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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감사로부터(사무엘하 6:21-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11.21 15:26
▲ Domenico Gargiulo, 「David Bearing the Ark of Testament into Jerusalem」 ⓒWikimedia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추수감사주일 설교 본문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만,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되찾아 왔던 시기, 그의 아내 미갈과 충돌했던 이야기를 통해서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우리가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은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서에 나타난 법궤 관련 이야기들은 법궤를 소홀히 대한 사람은 저주를 받고 소중히 대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신앙 위에 놓여있습니다. 역사가들이 법궤에 관해 이런 전승을 위주로 수집해놓은 것인지, 수집한 전승을 이런 흐름으로 수정한 것인지, 법궤와 관련해서는 이런 전승만 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점은 이런 전승이 깔끔하게 이어지지 않고 약간은 투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야 할 점이 많고, 이스라엘 역사에 비추어 생각해볼 때도 신경 써야 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읽으신 분들은 이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언약궤를 옮기는데, 언약궤를 옮기는데 블레셋과의 전투가 선행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무엘상 6-7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빼앗아 갔다가 재앙을 당하게 되고, 이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놓이게 됩니다.

기럇여아림이 블레셋 접경지였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렇게 배치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은 블레셋으로부터 이를 되찾아오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법궤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상징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행위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정치와 종교를 모두 집중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가져오는 과정을 보면, 처음 기럇여아림에서 법궤를 가져오기 위해 3만 명을 모았고, 법궤를 실은 수레 앞에서 여러 악기를 연주하면서 이동합니다. 이때는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고, 법궤는 오벳에돔의 집에 놓이게 됩니다.

언약궤를 가져오는 두 번째 시도가 첫 번째와 똑같은 인원이 동원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었고, 다윗은 에봇을 입고 춤을 췄다는 점을 봤을 때, 법궤를 수레로 옮기는가 사람이 직접 옮기는가의 차이만 있고 다른 점은 같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상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을 추고 뛰는 모습을 본 미갈은 마음속으로 그를 업신여깁니다. 20절을 보면 다윗이 많은 여성 앞에서 맨몸을 드러냈기 때문에 다윗을 비난한다고 이야기하는데, 16절에서 다윗을 업신여겼다고 말할 때는 다윗의 옷이 벗겨졌다는 언급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20절에 나타난 미갈의 말은 21-22절에 나타난 다윗의 말과 대조되며, 하나님 앞에선 자신을 다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이런 행위가 더 큰 신앙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남깁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법궤 설화의 중심 주제와 연결되면서, 다윗은 복을 받았고 미갈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미갈이 왜 다윗을 질책했는지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장면은 축제 형태의 제의를 연상시킵니다. 다윗은 법궤를 처음 여섯 걸음 옮긴 다음에 제사를 드립니다. 또 법궤가 준비된 장막에 놓인 후에도 제사를 드립니다.

법궤 옮기기를 마친 후에 다윗은 온 백성에게 축복을 선포한 뒤에 그들에게 먹을 음식을 나눠줍니다. 백성들은 이 음식을 받은 후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모습은 실제 다윗이 법궤를 옮겨왔을 때의 이야기라기보다, 법궤와 관련된 제의 축제가 있었고 역사가들이 그 모습을 본떠 다윗의 일화를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이 하나의 제의라고 본다면, 다윗이 에봇을 입고 제의를 주도하는 모습은 이상해 보입니다. 다윗이 제사장의 역할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 속에서 다윗과 미갈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보인 모습은 미갈이 가지고 있던 신앙과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미갈은 왕이 제의를 주제하는 모습에 불만을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또 다윗이 몸을 드러냈다는 점은 지금 시대에 생각하는 노출과 다른 의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의 중 열광적인 형태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옷을 찢거나 벗었을 수 있고, 미갈은 이런 신앙 행위를 지적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이야기에 다윗과 미갈의 갈등이라는 사실이 기반 되어 있다는 전제를 두었을 때, 그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무엘서가 보여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 둘의 반응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는 대척 중이었던 북왕국 세력을 제압했습니다. 가장 큰 적이었던 아브넬도 죽었고, 사울의 아들이자 북왕국을 계승한 이스보셋도 죽었습니다. 이후 다윗은 이스라엘 온 지파의 승인을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다윗은 자신의 망명을 받아들여서 국외도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입장에선 여전히 위협이었던 블레셋과 전투하여 승리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모두 제거한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법궤도 자신의 성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점은 지난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다 지파를 비롯한 남왕국이 법궤를 맡았던 적은 없습니다. 법궤는 북왕국 지역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종교적 상징물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 북왕국 지역의 제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으로 바꿉니다. 제의 중앙화를 이룬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차지한 이후 다윗의 모습은 그야말로 승승장구 일색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반면에 미갈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한 이후 미갈은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의 아내가 됩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배신했을 때, 다윗은 아브넬에게 미갈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사무엘하 3장에 나타난 이 장면은 상당히 암울해 보입니다. 이스보셋과 아브넬은 다윗에게 미갈을 돌려보내는데, 이때 미갈의 남편이었던 발디엘이 울면서 그녀를 쫓아갔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미갈은 발디엘과 행복한 부부 관계를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윗에게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8-19장에 나타난 미갈의 모습과 오늘 본문에 나타난 미갈의 모습은 완전히 극과 극의 대조를 보입니다. 다윗을 사랑하여 그의 도피를 도왔던 미갈의 모습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다윗을 업신여기며 퉁명스럽게 대합니다.

잘 살고 있던 삶을 빼앗긴 문제도 있지만, 미갈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신의 남매인 이스보셋이 죽은 상황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왕권도 모두 다윗과 유다 지파에게 빼앗겼습니다. 사울의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므비보셋은 다윗의 감시 하에 놓였습니다. 물론 사무엘하의 순서에 따르면 이 일은 한참 뒤에 이루어지지만, 실제 역사를 생각해 보자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왕위에 오른 직후에 그의 감시 아래 놓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미갈이 법궤를 무시하는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저주받아 자녀를 얻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일부에서는 다윗이 미갈을 데려온 이후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미갈은 사울 집안과 다윗을 연결시키는 상징적 인물일 뿐이지, 다윗이 그녀를 사랑했기에 되찾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윗은 한동안 다른 남자의 아내였던 미갈을 철저하게 외면했다고 해석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해보면 이런 해석이 더 그럴 듯 해보입니다.

미갈의 입장에 서서 봤을 때, 법궤가 예루살렘에 왔다고 해서 그녀가 기뻐하고 감사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절망과 괴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녀가 법궤 제의 축제 자체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였다면 함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 않았겠냐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감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보면 대부분 감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반대의 상황에서는 간구를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도 이런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우리가 어떠한 것을 얻었기에 감사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얻은 다윗은 감사의 제목을 가졌기에 감사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사는 무엇을 얻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 마음의 넉넉함이 있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상황이 나빠진 순간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모든 여유를 잃었을 때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셨고 그 평안이 있기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마음은 하나님과 나와 1:1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마음을 풍족히 채워주셨건, 내 상황을 좋게 바꿔주셨건, 무엇인가 물질적으로 채워주셨건 내게 무엇인가를 해주셨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보지 않고 자신이 얻은 것만 생각하고 이를 기뻐하며 감사하는 행위가 참된 감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갈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다윗을 향해 모진 말을 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다윗은 자신이 얻을 것 다 얻었다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모습이 제게는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은 당연한 신앙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했던 것처럼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와 복을 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감사할 수 있을 때, 여전히 감사할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기에, 평안이 없기에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얻었기에 감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얻지 못하기에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사회 구조 속에서 물질적인 측면을 보자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이런 이들을 위한 중보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을 가지고 있다면,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절기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이미 그 은혜를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은 내가 받은 것을 감사하는 절기를 넘어서 이제 주변을 돌아보며, 아직 감사하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는 삶을 다짐하고 그들을 위해 더욱 기도하고자 다짐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 혼자 기뻐하며 감사하는 절기, 우리끼리 즐거워하는 절기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이 기쁨과 감사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며 간구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가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일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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