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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폭력이 사라진 세상삶의 터전에서 시작되는 새 하늘 새 땅(이사야서 65:17~25)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1.11.23 19:48

오늘 우리는 성서에서 가장 장엄한 말씀의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곧 제2의 창조를 말하고 있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성서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역사상 희망을 고취하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오늘의 사람들에게 가장 뚜렷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 이사야 예언의 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받아들일까요? 오늘 현대인들이 중요시하는, 어떤 사회과학적 합법칙성 또는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명쾌하게 설파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 때문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구원에 대한 희망, 곧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 생명이 생명으로서 그 삶을 영위하는 길, 참 자유와 참 생명에 대한 갈망을 일관되게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과 믿음이 끊임없이 배반당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희망과 믿음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민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이스라엘의 건설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었지만, 그 꿈이 좌절된 상황에서 다시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아름다운 나라, 아름다운 겨레로서 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한 희망이 좌절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민으로 잡혀가는 쓰라린 경험, 그리고 그 포로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내적인 갈등이 끊이지 않고 그 갈등의 와중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겪는 공동체의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선포된 희망의 말씀입니다.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아예 좌절하고 절망에 빠지거나 혹 희망을 말하더라도 현실적 타협의 논리에 빠져 축소된 최소한의 희망을 기대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에서 그 희망은 오히려 증폭되고 근본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은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그 관심은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희망, 그 안에서 누리게 사람들의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희망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새 하늘 새 땅을 바라는 희망으로 확대됩니다.

본문말씀의 첫 대목은 바로 그 희망의 선포로 시작합니다. 주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라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피안의 어떤 세계가 아닙니다. 저 천당이 아닙니다. 천국이 뭐냐 하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천국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질곡을 넘어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피안이 아니라 바로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이 기쁨으로 가득 찬 도성으로 바뀌고 그 주민이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새 하늘 새 땅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터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그 백성의 즐거움이 하나님의 즐거움이 됩니다. 사람들이 부당한 이유로 고통을 겪지 않고 저마다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삶에 대한 희망은 더 생생한 표현으로 구체화됩니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라 합니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라 합니다. 그만큼 누구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여받은 삶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져야 하는 불행한 사태 없이 누구나 삶을 맘껏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삶을 삶답게 누리는, 삶의 기쁨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그 삶의 기쁨이 가능해지는 조건이 무엇일까요? 본문말씀은 매우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들어가 살고,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삶입니다. 그것은 더 분명하게 말해 자기가 지은 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심고 거둔 열매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착취가 없는 삶입니다. 소외된 노동으로 시달리는 일이 없는 삶입니다. 저마다 스스로의 생존조건을 갖추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기 땀의 결과를 맘껏 만끽하는 삶을, 자연 상태의 나무가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누리리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꿈꾸고 있는 희망입니까?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개발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채찍질하고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에는 탈아감을 느낀다.”(칼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수고>). 소외된 노동의 실상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소외된 노동, 빼앗긴 노동에서 벗어난 삶을 그립니다. 누구나 노동의 기쁨을 맛보고, 그 열매를 누린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헛된 수고, 소외된 노동의 고통이 사라지는 삶은 생명의 탄생 그 자체를 온전한 축복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고 그들이 나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명백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생일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어깨가 무거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꼬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하는 것 또한 기쁜 일임에 틀림없는데, 그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갖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그 걱정이 극단화된 지경입니다. 생명의 탄생의 기쁨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린 삶의 현실, 우리 사회의 극단적으로 낮은 출산율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단지 자기 자식 키우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생명을 돌보는 노동, 곧 돌봄 노동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노동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보람을 맛보는 세계에 대한 꿈을 본문말씀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생명의 탄생이 온전한 기쁨이 되고 그것을 돌보는 일이 온전한 기쁨이 되는 세계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꿈은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살고, 자기가 거둔 열매를 자기가 누리게 되는 삶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Opening of the seven-sealed book by the Lamb」 (1852-60년경) ⓒGetty Image

노동의 소외가 극복된 세계는 또 다른 한편으로 대화의 단절, 소통의 장애가 극복된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 때 인간은 온전히 하나님과 소통하며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 됩니다. “그들이 부르기도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하나님도 참 급하시지! 부르기도 전에 대답하시고 말을 마치기도 전해 다 알아서 해 주시다니요! 마음과 마음이 온전히 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통하면 말을 미처 다 하지 않아도 다 알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게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것을 동반합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알고 헤아려 주며, 서로에게 필요한 몫을 감당해주는 관계의 형성입니다. 아주 평범하게 말하면, 사람은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며 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천국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심리현상이 아닙니다. 저세상에서의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격변의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인간사회 안에서 그 행복한 삶이 이뤄진다는 것은 인간 삶의 평화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그렇게 평화로운 삶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모든 피조물의 평화로운 삶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위해 누군가를 해쳐야 하는 폭력이 사라진 삶입니다. 인간의 삶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폭력이 사라진 현실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피조물들 사이에서 일체의 적대가 사라진 세계입니다. 사회적 정의와 생태적 정의가 합일되는 세계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말씀의 원대한 꿈은, 오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의 전망과도 그대로 통합니다. 예언자의 직관적 통찰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서의 말씀이 여전히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이유입니다.

이 장엄한 꿈을 그리는 선포를 보고 심드렁한다면 과연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뛰어야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구원을 내적인 영혼의 세계에 몰아넣어버리고 천국을 저세상으로 내몰아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현실에서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성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가 어째서 세상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어째서 세상의 불의를 보고 지나쳐서는 안 될까요?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부여받은 이들이 서로 아끼며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피조세계가 각자도생의 아비규환으로 추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러기에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새로운 세계를 꿈 꿀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최선을 바라지 않고 차선에 자족해야 하고, 그것보다 더 후퇴해서 차악을 두고 발버둥을 쳐야 할까요? 국민의 종복이 잘못을 범하면 준엄하게 질타할 수 있어야 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매질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민의 대표를 뽑는 선거과정이 이 사회가 정말 잘 살만한 공동체가 되도록 전망을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는 일은 결여한 채 말장난으로 헐뜯는 것으로 일희일비하는 현실을 보자면 개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심각해진 우리 사회의 양극화, 빈부ㆍ세대ㆍ성별ㆍ노사ㆍ지역간의 격차와 차별을 넘어설 전망이 절실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이 절실한 때입니다. 단적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프랑스혁명 상황보다 높습니다.

누군가는 각성하여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꿔나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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