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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노를 오래 품지 않고 셀 수 없는 무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미 7:14-20; 계 7:9-17; 마 25:1-13)대림절 셋째 주일/성서주일/인권주일(12월1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12.10 15:19

1. 대림절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도 됩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목자들의 초인 ‘사랑과 나눔의 촛불’을 밝힙니다. 누가복음 2장 말씀을 보면 아기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천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눅 2:8-10). 그 기쁜 소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눅 2:14)”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땅의 평화는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요? 바로 사랑과 나눔이 있을 때 가능하겠죠? 아기 예수께서 오셔서 만들 세상의 평화입니다. 이렇게 이 땅의 평화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쁜 소식을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께서 계신 베들레헴까지 가서 보고 전합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셔서 만들 사랑과 나눔의 세상, 곧 평화의 세상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과 나눔이 성서의 핵심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성서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말씀에 기반 해야 하고 나눔에는 인권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권리인 인권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기반으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나눔의 촛불을, 곧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에는 평화가 되는 목자들의 초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렇게 평화의 세상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를 비교하죠? 물론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 잔치 자리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평화의 세상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어린양 보좌에 나갈 수 있는 이를 단순한 숫자 14만 4천 명, 곧 준비된 지혜로운 다섯 처녀만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4만4천의 의미는 ‘셀 수 없는 큰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구약 미가서 말씀을 통해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실을 베푸시며 인애를 더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허물을 품어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대림절의 참다운 의미입니다.

이렇게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기간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되는 대림절은 주 후 4세기경 초대교회에서 지키기 시작했는데, 7세기 후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 고전 16:22b)”라는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불순종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신다는 소망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림절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도 되는 것입니다.

2. 천국 비유 세 가지

국민 MC유재석의 ‘유니버스’처럼, 지난주에 간략하게 언급했던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2021)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세계관을 ‘연니버스’라고 합니다. 이 연니버스, 곧 연상호 월드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공포심’입니다. 가령 연상호 감독의 영화는 늘 초자연적 현상이나 오컬트(Occult)에 의한 공포를 조장하죠? 오컬트 영화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현상이나 그런 기술을 소재로 삼은 영화를 의미합니다. 아무튼 연니버스에는 이러한 신비한 현상과 공포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연니버스의 세계관입니다.

▲ 연상호 감독의 영화

가령 애니메이션인 <서울역>(2016)에서 애타게 딸을 찾던 인물은 아빠를 사칭한 사창가 포주였습니다.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굉장한 공포입니다. <부산행>(2016)은 어떤가요? 자신이 살고자 좀비 떼에 다른 사람을 떠미는 이들 역시 공포로 인해 아수라장에 빠진 사람들의 이기심이었습니다. <반도>(2020)의 경우, 좀비 떼로 인해 황폐해진 서울 시가지를 지배하는 것은 631부대 군인들의 광기였습니다. <염력>(2017)은 또 어떤가요? 용역 인부들과 공권력이 서민을 공포로 내몰고 그 재개발 지역을 아수라장으로 만듭니다. 특별히 <지옥>은 종교단체인 ‘새진리회’의 사기극이 사람들을 공포로, 사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죠?

그렇다면 이러한 연니버스를 새롭게 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드라마 <지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택시 기사의 음성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신이 어떤 놈인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공포로 말미암아 아수라장으로 변한 세상의 책임을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리죠? 연상호 감독의 해결책입니다. 어쨌든 인간이 만든 공포는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해결책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의 해결책은 다릅니다. “신이 인간이 되셨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들이 제대로 알아서 못하니, 신이 인간이 되시어 제대로 된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대림절 아기 예수의 오심은, 바로 이러한 인간이 만든 ‘지옥’을 인간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서 본문 마태복음 25장은 ‘천국비유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의 종말과 연결이 됩니다. 천국비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열 처녀 비유(마 25:1-13)’로 천국을 준비하는 신앙, 둘째는 ‘달란트 비유(14-30)로 충성하는 신앙, 셋째는 양과 염소의 비유(31-46)인 ‘구원 신앙’입니다. 또한 동시에 세상 종말의 때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기 예수님이 오시는 이 대림절기에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첫 번째 비유인 ‘열 처녀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 열 처녀 비유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 25:1-6)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로, 그 차이는 기름을 잘 준비하였냐, 그렇지 않았냐입니다. 아무튼 신랑이 더디오므로 두 그룹 모두 졸았습니다. 그때 신랑이 온 것입니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 25:7-9)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슬기롭게 대답합니다. 함께 쓰기에는 부족하니, 차라리 사 오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또 미련하게 그 말을 듣고 사러 갑니다. 신랑이 지금 오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0-13)

안타깝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천국을 준비하는 신앙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천국 비유 세 가지를 전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두 번째 비유인 달란트 비유처럼 재능을 썩히지 말고 갑절로 키워야 하지만, 결국 천국은 그 재능을 어떻게 쓰는 것이라 하죠? 마지막 세 번째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처럼 지금 헐벗은 사람, 주린 사람, 나그네 된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을 돌보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따라서 참된 슬기는 자신의 것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이웃을 위해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나눔의 촛불을 켜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열 처녀 비유의 핵심은 늘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렇게 마태복음 25장의 천국 비유는 비유 세 개를 전체적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3.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사람

▲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7장 말씀은 여섯째 인 재앙과 일곱째 인 재앙 사이에 삽입된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재앙, 곧 “대환란을 견딜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냐?”라는 질문을 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그에 대한 해답으로 인치심을 받은 14만 4천 명, 곧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환난을 통과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 7:9-12)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구원받을 자를 다 셀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여기 나와 있는 숫자 14만 4천 명을 문자 그대로 이해합니다. 숫자의 상징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묵시문학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상징의 문자적 뜻이 아니라,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선전의 144,000명은 예수께서 씨 뿌린 밭에서 추수되고 인 맞아 12지파에 소속된,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함(출처: 천지일보)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숫자가 많이 나오죠? 7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일곱 촛대, 일곱별, 일곱 교회,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우레, 일곱 천사 등. 7은 완전한 수입니다. 충만을 뜻하는 수,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그러나 7에 하나가 모자란 6은 불완전한 수입니다. 부족의 수, 사탄의 숫자입니다. 따라서 6이 세 번 겹친 666은 가장 완벽한 사탄의 수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력을 666으로 상징합니다. 적그리스도가 그렇습니다. 제국 바빌론이나 로마, 그리고 그 통치자인 황제가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44,000이라는 숫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분해하면 12×12×1,000입니다. 앞의 12는 구약의 12지파이고, 뒤의 12는 신약의 12사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1,000은 무한대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신앙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44,000명은 숫자 그대로 144,000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3-14)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이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보좌와 그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5-17)

이것이 성경 말씀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책망하시나,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십니다.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 미가서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4.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주전 8세기 남 유다 예언자 미가는 유다의 제11-13대 왕인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해 멸망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미가는 고향 집에서 선지자의 소명을 받아 예루살렘의 방백과 백성에게 내릴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에 의해 다수의 가난한 백성들이 억눌리고 시달리는 현실에 분노한 선지자 미가는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미가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먼저 미가는 백성의 죄악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연단이 끝난 후,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따라서 미가서 하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라는 말씀이 떠오르게 되죠?

오늘 구약 미가서 본문은 세 번째 내용인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는 미가의 기도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줍니다. 먼저 미가의 기도를 들어볼까요?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미 7:14)”

▲ 갈멜산과 요단강 동편 바산과 길르앗

미가의 기도 내용에 갈멜 속 살림을 언급하죠? 이곳은 팔레스틴의 동남쪽입니다. 지중해에서 약 19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갈멜 산맥의 비옥한 초원지대입니다. 바산과 길르앗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 동편에 있는 기름진 초장입니다. 출애굽 후 가나안 입성 당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모세에게 이 땅을 기업으로 줄 것을 요구한 것도 이곳이 가축을 기르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미 7:15).”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미가가 다시 기도합니다.

“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미 7:16-17)

여러 나라가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기도하며 마지막으로 미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미 7:18-20)

이렇게 하나님은 죄를 책망하시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와 같은 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대림절 셋째주일, ‘사랑과 나눔의 촛불’을 밝히면서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우리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는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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