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신 예수(욘 4:1-11; 히 7:11-22; 마 24:29-36)대림절 둘째 주일(12월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12.03 14:22

1. 대림절 촛불의 의미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회개와 평화의 촛불’을 밝힙니다. 대림절기에는 다섯 개의 초를 사용하여 순서대로 주일마다 불빛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밝힙니다. 이 촛불은 세상의 빛(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계시기 때문에, 초의 색깔이 점점 밝아집니다.

대림 첫째주일에는 진한 보라색 촛불을, 둘째주일에는 보라색 촛불, 셋째주일에는 연보라색 촛불, 넷째주일에는 분홍색 촛불을 밝힙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탄절에는 하얀색 촛불을 켭니다. 또한 대림절 4주간 네 개의 초에는 각각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첫째주일은 예언의 초, 둘째주일은 베들레헴의 초, 셋째주일은 목자들의 초, 넷째주일은 천사들의 초입니다.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 초는 베들레헴의 초로, ‘회개와 평화의 촛불’을 의미합니다. 다음 주인 대림절 셋째주일은 ‘사랑과 나눔의 촛불’입니다. 그리고 넷째주일은 ‘만남과 화해’의 촛불을 밝힙니다. 물론 첫째주일은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켰습니다. 따라서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 우리는 ‘회개와 평화의 촛불’을 밝히며, 우리의 잘못을 돌이켜 회개하고 아기 예수님께서 오셔서 만드실 평화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요엘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과 같이 오늘 대림절 말씀도 여호와의 날과 같은 종말의 말씀입니다. 물론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용서의 말씀도 있습니다. 이렇게 대림절은 아기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 재림하시어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서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시 오시겠다는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은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참으시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요나의 이야기죠?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제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심판을 유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고난과 박해로 인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히브리인들에게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님을 잘 믿고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인자의 오심은?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24장은 ‘세상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징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말세의 징조를 보여줍니다. 이때 거짓 그리스도가 출현합니다. 적그리스도죠? 이단들이 나타나 자신이 그리스도라, 메시아라 선포합니다. 둘 다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것은 물론, 물질적인 것, 정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을 현혹하여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최근 <부산행>(2016)으로 유명한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6부작 <지옥>(2021)이 황동혁 감독의 9부작 <오징어 게임>(2021)에 이어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사람들을 헛된 진리로 내모는 사이비 ‘새진리회’와 ‘화살촉’이라는 집단이 등장합니다. 결국 이러한 가짜 종교, 거짓 메시아로 말미암아 참된 예수님의 평화가 아니라, 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가짜 종교와 종교인들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또한 종말의 때에는 우리 인간이 창조 질서를 보전하지 않고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 자연재해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납니다.

둘째 징조는 이러한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대환난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셋째 징조는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 두 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셋째 부분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29-31)

▲ 인자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묵시문학적인 표현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묵시문학’이란 환란과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한 특별한 격려의 글입니다.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와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이 대표적인 묵시문학이죠?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묵시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이러한 묵시문학이 다루는 이야기는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지난주 요엘 말씀의 ‘여호와의 날’이 바로 심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묵시문학을 쓴 저자들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손길을 찾아내 문학적으로 다시 재현합니다. 개인적으로 묵시문학을 가장 잘 표현한 신학적 표현은 ‘신앙으로 다시 쓴 역사 판타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다시 썼다’라고 하죠? 또한 ‘판타지 형식’으로 다시 서술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나간 역사를 하나님의 심판과 개입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로 놀라운 환상의 이야기(판타지)로 다시 서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묵시문학은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요? 사실 묵시문학은 위기의 시기에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발견하게 합니다. 따라서 현실과 미래를 다시 해석하게 만듭니다. 물론 묵시적 판타지로 말입니다. 이것은 숨 막히는 현실에 위로를 주며 암울한 현재 상황에서 찬란한 미래를 소망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묵시문학은 말 그대로, 덮여 있던 휘장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사실 묵시(默示, Apocalypse)라는 말이 본래 ‘감춰 있던 것을 열어 보여준다’라는 의미인데, 묵시적 판타지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리고 있던 막을 열어주어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묵시문학이 보여주는 판타지적인 요소 하나하나의 신비하고 기적 같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문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묵시문학을 통해 우리는 종말의 때에 관해 구체적인 판타지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가 임했구나!’라는 생각으로 오늘 최선을 다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2-35)

여기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것은 예수님께서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세대는 예수님 당대 세대들입니다. 곧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2,00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걸까요? 앞서 말씀드린 묵시문학적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임박한 종말을 지연시킵니다. 베드로는 그 당시 재림을 기다리는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때와 그날을 알 수 없으니, 매일 매일 생명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종말이 임박한 듯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말씀하셨습니다.

3.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늘 심판을 미루십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 본문 요나서는 그 앗수르 사람들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보여줍니다.

▲ 다시스, 욥바, 니느웨

지도로 보면, 니느웨는 이스라엘 북동쪽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악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아마도 이때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므로 니느웨를 용서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요나는 자신의 사명을 내던지고 니느웨의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다시스는 오늘날 스페인 쪽입니다. 이스라엘의 서쪽에 있죠?

그러자 이렇게 불순종한 요나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죠? 일단 요나가 탄 다시스로 가는 배에 풍랑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원들에게 풍랑의 원인을 요나로 알게 하십니다. 결국 요나를 물속에 던져 넣으심으로 그의 혈기를 꺾으셨습니다. 그러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 죽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의 교만한 혈기를 꺾으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죠? 회개함으로 물고기 배 속에서 나온 요나는 이제 두 번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말씀대로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나의 경고로 말미암아 니느웨 사람들이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하며 회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시지 않고 화를 내며 낙심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나와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아무리 친해도 종교 이야기,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거나 종교가 서로 다르면 배척합니다. 아예 적으로 돌려버립니다. 일방적인 정보만, 편향된 소식만, 또한 자기가 용납하는 정보만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확증편향이 심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최근에는 잘못된 정보와 뉴스로 인해 이러한 현상이 더 심하죠?

오늘 요나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앗수르 제국의 니느웨 사람들은 모두 심판받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박넝쿨 사건을 통해 요나에게 하나님은 죄인들도 불쌍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바로 이러한 박넝쿨 사건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함으로 심판하지 않자, 요나가 화를 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욘 4:1-3)

하나님께서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혈기가 남아 있죠? 사람은 쉽게 안 변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욘 4:4)” 그래도 요나는 끝까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시기를 간구합니다. 요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 4:5)”. 독합니다. 요나!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교훈을 주고자 박넝쿨을 예비하십니다.

▲ 요나와 박넝쿨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욘 4:6-8)

성읍 동쪽 그늘에 앉아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요나는 해를 가리는 박넝쿨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내 박넝쿨이 시들자, 또 불평합니다. 전에는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죽겠다고 하고, 이제는 해와 동풍으로 인해 쪄 죽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끝마다 “~해서 죽겠다.”라고 하는데, 요나도 그렇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욘 4:9).” 요나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이후에 요나가 어떻게 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냥 말씀이 4장 11절로 끝이 납니다. 아마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요나는 투덜투덜 불평했으리라고 짐작이 됩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나의 혈기가 아니죠? 내가 이웃을 미워하는 그 나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가름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르면, 혹은 말씀대로 살다가 요나처럼 환난과 핍박이 오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에 나오는 히브리인들도 그렇습니다.

4. 의와 평화의 왕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사실 히브리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당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많은 유대인 성도들이 핍박을 받음으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어 할 때, 그들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교로 떠나가려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단계로 정진해 나가도록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교 체제보다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교급을 많이 사용합니다. 곧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천사와 그리스도, 모세와 그리스도, 아론 제사장과 그리스도, 율법과 그리스도가 그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이유는 천사들이 그분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보다 뛰어나신 이유는 모세가 그리스도로 인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론 제사장보다 뛰어나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단 한 번에 완전한 제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보다 뛰어나신 이유는 더 나은 새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유대교에서는 많은 것을 잃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히브리서 7장의 말씀은 아론 제사장과 그리스도의 비교입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을 가장 우수한 것으로 믿었는데,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더 우월함을 강조합니다. 즉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레위 족속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예루살렘과 연관이 있는 왕이며 사제입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쳐 존경을 나타냈을 만큼 성경에서,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중요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납치되었던 조카 롯을 구해낸 이야기에 나오죠(창 14장)? 여기서 멜기세덱은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떡과 포도주를 주고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대가로 전리품의 십일조를 주게 됩니다.

▲ 마에텐 드 보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

물론 멜기세덱은 고대 가나안의 이름으로 그가 왕으로 다스렸다는 ‘살렘’은 예루살렘일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을 ‘의의 왕’으로, 살렘을 ‘평화’로 번역하여 멜기세덱을 참된 ‘의와 평화의 왕’인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 말씀을 볼까요?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히 7:11-18)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과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예수님을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 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19-22)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더 좋은 언약의 보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 회개와 평화의 촛불을 밝히며 의와 평화의 왕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아기 예수님을 마음속 깊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요나서 말씀처럼 너의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며 이 불의한 세상에 참된 평화를 요청하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언약의 보증되신 예수님께서 마침내 구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언제 오실지는 모르나, 언젠가는 반드시 오실 주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며 오늘도 사랑과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