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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민주화운동이 왜 해외에서 더 강력했을까이삼열 박사와 “해외에서 함께 한 민주화운동” ⑴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1.12.05 16:16
▲ 해외에서 일어난 기독교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 이삼열 박사 ⓒ홍인식

이삼열 박사가 최근 『해외에서 함께 한 민주화운동: <기독자민주동지회>와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저서를 발간했다. 본서는 해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이다. 이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제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 시기와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도 해외 운동의 지원과 협력 없이 국내 운동만으로 지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동안 국내 민주화운동은 많은 연구 결과가 이루어졌고 다양한 저술과 기록이 나왔지만, 아직 해외의 민주화운동에 관해서는 제대로 된 보고서나 기록물이 나오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해외 민주화운동의 역할과 의미를 바르게 헤아려 보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삼열 박사는 자신이 수십 년 지니고 다녔던 당시 기록과 편지들을 토대로 해외 민주화운동의 한 축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에큐메니안에서는 한국 철학계는 물론 한국기독교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삼열 박사를 만나 이 책의 발간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 이삼열 박사님, 이번에 매우 유익한 저서를 발간하셨습니다. 특별히 70~80년대 해외에서 발생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에 대한 저서입니다. 그래서 이 박사님과 해외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또한 이 박사님의 자신의 삶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잠깐 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번에 발간된 저서에는 아주 귀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외의 민주화 운동을 다룬 것은 거의 최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삼열(이하, 이): 네. 물론 산발적으로 해외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다룬 글들은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독일·일본·미국을 통틀어서 해외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아마 이것이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미국의 경우에도 여러 도시로 나누어져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 벌어졌기에 이 모든 것을 통합해서 보고한 자료나 글은 없었습니다.

또한 조직별로 예를 들자면 한민통이라든지 국민연합이라든지 하는 곳에서는 자신들의 운동 자료들에 대해서는 소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통합적으로 자료가 수집되고 역사적 자료와 기록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고 보입니다. 산발적으로 기록들만 있었지 총체적으로 자료들을 가져다가 엮어서 쓴 건 처음이죠. 아마 모두들 그런 사실은 다 인정할 거예요.

그리고 그때 70년대 해외 운동을 주도적으로 하시던 분들이 2000년대에 와서 거의 다 돌아가셨기에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역사적으로 엮어낸다는 것이 힘들었다고 봅니다.

▲ 해외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오재식 선생님 그리고 강문규 선생님 등 몇 분의 자서전은 남아 있어서 어느 정도 당시의 이야기를 들여 다 볼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이 박사님이 발간하신 책은 그런 면에서 자서전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이: 네 맞습니다. 오재식 선생 혹은 강문규 선생 같은 분의 자서전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이 자서전 속에 기독자민주동지회에 관한 이야기를 한 두 페이지 정도 쓴 게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자민주동지회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이름과 자료가 아주 정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었고요. 자서전을 쓰신 분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전체적인 운동역사의 맥락과 활동에 대하서 파악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책 가운데도 해외에 다니면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그런 기록은 있는데 해외 운동이 어떻게 시작이 돼서 어떻게 모여서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 당시 왜 해외 운동에 대한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후대에 남기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이제 해외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발간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이: 그런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데에 있어서 시대적 환경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할 때는 바빠서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기록들을 안 가지고 있어요. 자료들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냥 모여서 성명서 작성하고 또 그에 따른 행동을 기획하고 헤어지고 그 다음 또 모이고 그렇게 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모임에서 저를 기록자로 임명을 해가지고 제가 보고서를 늘 써야 했고 다음 회의 때 보고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5년 동안의 기록, 다시 말하면 1975년, 76년, 77년, 79년에서 81년까지 보고서를 전부 제가 썼거든요. 그걸 또 제가 다 소지하고 있었고 보고를 하려니까 회의 내용을 모두 노트에 기록해야만 했었지요. 그래서 이 시점에서 내가 이 기록을 정리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냥 묻혀버리고 말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자료수집정리를 통하여 역사책을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이 기록을 보면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한국 기독교의 진보적인 인사는 거의 다 들어가 있잖습니까. 박형규 목사, 김관석 목사, 이우정 선생, 문익환 목사 등등. 그리고 이분들이 유신 체제에 반대해 박정희 정권 무너뜨리고 또 전두환을 무너뜨리는 민주화 운동의 주역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기독교 운동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끌어나가는 그 중심체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기독교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흐트러지고 사회에 알려지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합니다. 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도 민주화 운동 역사의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 측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록에는 민주수호 국민협의회가 있었다든지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있었는데 그 조직에 ‘김재준 목사를 비롯한 몇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정도의 기록이 발견됩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기독교적인 색깔을 기록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아 이건 안 되겠다. 역사 속에서 우리 기독교가 어떻게 참여해서 어떤 식으로 했느냐의 역사적 기록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기독자민주동지회가 중심이 돼서 민주화 운동이 움직여진 역사를 밝혀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조직한 운동에 대해서 그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을 느꼈던 것이지요.

당시 기독자 민주동지회의 경우에는 국내는 김관석, 박형규, 강문규, 이우정, 문익환 목사 등이 주역이었고 해외에서는 당시 저와 장승환 목사가 독일에 있었고 오재식 선생과 김영관 선생 그리고 이인아 목사가 일본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는 이승만 목사 그리고 캐나다의 이상철 목사 등이 있어서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게 되었고 민주화 운동을 국제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삼열 박사는 특별히 해외민주화 운동에 대한 집필의 이유와 사명에 대해서 그 자신의 저서 보도자료를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근에 독일을 방문하여 옛 친구들과 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선후배 동지들을 만나면서 더욱 절실해졌다. 나와 마찬가지로 70대 노인들이 된 옛 동지들 혹은 60대의 후배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과 자녀들을 만나면서 이분들의 수고와 업적, 민주화를 위한 헌신이 기록되고, 후배와 자녀들에게도 알려지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함께 활동했던 일부 인사들의 북한 관련 사실 때문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민건 동지들의 순수성을 밝히기 위해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밝힌다.

▲ 이삼열 박사가 해외에서의 기독교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담아 출간한 책 ⓒ홍인식

▲ 저도 이 책을 읽어보면서 자료가 풍부하고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나가서 아주 읽기도 쉽고 재미있었습니다. 

이: 읽기 쉽고 재밌죠? (웃음) 이번에 발간된 책은 회고록입니다. 학술 서적을 쓰려는 게 아니고. 그래서 그냥 있었던 그대로를 갖다 이야기를 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써 나갔습니다.

▲ 해외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특히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집니다. 유독 기독교인들이 민주화 사상이 투철해서 그런 것일까요?

이: 사실 해외 민주화 운동은 물론 국내에서도 기독인들이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였습니다. 저의 짧은 생각이지만 해외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주로 기독교인들이 기둥이 되었습니다. 홍 목사님도 해외 생활을 해 봐서 알겠지만 해외 교포들이 모일 수 있는 조직으로 유일한 것이 교회지 않습니까.

당시 한인회가 있었지만 그 단체는 대사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찌 보면 관변단체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부에 기대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로 한인회에 참여하고 있었고 따라서 반정부 민주화 운동을 한인회를 중심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독일이나 한인회에는 항상 대사관 편에 섰으니까요. 그리고 오히려 반독재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고 그걸 적대시하고 그랬습니다. 물론 해외에서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도 민주 의식을 가지고 반정부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사람들이 있었지만, 조직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래도 조직을 할 수 있는 틀거리를 가지고 있었고 목사회가 있고 하니까 미국에서 기독인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독일에서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했습니다. 그 이전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먼저 2~30명이 모여서 가지고 먼저 바일슈타인 선언을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힘을 얻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유신이 선포되고 학교도 문 닫히고 언론 기관도 그냥 통제당해서 기자들도 쫓겨나고 교수들도 해직당하고 그러다 보니 힘이 없어져서 저항을 못 했잖아요. 그런데 그래도 제일 조직적으로 저항을 한 건 기독교 세력이었거든요. 기독학생회라는 게 있었고 그 다음에 도시산업선교회라는 게 있었고 NCC라는 조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관과 조직들이 있었고 그 기관의 중심인물들, 김관석 목사라든가 박형규 목사라든가, 또 기독청년 학생 운동을 하던 황인성, 서경석 이런 사람이 들고 나오니까 교회가 그 사람들을 지원하고 인권 보호 운동하고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반 독재운동의 중심 무대가 돼 갔거든요.

이런 모습을 본 우리들이 “우리가 그럼 해외에서도 이거 연대해서 하자. 그렇게 해서 이 힘을 길러줘야 독재를 무너뜨리는 거 아니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외 기독자들이 뭉칠 수 있는 하나의 동지적인 결속으로서 조직된 것이 기독자민주동지회죠. 처음에는 ‘민주사회 건설 세계협의회’로 불렸다가 그 후에는 ‘민주화 운동 세계협의회’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77년 뉴욕 회의를 거치면서 ‘기독자민주동지회’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이렇게 활동을 하고 WCC나 독일 교회 그리고  미국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원금으로 국내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곤 했지요. 그래서 사실은 국내 운동을 키운 게 해외 기독교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세계교회의 후원으로 그 돈을 가지고 해직된 사람도 돕고 심지어는 동아일보 기자들이 100~200명 해직 당해 쫓겨났을 때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한 달에 5만 원씩이라도 주자고 의견을 모아서 모금을 했습니다. 기억으로는 열한 번 보냈어요. 독일 교회 인권센터 거기서 또 수십만 달러씩 보내고. NCC 인권위원회가 그 돈 받아 가지고 기자들 살리고, 해직 교수들 살리고 구속 학생들 가족 돕고 변호인 하고 그런 역할을 쭉 한 거죠.

그러니까 해외의 지원이 없으면 국내에서 원활한 활동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의미에서 해외 기독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잘 모르고, 또 아는 사람들도 별로 인정을 안 하고… 그리고 막상 후일 귀국한 해외 기독인들도 이 일에 대하여 내세우지 않고 다들 돌아와서도 별로 그렇게 자기 얘기들 안 했어요. 저도 몇 십 년 동안 얘기 안 하고 있었잖아요. 해외에서 뭘 했다든지 이런 거를. 그런데 이게 다 잊혀져 버리고 이렇게 되니까, “아,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 저도 80이 되가지고서야 이런 기록을 해서 이제 남기려고 책을 출간하게 되었지요.

이 해외 운동이 없었으면 국내 운동이 이렇게 전개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지하 씨 사형 선고 받았을 때, 구명운동을 밖(해외)에서 그렇게 안 했으면 집행이 됐을지도 몰라요. 죽어라하고 했으니까. 그래서 빌리브란트 서명 받고 무슨 무슨 클럽회장 서명 받고, 뭐 유명한 사람들 다 만나보고 호소했지요. 워싱턴을 방문해서 국무성 찾아가서 맥가반도 만나고 국회의사당 찾아가고 그랬습니다. 고 이승만 목사랑 같이 가서, 키신저에게 압력을 넣도록 하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 당시의 키신저가 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는 “National Security is more important than Human Rights in Korea (지금 한국에서는 인권보다도 국가안보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답을 들으면서 우리가 ‘말이 안 된다. 인권이 우선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해외에서 더욱 가열 차게 투쟁 했습니다. 저는 믿기로는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세계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내 인권과 민주화 운동은 해외 운동에 지대한 빚을 지고 있고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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