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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온 교회의 역사대상이 지정된 악(마태복음 5:44-45)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12.12 15:20
▲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적을 만들어 온 삶을 청산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Getty Image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이번 대림절 기간을 보내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감춰진 어둠, 이미 예수님을 통해 밝혔다고 생각해왔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어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우리의 교회가 지금까지 어떤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었는지 짧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모든 집단에는 그 집단이 가진 방향성,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당연히 그 반대에 있는 지양점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바를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사랑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사랑의 반대에 있는 ‘미움’ 또는 ‘질투’와 같은 모습을 경계하며 지양해야 합니다.

저는 기독교가 추구하는 바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기보다 이를 포함하고 있는 ‘선’입니다. 기독교의 지향점이 ‘선’이라면 그 반대에 놓인 지양점은 ‘악’이 됩니다. 교회는 과거로부터 선을 추구하도록 촉구하였으며 악을 따르지 않도록 경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듭니다. 기독교는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 악을 경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생각입니다. 선과 악은 모두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그렇기에 이 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 필요해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구제’였습니다. 직접적으로 남을 돕는 행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위를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행위의 반대에 놓여있는 악한 행위로는 ‘노략’, ‘착취’, ‘소외’ 등을 포함한 ‘폭력’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나 우리의 구제가 약자를 위한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폭력은 강자에 의해 휘둘러지는 폭력이 됩니다.

초대교회는 분명 우리의 행위에 대한 지침을 만들어갔습니다.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할지, 어떻게 폭력을 멀리해야 할지를 전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들은 복음서를 기록한 교회들이 가지고 있었던 행동 강령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지향하고 폭력을 지양하면서 행동 강령을 전달했다는 점은 이것이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스스로의 절제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전달되었다는 점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에는 절대적 강자의 폭력이 존재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폭력입니다. 바로 로마에 의한 제국의 폭력이었습니다. 로마는 이것이 평화를 지키기 위한 폭력이라고 말했지만, 속국인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강자에 의한 절대적 폭력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초대교회의 적대자는 유대교였다고 생각하지만, 초대교회가 유대교와 철천지원수로 적대한 모습은 그리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교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맞지 않는 존재였을 뿐이지 서로를 향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서 추방당한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유대교와 초대교회가 적대하고 다퉜을 때, 로마는 이 둘을 모두 로마에서 추방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유대교와 확실히 분리하기 전까지 로마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였을 뿐이기 때문이고, 이 둘 사이의 다툼은 로마의 평화를 깨뜨린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와 완전히 분리된 이후 초대교회는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강자에 의한 폭력이 그들의 눈앞에 뚜렷하게 보이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말하는 폭력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자기 자신의 삶을 절제하기 위한 지침이 아닌 실체가 분명한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어쩌면 이때부터 교회는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이야기하기보다 특정 대상을 악으로 지목하고 그들을 비판, 비난하는 일에 힘써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바라보고 이를 고쳐나가는 것보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이 훨씬 쉬운 일이고, 여기에 분명한 실체가 더해졌을 때,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폭력의 전형인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해버립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적, 악의 대상은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악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이 악의 대상,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후로도 유대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끊임없는 박해를 받습니다.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던 마틴 루터의 경우,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라는 책을 써서 유대인 학살에 명분을 주었고 이것이 독일 기독교인들의 사고 속에 깊이 박히게 됩니다. 어쩌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도 독일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악이고 폭력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세에 자행되었던 ‘마녀사냥’도 기독교의 적, 악을 어떤 실체를 갖춘 대상으로 지정하고 그들을 미워하고 그들에게 또 다른 폭력을 행한 일입니다.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적은 어쩌면 기독교에게 있어서 고마운 존재였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을 혹하게 만들 수 있는 악의 실체화를 가능하게 만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모습들은 거의 똑같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특정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각각의 교회가 이야기하는 악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가 강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마다 성도님들의 성향에 따라서 규정하는 악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규정된 악을 끊임없이 비난합니다.

‘기독교는 왜 끊임없이 적대자를 지목하는가?’ 하는 질문은 제 스스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생각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지향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양점도 있습니다. 추구점이 있다면 경계할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혼란을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지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지양해야 할 것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큰 혼란을 줍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의 말씀은 혼란을 주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것,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를 미워하며 그들에게 똑같은 폭력을 행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늘 폭력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 악은 어떤 대상으로 한정되어 왔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집단으로 악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폭력 자체가 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정한 어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나 집단이 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내가 휘두르는 폭력은 정당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얻고 있는 ‘지옥’이라는 드라마는 이런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종교, ‘새진리회’는 지금의 기독교와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이 드라마 속에서 이들이 자신들의 정의를 위해 휘두르는 폭력은 끊임없이 용인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과는 닮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폭력을 경계하고 폭력을 지양하라는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남 욕하라고, 남을 비판하라고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또 반대로 내가 선을 하라고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행하기보다, 내가 행하지 않기보다는 우리가 규정한 악을 행한 사람을 비판하는 데만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들을 향한 우리의 폭력은 폭력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우리의 정의’를 앞세우며 행하는 교회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삶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처음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이고, 초대교회가 복음서를 기록하며 우리에게 행동 강령을 전한 이유일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는 끊임없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본래의 기독교, 본래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인터넷 게시판에 ‘그 종교 또 그 짓 했네’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그 종교 요즘 많이 바뀌었는데?’라는 말들이 보이게 되길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아픔과 고통을 주는 종교가 아니라 많은 이들을 감싸고 회복시키는 우리 기독교,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로부터 시작되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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