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 총선을 통해 새로 구성된 독일 연방 정부 각 정당의 의석수 ⓒhttps://www.deutschland.de/en/2021-bundestag-elections

독일 유학 생활을 할 때, 독일 정치는 필자의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 독일 연방의회에서 세제 개혁을 둘러싼 시민사회와 사회단체의 의견이 수렴되고, 입장을 달리하는 정당들 사이의 논쟁이 오랫동안 벌어진 뒤에 정치적 타협을 통해 조세 개혁안이 만장일치로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치는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라고 여기게 되었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면 직업 정치인의 길을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독일의 정당정치와 책임정치가 필자에게 준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최근에 독일에서 사회민주당, 녹색당, 자유민주당 사이에서 연정 협약이 체결되어 새 연방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독일정치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의 정당정치와 책임정치

오늘 (12월 6일) 독일에서는 새로운 연방정부가 들어섰다. 지난 9월 26일 연방 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실시되고, 10월 26일 연방의회가 구성된 뒤에, 12월 6일이 되어서야 연방정부가 출범하였으니, 총선부터 새 연방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70여 일이 걸린 셈이다. 총선에서 유권자의 25.7%의 지지를 받아 제1당이 된 사회민주당은 녹색당(득표율 14.8%)과 자유민주당(득표율 11.5%)을 연정 파트너로 끌어들여 연합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약 두 달간 진행된 협상을 통해 세 정당은 지난 11월 24일 연정 협약에 합의하고 새 정부를 이끌어가는 연방 수상과 각 부 장관들을 배분했다.

독일 총선이 끝나고 한참 지났는데도 앙겔라 메르켈이 계속 독일 연방 수상으로서 국제회의 등에서 독일 정부를 대표하여 활동하는 것을 보고서 많은 사람은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독일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총선에서 제1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 곧바로 새 정부가 들어서지만, 1969년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CDU/CSU) 정권이 사회민주당(SPD)와 자유민주당(FDP) 연정으로 교체된 뒤로 다당제 국가인 독일에서 제1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제1당이 연정 파트너를 구해서 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연정 협상을 통해 새 정부 구성이 끝날 때까지 전임 수상이 수상 대행의 지위를 갖고서 정부를 이끌어갔다. 그러니까 메르켈은 10월 26일 연방의회가 새롭게 구성된 이후에는 약 40일 동안 연방 수상이 아니라, 연방 수상 대행이었던 셈이다.

독일의 정당들은 사회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가치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이념적으로 분화되어 있다. 지난 16년 동안 집권한 메르켈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이 경제성장과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중도우파 정당이라면, 이번에 연방 수상을 배출한 사회민주당은 사회적 연대와 분배를 앞세우는 중도좌파 정당이고, 녹색당(Bündnis 90/Grüne)은 생태계 보전과 페미니즘을 대변하는 진보적인 정당이며, 자유민주당은 자유와 법치를 신조로 내세우는 보수 정당이다. 지난 2017년부터 독일 연방 의회에 진출한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은 독일국민의 정체성을 앞세우며 반이민법을 주도하는 극우 정당이다.

독일의 연방의회 선거법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독일 연방의원 선거는 의원의 절반가량을 소선거구에서 직접 선출하고, 나머지 절반가량을 정당 명부에 따라 선출한다. 독일 연방의회의 의석은 먼저 정당별 득표에 따라 정확하게 배분되고, 그다음에 정당별 의석에서 소선거구 선출 의원의 수를 뺀 나머지 수효의 의원을 정당 명부에 기입된 순서대로 채워 넣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선거 제도는 정당들의 정책 대결과 경쟁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가치와 이해관계를 가장 잘 대변하는 정당을 선택하여 투표하면, 그들의 정치적 의지가 연방의회의 의석 배분에 정확하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둘째, 독일 연방의회 선거법은 지역구에서 3석 이상을 차지하지 못하거나 정당득표율이 5%를 넘지 못하는 정당이 연방의회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봉쇄한다. 그러한 정당은 연방 차원에서 국민을 대표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러한 선거법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소수정당들이 난립하여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고 결국 민주주의 공화국이 붕괴하였던 뼈아픈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련되었다. 그러한 연방의회 선거법의 두 가지 특징 때문에 연방의회가 구성될 때마다 총 의석수는 조금씩 변동한다. 의회에 진출한 정당들만을 중심으로 득표율을 다시 계산하여 총의석을 배분하면서 치수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방의회 선거법은 독일에서 정당정치와 책임정치를 활성화했다. 정당정치는 각 정당이 그 정당의 강령과 정책에 호응하는 유권자들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의회에서 대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의회에 진출한 정당들은 그들이 대변하는 지지자들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서로 협상하고 타협하면서 국민의 이익을 최대한 실현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그것이 정당정치의 요체이다. 그러한 정당정치는 정당의 지지자들에게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만일 유권자들이 지지 정당의 성과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다른 정당이 그들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더 충실하게 대변한다고 생각한다면, 지지 정당을 바꿈으로써 의회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키고 정부를 새로 구성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연방의회 선거는 각 정당이 자신의 정치적 결정에 따르는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힘을 갖는다.

연정 협약

연정 협약은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연정 파트너가 된 정당들이 새 정부의 노선과 과제에 관한 합의를 담은 문서이다. 연정 협약은 새 정부의 통치를 규정하는 가이드라인이며, 정부를 구성하는 각 부서의 과제와 중점사업을 명시하는 헌장이다. 연정 협약은 연정을 구성하는 정당들을 구속하는 힘을 갖는다. 만일 연정을 구성하는 어느 한 정당이 연정 협약을 깬다면, 연정은 붕괴된다. 그 경우, 연정 파트너들을 새로 조합하여 새 연정을 꾸리거나, 의회를 해산하여 다시 선출해야 한다. 의회 해산 결의를 한다고 해도, 총선을 실시하고 새로 정부를 구성할 때까지는 기존의 연합정부가 대행체제로 활동한다. 본래 대행체제는 내각이 불신임을 받을 때 무정부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인데, 그것이 바로 건설적 불신임 제도이다.

연합정부를 규율하는 연정 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까다롭다. 연정 파트너를 이루는 정당들이 서로 다른 전통, 서로 다른 가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정당들을 하나로 묶어세우는 공통의 상황 인식, 새 정부의 목표에 대한 공통의 입장, 새 정부의 과제들과 그 우선순위에 대한 공통의 견해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한 공통기반을 마련한 뒤에는 정당별로 수백 명의 전문가가 나서서 정부 과제에 대한 초안을 작성한다. 그 초안들은 연정 협약 준비위원회에서 치열한 논쟁을 통해 가다듬어져서 마침내 연정 협약 초안이 마련된다. 각 정당 지도부가 그 초안을 승인하면, 그 초안은 연정 협약 안이 되어 각 정당 최고의사결정 기구 혹은 그 기구의 위임을 받은 위원회에서 인준을 받은 뒤에 공식적인 연정 협약으로 공포되고, 그 연정 협약에 바탕을 두고 새 정부가 구성된다. 이러한 연정 협약 체결 과정은 고도의 정치적 과정이고, 그 요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정치적 토론을 통한 타협과 합의이다.

연정 협약에 합의하는 과정은 연방정부의 수상직과 각 부 장관직의 배분에 대해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기도 했다. 새 연방정부 수상은 연정을 주도한 사민당의 연방 수상 후보가 맡았고, 사민당은 노동사회부 장관,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등 일곱 개의 장관직을, 녹색당은 외무부, 경제 및 기후보호부 장관을 위시해서 다섯 개의 장관직을, 자민당은 재정부, 법무부 장관 등 네 개의 장관직을 맡았다. 연방정부의 장관직이 정당별로 배분되면, 누가 장관직을 맡는가는 장관직을 배분받은 정당이 내부 논의를 통하여 결정한다. 연방수상이 위에서 아래로 권위주의적으로 장관을 지명하는 일은 없다. 연정에 참여하는 정당들이 정당 민주주의의 틀에서 아래로부터 장관을 지명하는 절차를 진행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장관직 명단을 받아들인 새 연방수상 후보 올라프 숄츠는 “장관직이 어떻게 배분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새 연방정부의 목표와 과제 설정

이번에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 등이 체결한 연정 협약은 ‘자유와 정의와 지속가능성을 위한 동맹’에 바탕을 두고 “더 많은 진보를 감행하자!”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 목표 아래서 새 연방정부는 독일이 직면한 다섯 가지의 큰 도전에 대응해서 다섯 가지의 큰 과제를 설정했다. 그 과제들은 177쪽에 달하는 연정 협약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아래서는 그 과제를 간략하게 정리한다.

첫째 과제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면서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기후보호는 자유와 정의와 지속가능한 복지를 보장한다.”는 것이 새 연방정부의 시대 인식의 축점이다. 그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새 연방정부는 경제 기획과 기후보호를 한 부서의 과제로 통합하여 ‘경제 및 기후보호부’를 설치하고 그 장관직을 녹색당에 맡겼다.

둘째, 새 연방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공세로 인해 침식된 사회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사회보장을 확대하는 것을 과제로 설정한다. 신자유주의적 사회국가 개혁의 핵심인 ‘노동연계복지’를 제도화한 ‘하르츠 4’ 제도를 폐지하고 기본보장을 ‘시민수당’의 형식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그 과제의 핵심이다. 최저임금을 시간당 9.82 유로(약 12,900 원)에서 12 유로(약 16,100 원)로 인상하는 것도 사회정책의 주요 목표들 가운데 하나로 설정되었다.

셋째 과제는 디지털 혁명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와 국가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국가가 기본법(독일 헌법)의 국가 채무 규율을 준수하면서 기후보호, 디지털 인프라 구축, 교육과 연구 분야에 방대한 공적 투자를 주도하여 민간 투자를 자극하고 기업이 모험을 감행할 공간을 넓혀서 성장의 동력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넷째 과제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고,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제도적으로 구현하고, 성 소수자 차별을 위시하여 온갖 차별과 혐오를 근절하고, 독일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이민 국가가 된 현실에 부합하도록 가족법으로부터 이민법에 이르기까지 법률규범을 현대화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해서 연정 협약에서 눈에 띄는 것을 몇 가지 꼽아본다면, 개인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입증하지 않고 임의로 자신의 성을 신고할 자유를 보장하여 성 소수자의 권리를 신장하고, 성전환을 위한 의료비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정부가 법률에 따라 허가한 매점에서 대마초 판매와 소비를 합법화하기로 한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다섯째, 새 연방정부는 유럽과 세계에서 독일이 “평화, 자유, 인권, 민주주의, 법치국가, 지속가능성 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과제로 설정했다. 연정 협약에서 그러한 헌신은 “성공적이고 신뢰성 있는 외교정책의 포기할 수 없는 일부분”이라고 명시되었다. 그러한 외교정책 노선은 독일이 유럽을 하나의 집으로 통합하는 중추 국가의 위상을 갖는 데 그치지 않고, 서방 세계의 가치동맹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이 앞으로 격화될 중국과 미국의 패권 다툼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는 지켜볼 일이다.

새로 출범하는 독일 연방정부의 연정 협약 목록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설정한 구체적인 과제들이다. 사민당-녹색당-자민당의 연정 협약은 1) 2038년까지 유지하기로 했던 석탄발전소의 운영을 2030년까지 조기 종료하고, 2) 2030년까지 재생가능한 녹색 전력 공급을 총 에너지 수요의 80%에 이르도록 상향 조정하고, 3) 산업혁명 이전보다 대기 온도를 1.5도 상승으로 제한하는 탄소 중립 실현을 2050년보다 훨씬 더 앞당기기로 했다. 2022년 말까지 원자력 발전소의 폐쇄를 결정한 독일에서 탈탄소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실험은 세계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기획이다.

우리도 정당들의 정책 대결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열어나가자

필자는 독일 정치가 정당들의 정책 대결과 정당 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 정치도 정당정치와 책임정치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대뜸 독일과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 사회정치적 발전 수준의 차이가 있어서 독일 정치를 우리의 모델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이 뒤따른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독일 정치의 발전 과정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독일의 정당정치와 책임정치는 인류에 대한 죄를 저질렀던 히틀러의 파시즘 체제의 경험을 청산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히틀러 독재체제 이전에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이 있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는 민주적인 세력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불안정한 정치 체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에 독일을 지배한 것은 왕권신수설에 바탕을 둔 황제제국 체제였다. 그 체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왕권에 대한 신민의 충성심과 종교적 신심의 결합에 바탕을 둔 권위주의적 체제였다. 독일은 봉건제의 유제로 인해 지역적 분열이 심하고, 가장 비극적인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을 치를 만큼 종교적 분열이 심하고, 산업화 이후 사회적 분열도 극심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갖는 독일에서 정당정치와 책임정치가 자리를 잡고 건전한 정치가 발전한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정치는 정당정치의 본령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책임정치의 참모습을 보여 주지도 못하고 있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펼쳐지는 정치적 풍경은 지극히 퇴행적이다. 검찰개혁에 정면으로 맞서며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마치 복수의 화신이나 된 듯이 정권 교체를 구호로 내세우며 지지세력을 결집하는가 하면,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는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동안 내세웠던 주요 정책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더 많은 지지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만 보이고, 그들이 속한 정당들에서는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정파들의 이산집합이 부산할 뿐이다. 정당이 나서서 한국 사회와 국가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우리 사회와 국가의 발전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제들을 제시하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들이는 정치 행위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 마디로 정당정치는 쪼그라들었다.

시민들이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1987년 체제가 들어선 이래 절차적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껏 정당정치가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1987년 체제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보수적인 기성 정파들 사이의 타협에 따라 직선제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를 골자로 구축된 1987년 체제는 민중 부문을 정치적으로 소외시키는 정치 체제였다. 정치 엘리트 세력과 민중의 분리를 전제로 한 1987년 체제에서는 정당이 계급, 성별, 연령, 지역, 정체성, 가치관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된 시민들과 사회세력들의 이해관계와 요구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정당이 오랫동안 유력 정치인을 둘러싼 붕당체제에 머물러 있어서 정당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못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정치적 결사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정당을 조직하고 민주적인 토론과 의사결정을 통해 정강과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이 없다 보니, 정당은 유력 정치인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거나 선거용 조직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두 가지 요인들이 서로 얽히면서 한국 정치는 정당정치와 책임정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정책을 중심으로 한 정당들의 의견 투쟁과 지지자 결집이 있어야 할 곳에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인신공격과 정쟁, 지역주의적 선동과 양분법적 진영 논리가 들어섰다. 그러한 정치 행태는 민주주의 정치를 전진시킬 수 없다. 민주주의적 정당이 어떻게 선거 때만 되면 외부인사를 끌어들여 당의 간판으로 삼는 일을 버젓이 자행할 수 있는가? 정당의 조직과 발전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은 사람을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정치가 직접 민주주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대의 민주주의 제도의 틀에서 펼쳐지는 한, 정당정치와 책임정치는 건강한 정치의 제도적 기반이다.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는 마당이니,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진영을 구축하고 진영 간 대결을 유리하게 이끄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화급한 과제가 되어 있어서 건강한 정치의 가능성 조건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 한가한 이야기처럼 들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87년 헌법 아래서 치러진 역대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되짚어 본다면, 정치개혁의 과제는 이번 대통령 선거의 핵심 화두가 되어야 한다. 대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힌 대통령 후보들은 그런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이제는 유권자들이 다른 정치를 꿈꾸고 그것을 요구해야 한다.

강원돈(길마루글방지기/민중신학과 사회윤리)  kwdth@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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