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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아닌 필수말씀의 확실성과 강제성(신명기 30:19-2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12.19 14:02
▲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Getty Image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이번 주간은 대림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이번 토요일이면 성탄절입니다. 대림절 기간에 빛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예수님의 빛으로 우리의 어둠을 밝히는 기간이 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이 무엇인지를 계속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이기 때문에 지금 사회의 악,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보다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에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제가 전해드리는 설교 말씀의 내용이나 다른 목사님들이 전하시는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과 세상에서 명사들이나 특정 인물들을 통해 듣는 이야기들에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전부터 선배 목사님들께 설교에는 위로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습니다. 성도님들을 위로하고 마음에 힘을 주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힘을 드릴 수 있는 예화를 찾게 되고, 설교 본문도 그런 말씀이 가능한 본문을 찾게 됩니다. 시편이라던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본문을 위주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종교 단체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유튜브나 TV 프로그램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이야기와 지금까지 제가 들어왔던 설교 말씀들, 또는 제가 전하는 설교 말씀을 비교해보게 됩니다. 요즘에는 상담학을 공부하신 목회자 분들도 많이 계시긴 하지만, 목회자는 기본적으로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좋은 자료를 찾는다고 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나 그 자료를 직접 작성한 사람들에 비하면 부족한 이야기를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은 요즘 많은 분이 교회를 떠나가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꼭 교회에 나와서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삶에 위로를 얻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로가 아니더라도 삶의 방향성을 잡고 나가는데 목회자의 이야기보다는 사회에 수많은 전문가의 이야기가 더 도움이 됩니다.

또 설교 말씀과 이런 이야기들이 가진 차이점이라고는 성경 말씀에 기반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이상하게 해석되어서 전달되거나, 이야기 속에서 들러리의 위치밖에 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전부터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까 설교 말씀을 통해서 명사 특강 같은 이야기를 전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재미도 없고 크게 위로의 말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 자체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던 것도,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와 교회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고나서,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과 세상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 사이의 차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드라마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진 않겠지만, 이 생각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종교 단체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가진 가장 큰 차이점은 ‘강제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경전의 말씀과 교리를 지키고 따르겠다는 고백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그 종교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가 너무 교리적으로 전해진다면 지루하기도 하고 딱딱할 수도 있겠지만, 설교 말씀에는 항상 우리가 삶에서 지켜야 하는 지침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들은 신앙인들은 그 지침에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TV에서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 하자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막기 위해서 조금 더 환경에 신경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강제력이 없습니다.

지금도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가보면 제멋대로 버려진 쓰레기들이 많이 보입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버린 플라스틱 용기들이나 버려야 할 위치가 아닌데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버려진 쓰레기들도 있습니다. 물론 일반 쓰레기에 버리지 말아야 할 쓰레기를 버렸을 경우 벌금이 부과되기도 합니다만, 원리적으로 모든 쓰레기를 조사할 수도 없고, 그 쓰레기봉투 안에서 버린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제력이 있는 듯 하지만 큰 강제력이 발휘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런 말씀이 선포되었다면 그때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우리가 아끼고 보전해야 한다는 말씀이 선포되고,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선포되었다면, 이 말씀을 들은 성도님들은 당연히 이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해야만 하는 강제력을 띈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은 결과의 ‘확실성’입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으로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말씀을 청종하며 의지하는 이들에게 생명과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삶에서 안정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분명히 섭리하시리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확실한 것이 됩니다. 이런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 안에서 나옵니다.

말씀이 확실한 것이 되었을 때, 그 말씀이 가진 강제력은 더 커집니다. 드라마 ‘지옥’에서는 그 확실성이 현상 자체로 나타납니다. ‘당신은 언제 지옥에 간다’라는 천사의 고지를 받은 사람은 그 고지가 가리킨 정확히 그 시간에 사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분명한 현상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천사와 사자가 나타난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는 ‘새진리회’의 이야기는 강제력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확실성이 흔들렸을 때 발생합니다. 드라마 ‘지옥’에서 보여진 현상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많지 않습니다. 천사가 대상을 향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점, 세 명의 사자는 지정된 시간에 나타나 대상을 무참하게 죽인다는 점입니다. 천사가 말한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자들은 대상자를 왜 무참히 때려죽이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 현상을 본 사람들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지옥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고, 사자들이 보여주는 잔혹성은 천사가 말한 지옥이 끔찍한 장소일 것이라고 연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곳이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와 똑같은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또 이런 고지를 받는 대상이 어떻게 선정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새진리회’는 조금 더 정의로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정의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정의로우면 대상으로 지정되지 않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확실성이 깨졌을 때, ‘새진리회’라는 종교가 가졌던 강제력은 조금씩 흔들리게 됩니다. 드라마는 그 정도에서 끝나기 때문에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종교는 분명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확실한 무엇인가를 전달해 줄 수 없다면, 종교가 가진 강제력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앞에 놓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살아간다면 생명과 복을, 그렇지 않다면 사망과 저주를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말씀이 확실하게 와닿습니까?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우리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때로 아프고 때로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까?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섬겼을 때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고 재산이 늘어나게 됩니까?

이 말씀은 확실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를 확실하게 체험하는 경험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불확실한 이유는 우리가 말씀의 표면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명기가 복과 저주의 이야기를 쓰면서 긴 율법 조항을 나열하고 있는 이유는 그 율법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더 강제력 있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이런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명기 10장 12-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고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이후에 몇 가지 구체적인 진술이 따라 나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며’,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겉모습에 따라 돈의 흐름에 따라 정의를 굽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규례에 따라 약자를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복을 주시는지, 어떤 저주를 내리시는지 성경 말씀의 문자만을 읽어나간다면 그 이야기들은 지금 시대에 불확실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확실한 점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만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간단하게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질 것입니다. 이걸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꾸 이를 거부합니다. 선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호구가 될 뿐이고, 세상 속에서 바보 취급당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가진 돈이 적은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는 인터넷 밈은 이제 이 시대의 진리가 되어버렸고,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도 이런 생각을 품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는 돈이 더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하기에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 강제력을 거부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말씀의 표면에 나타난 복만을 요구합니다.

이 대림절 절기의 마지막 기간을 보내는 이 시간, 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이 기간에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그 확실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말씀이 아닙니다. 무조건 따르고 지켜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이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는 더 나은 곳이 될 줄 믿습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실천하는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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