 5가지로 바꾸어 생각해보았습니다. 강사님들의 간증과 말씀을 들으면서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5가지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다시금 사명을 정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교회(는 물론 교인들도)가 안락한 보트(배)를 떠나 주님께서 부르시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풍랑이 불고 파도가 칩니다. 또한 물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만 의지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사회복지, 사회선교라고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잘것없는 자를 쓰셔서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봐도 그렇습니다. 아무튼 오늘 간증의 밤에 여러분만의 간증을 하나님께 올리시고 귀한 은혜의 밤으로 기도회를 마감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다니엘 기도회가 끝이 나고, 감사절인 추수감사주일로 창조절도 끝나고, 다음 주부터는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입니다. 교회력은 개정공동성서정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RCL)도 그렇고, 삼위일체교회력도 3년 주기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다음 주부터 다시 삼위일체력, 혹은 RCL을 새롭게 반복하기보다는 이번에 제가 만든 삼위일체교회력(최병학 목사의 공동성서정과, CCL, Choi’s Common Lectionary)으로 다음 주 대림절부터 주일낮 예배에 설교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지난 2021년 9월 코로나 자가격리 기간 중 하나님께서 집중할 시간을 주셔서 각 복음서를 중심으로 4년 동안 전체 신구약성서를 절기별로 세 본문으로 만들어 모두 다 살펴볼 수 있는 교회력을 만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CCL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전적으로, 곧 나무와 숲을 골고루 보시며 늘 말씀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추수감사주일에 맞게 감사가 주제가 됩니다. 창조절기를 끝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해 동안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리는 정말 창조절기를 끝맺는 피날레로 알맞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경작한 토지의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린 내용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산 제물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사대로, 또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고 충성되게 사명을 감당하라고 권면합니다. 창조절기를 매듭지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시금 생각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오늘 구약 본문 신명기 26장은 첫 열매와 십일조에 관한 규례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땅의 첫 소산물을 얻으면 그 첫 열매를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신 26:1-11) 둘째, 3년마다 모든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신 26:12-15)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첫 열매 규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신 26:1-4)

무슨 말씀이죠? 첫 수확물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져가라는 말씀이죠? 그리고 제사장에게 나아가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 감사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떠돌이 난민과 같았던 너희 조상, 강대국에 의해 학대당하며 괴롭힘을 당한 너의 선조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5-9)

그리고 그 감사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소산의 맏물을 구별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감사제를 지낼 때, 히브리 백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인은 물론,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레위인은 오늘로 치면 종교지도자이고, 거류하는 객은 떠돌이 난민이죠? 하나님은 이렇게 감사하는 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여 현재 그들과 같이 고통 받고 있는 이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말미암아 모두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 26:10-11)

3. 열두 바구니에 차게 가두었으며

이렇게 하나님은 땅이 없는 백성에게 땅을 주시고 또한 고통과 압제를 받는 백성을 구원하시고 감사의 축제를 즐기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제자들이 복음 사역하고 지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서 쉬라고 하셨으나 많은 사람이 제자의 뒤를 따릅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0-34)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며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육신을 가진 사람인지라, ‘말씀’만으로는 살기 힘듭니다. ‘빵’도 있어야 합니다. 날은 저물어 어두워 가고 있고 무엇을 사기에는 힘든 빈들에게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하겠습니까?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합리적인 방법으로, 또한 세상의 경제관념으로 질문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막 6:35-37)

그러자 예수께서는 합리적이고 세상의 경제관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대답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막 6:38-44)

▲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무리를 먹이심>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도, 레위인도, 그리고 모인 모두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것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눌 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죠? 감사로 나누면 차고 넘치는 놀라운 잔치 자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잔치 자리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4.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3주간에 걸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짤이 없다고 했습니다.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죠? 그러나 이웃 사랑에는 짤이 있습니다. 곧 제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원수사랑’이라는 말씀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이 두 가지를 헷갈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이죠? 그 배타성은 대부분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웃 혐오와 차별을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로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헷갈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순수성과 한민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난민이나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종교인에 대한 배타성이 강합니다.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죠? 하나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웃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2021년 10월 미국의 퓨리서치센터는 전 세계 주요 국가를 대상으로 ‘선진국의 다양성과 분열’이란 제목의 리포트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세계 주요 국가 국민의 정치·사회 갈등에 관한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 퓨리서치센터, ‘선진국의 다양성과 분열’ 리포트(정치적 갈등)

우리나라는 유럽이나 미국보다 인종·종교·도농 갈등이 비교적 적을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조사 결과 선진 17개국 가운데 ‘서로 다른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그룹 간에 매우 강한 또는 강한 (정치적) 갈등이 있다.’ 항목에서 한국은 1위입니다. 미국이 2위죠. 난민 문제로 국수주의가 판을 치는 유럽의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보다 훨씬 높습니다. 정치 후진국인 일본은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정치적 갈등이 적습니다. 세계 평균이 49:50인데, 우리는 9:91입니다. 이 리포트에 달린 작은 제목 중 하나가 ‘미국과 한국의 정치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정치 갈등이 인종, 종교, 도시와 농촌 간 갈등으로 확장이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지역 감정이었는데, 어느덧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같이 경쟁과 각자도생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모습을 객관적인 지표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미로슬라브 볼프, 『알라: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알라: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IVP, 2016)라는 책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을 위해 피해 가지 않고 핵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기독교(21억, 31%)와 이슬람(16억, 23%)은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믿는 종교로서 그 숫자와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종교 간 오해와 반감, 나아가 증오의 골은 깊고 결국 테러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종교와 평화의 종교가 만나 전쟁이라니요? 결국 신학 이론의 차이가 신학 전쟁으로, 실제 전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웃에 폭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별다른 것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이슬람권 음식인 할랄 푸드가 등장하고, 할랄 푸드 테마파크 조성 계획, 대구 북구 대현동 이슬람 사원 건축 반대 등. 일부 기독교인이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는 걸 막아야 한다며 ‘할랄 반대 기도회’를 여는 등, 이슬람에 대한 적대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종교 간의 이러한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때, 볼프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볼프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은 동일한 신을 예배한다.”

놀라운 말입니다. 충격적일 수도 있겠는데 아무튼 그 이유에 관해 볼프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신에 대한 다음 여섯 가지 주장에 관해 서로 동의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묘사(유일성, 창조주, 비교 불가, 선하심)’와 ‘신의 명령(신 사랑, 이웃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신은 오직 한 분이시다.
2. 신은 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창조했다.
3. 신은 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과 완전히 다르다.
4. 신은 선하시다.
5. 신은 우리의 모든 존재를 다해 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6. 신은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위 여섯 가지의 주장에 대한 동의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예배 대상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신을 묘사하는 처음의 네 조항은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예배하는 대상이 동일하다는 주장을 입증해 줍니다. 그리고 신의 핵심 계명을 집약하는 나머지 두 가지 조항은 이러한 주장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러나 결정적 주제가 되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와 신의 속성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따라서 볼프는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무슬림에 대해 이렇게 삼위일체를 옹호합니다. “삼위일체는 신의 ‘상호 내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독교가 여러 신을 믿는다는 이슬람의 이해는 틀렸으며 신적 본질은 절대 나뉘지 않는다.” 그리고 반대로 이슬람의 알라가 ‘폭력적인 신’이라는 기독교의 이해도 틀렸다고 말하며 ‘사랑의 신’이라는 신의 특성에 대해서 두 종교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유사성이 더 많다고 주장합니다.

볼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많은 자비’는 하나님의 본성이기에,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자비롭다. 친절함을 통해서든, 엄격함을 통해서든, 꾸란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는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까지도 하나님에게 돌아오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도 자비롭다고 볼 수 있다. 무슬림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동의하는 한, 기독교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이 문제에 대해 둘 간에는 상당한 공통 기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논거를 바탕으로 각각 다른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같은 신을 믿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볼프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볼프는 각 종교가 서로의 차이를 내세워 대립하고 배타하기보다는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놀랍지요. 복음주의자이면서 시대 상황을 읽어 낼 줄 아는 볼프만의 매력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은 이러한 생각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등장할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이 없고,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생각’이라는 것이 없는 오늘 한국의 개신교계에 볼프는 이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으로 볼프의 너무나 매력적인 말 한마디만 인용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유명한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라고 썼다(13:6). ‘차이점’ 접근을 따르는 이들은 불의를 기뻐하는 사람과 같다. ‘유사성’ 접근을 따르는 이들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상대방의 좋은 점은 보지 않고 늘 잘못만 지적해 대는 잔소리꾼 파트너인 데 반해, 후자는 너그럽고 지혜롭게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잘못에 눈을 감지는 않지만 잘한 일은 함께 기뻐해 준다. 기독교인은 무슬림이 신을 이해하는 방식 안에 혹 어떠한 진리라도 담겨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을 기뻐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하는 문제에 ‘유사성’의 접근을 시도할 때만 가능하다. 공통점에 초점을 맞추되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태도가 지녀야 할 동전의 양면이다.”

이렇게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몸을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의 비밀을 이야기해 줍니다. 서신서 말씀인 로마서 말씀을 볼까요?

5. 서로 지체가 된 거룩한 산 제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 서로 지체가 된 거룩한 산 제물

이 세대는 나와 다른 차이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온전하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종교의 차이로 서로를 구별하고 증오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그의 종교나 성격, 혈연이나 신분의 차이 없이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신 은사는 다르죠? 이것은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4-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지체가 된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서신서 본문인 교리 서신 로마서는 전반부에서는 교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지만, 후반부인 12-16장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성도의 의무, 곧 행함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 권면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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