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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에 대하여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㊷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1.11.30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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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2일 영국 귀족원에서는 거의 8시간에 걸쳐 조력자살(assisted death) 허용 법안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조력자살은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린 이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조력자살은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death with dignity)나,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받지 않고 죽음에 이르도록 해주는 안락사(assisted suicide)보다 더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방식이지요.

영국은 1961년 법률로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조력자살을 금지했습니다. 위반할 경우 최고 14년 형에 처해질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몰리 미처 귀족원 의원이 ‘인구의 약 52%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의 마지막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있다. 조력자살은 그런 죽음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고 하면서 조력자살 허용법안을 제출했습니다. ‘18세 이상 성인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있고,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으며, 6개월 내 사망이 예상된다는 진단을 받았고, 2주간의 숙려 기간을 거치고, 의사 2명과 법원의 허가를 받을 것을 조건으로 한’ 법안입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이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뉴질랜드에서는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법률이 11월 6일부터 발효되었습니다. 세계에서 7번째로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최근에는 오스트리아 정부도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의사 2명의 상담을 거치고, 원칙적으로 12주간의 숙려기간을 거쳐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고 합니다. 그에 앞서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는 2020년 12월 11일, 조력자살금지는 헌법이 보장하는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결을 내렸는데,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판결에 따라 법안을 제출한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자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스위스가 1942년 처음으로 조력자살을 허용한 이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4개국에서 안락사나 조력자살을 법적으로 허용했습니다. 독일 헌법재판소도 2020년 2월 조력자살을 금지하는 법안은 위헌이라고 결정했으며, 포르투갈 의회도 같은 달 안락사, 조력자살을 합법화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2009년,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자기결정권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라고 판시하였고, 2021년 2월 현재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제19조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청구가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력자살과 안락사가 불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조력자살이나 안락사를 선택하기 위해 스위스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은퇴교수이자 크리스챤이고 과학자도 돈을 모아 후에 스위스에 가겠다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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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력자살, 안락사가 문제되는 것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는 불치병’에 걸려,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현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형태와 정체성으로 계속 살도록 강요받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현실 때문입니다.

사람은 존엄하게 살 권리도 있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사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디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의 마지막 단계를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치욕스런 부끄러움으로 상처받고 무너지는 자존심을 안고 맞이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 고령화, 불치병 등으로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고통을 받는 것이 피할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일이 되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혼자 사는 노인들, 부양할 자녀가 없는 가난한 노인들의 고통은 더 심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의료비용 가운데 3분의 1이, 죽기 3개월 전의 중환자들의 연명치료에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기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이 확실해도, 병원에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의료시스템의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시스템 안에서는 환자 자신에게 대부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존엄하게 죽을 권리와 자유를 의식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 전에, 의식이 있을 때, 스스로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조력자살, 안락사, 존엄사 등은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좋은 죽음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Gett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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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대부분의 유신론적 종교는 스스로 숙고하고 결단한 자기 생명의 자발적인 제거라는 의미의 자살을 신에 대한 죄이며, 벌 받을 행동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살을 죄라고 보지 않는 예외적인 종교적 전통도 있습니다. 스토익 철학자들은 치유 불가능한 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살을 할 경우, 정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살은 용기 있고 지혜로운 인간의 자기규정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칼 야스퍼스(K. Jaspers)도 억압과 파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되는 자살의 존엄성을 인정합니다. 인간은 존엄하게 살 권리도 있지만 존엄하게 죽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살이 - 정신분열을 제외하고는 -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까닭은 자살이 회개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거운 상처를 주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구원의 은총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적 인간, 특히 신앙인이 취할 마지막 선택이 아닙니다.

또한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생명이해는 인간이 살 권리만이 아니라 죽을 권리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게 합니다. 삶은 권리만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만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삶은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말하는 자살은 조력자살, 존엄하게 죽기, 즉 더 이상 육체적으로 존속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죽음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이가 들다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피할 수도 없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문제는 바로 하나,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 사람의 종말이 가까워 오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시점이 옵니다. 그러기 전에, 아직 우리 의식이 분명하고, 온갖 기계에 의존하여 고통스럽게 연명하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지, 미리 가족과 논의해야 합니다.

의사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봤고, 마침내 의사인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경험을 ‘현대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저서로 남긴(사진 6. 아툴 가완디의 책),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 아툴 가완디는 이른바 기술사회가 되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 대하여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죽음의 은총,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쓰러져, 의식도 없이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여, 온 몸이 망가져 죽기 전에,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감당하기 어려운 의료비용 문제로 가족과의 관계가 무너져 내리기 전에, 자신이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지 말해야 합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죽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시간이 영원에 잇대어 있다는 것, 우리 존재보다 더 크고 무한한 존재,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맞이하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존엄한 죽음일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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