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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낯선 땅에서 통일과 평화, 공존을 배우다이삼열 박사와 “해외에서 함께 한 민주화운동” ⑶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1.12.19 14:52
▲ 꿈많은 10대에 찾아온 기회, 낯선 땅을 방문하게 된 이삼열 박사는 그곳에서 통일과 평화, 공존을 배우고 평생 한 길을 걷게 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홍인식

16살, 이삼열 박사에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 이 박사는 그렇게 가게 된 낯선 미국 땅에서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던 일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스탈린 사후 조성된 소련과 미국의 평화와 공존이 휩쓸고 있던 미국 사회와 교회의 분위기였다.

특히 에큐메니칼 교회와 신학을 통해 차별과 분리를 넘어 평화와 공존을 어떻게 교회가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낯선 이방인들의 생각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때의 경험이 이 박사의 평생을 좌우하게 된다. 통일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박사의 음성으로 들어보자.

▲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신기한 것이 많았을 텐데요.

이삼열(이하 이):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대학 정문 앞에 웨스트민스터 하우스라는 게 있는데 거기는 기독 학교 장로교가 만든 대학생 기숙사예요. 거기서 한 주일 동안 거기서 머물면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습니다. 당시 해외에서는 다섯 나라의 학생대표가 왔습니다. 한국, 일본, 인도, 레바논 그리고 콜롬비아에서 왔습니다. 콜롬비아, 레바논 그리고 한국에서는 남학생이 인도와 일본에서는 여학생이 왔습니다. 거기에 미국 학생 대표 5명 등 모두 10명 학생이 석 달 동안을 같이 지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에큐메니칼 캐라반라는 이름이 붙인 것이죠. 한 주일 동안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너무 재미있었죠. 거기 춤도 배우고 춤도 추고 그 다음에 미국 학생 생활도 보고 교회도 가 보고. 그러면서 토론회에도 나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당시 에큐메니칼 토론의 주제는 ‘세그리게이션’(segregation, ‘분리’, ‘차별’) 문제였어요. 차별과 분리를 교회가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로 토론을 벌였어요. 그때가 1957년이니까 소련에서는 ‘후르시초프’가 집권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스탈린이 죽고 나서 핵무기 대결과 전쟁을 막고 평화 공존을 해야 된다 하는 주제가 나왔을 때였어요, 그래서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주제가 급격하게 부상되고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 혹은 대화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시대의 주제였지요. 에큐메니컬 토론 주제가 기독교와 공산주의 소련과 전쟁하지 않고 어떻게 공존하느냐 하는 문제와 미국 안에서의 흑백 인종 차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석 달 내내 그 토론을 했어요.

한주일 오리엔테이션 하고는 그 다음에 아이오와로 기차를 타고 사흘 걸쳐서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전국 장로교 고등학생들이 모이는 대회, 약 2천명이 모이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약 40 몇 개 주에서 버스를 타고 왔는데 이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주일 동안 강의 듣고 토론도 하면서 에큐메니칼 신학이라는 것도 들었죠.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강사가 와서 강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한국 소개하고 인사도 하고 그렇게 한 주일을 너무 재미있게 지내고 그 다음에는 또 각 주로 다섯 사람을 나눠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나는 오하이오 주에 가서 주 학생대회에 참석했는데 거기 가서는 개회 예배 때 설교까지 시키는 거예요. 한 이백 명 모여서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손양원 목사의 사랑의 원자탄 얘기를 가지고 우리 공산주의 하고 우리가 싸우지만은 이렇게 사랑으로 아들까지 포섭해서 한 얘기가 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한국 기독교가 많이 수난당하고 박해당하고 순교 당하고 했지만은 이제 우리가 사랑으로서 이걸 덮어야 된다. 그런 걸 가지고 내가 그렇게 설교를 했어요. 참석한 사람들이 전부 다 편지를 써가지고 사무엘 리가 앞으로 이런 훌륭한 목사가 되기를 바란다는 기도 편지를 주었습니다. 그때 만 16살 때였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 그 다음에 워싱턴 백악관에 가서 닉슨 부통령을 만나고 그랬습니다. 뉴욕 와서는 유엔 본부에 가서 루즈벨트 하고 또 두 시간 회의하고 토론하고 그랬습니다.

석 달이 나한테는 굉장한 교육이 되었고 그것이 나의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죠. 그러고 나서 생각하니까 ‘아, 내가 목사가 돼야 하나, 이런 걸 해야 되지 않나. 이런 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고민을 하면서 사실은 그때 ‘연세대 종교학과를 가라, 숭실대학교로 가라, 신학교를 가라’ 그런 충고와 제안들이 있었는데 ‘안 되겠다. 내가 인문학을 공부하고 철학 공부를 먼저 해야 되겠다.’ 그래서 문리대 철학과로 가게 되었지요.

▲ 결국 미국에서 가졌던 에큐메니칼 경험이 이 박사님을 철학공부를 하게 이끌었군요.

이: 그렇죠. 그런데 그 전에 저의 삶을 결정지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어요. 당시 외국, 일본에 가서 한 주일만 적십자 훈련하고 와도 조회 때 써서 발표를 시키곤 했어요. 미국에서 돌아오니까 나보고 강연을 하라고 15분 시간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금요일 조회 때 1200명 남녀 학생들 앞에서 미국에 갔다 온 얘기를 짧게나마 했지요. 그 자리에서 미국에서 듣고 배운 핵심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흑백 문제,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미국에 가니까 앞으로는 세계는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하고도 같이 대화를 해서 평화 공존을 해야 되겠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보고를 했더니 조회가 끝났는데 훈육주임이 나를 부르는 겁니다. 교무실에 들어갔더니 “야, 너, 엎드려 뻗쳐 무조건 엎드려.”라고 하면서 다짜고짜 몽둥이로 그냥 열대를 때리는 거예요. 그렇게 마구 때리더니 “너 미국 갔다 오더니 완전히 돌아서 빨갱이가 되고 공산주의자가 됐다”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때렸습니다. 너무 때리니까 우리 한병구 선생님(당시 담임선생)이 그만하라고 몽둥이를 뺐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덜 맞고 일어났는데 그러고 나니까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여튼 뭐 제가. 어쨌든 제가 잘못했습니다 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대가 조봉암 씨가 평화 통일하자고 해서 사형 당하던 때니까요. 그래서 그게 나의 필승의 과제가 됐어요.

사실은 미국에서 고등학생들 하고 얘기를 하면서 하룻저녁은 토론을 하는데 내가 한국은 6 25 전쟁과 공산당에게 피해를 봐서 기독교인들이 많이 순교를 당했다. 그래서 공산당들이 이렇게 나쁘게 해서 기독교가 대결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학생이 나보고 이렇게 묻는 겁니다. “너는 공산주의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느냐?” 그래서 나는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억압하고 자유를 없애고 하니까 당연히 악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그 학생이 “너 성경에 뭐라 그랬느냐,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이 있으면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주라 그랬지 않느냐 그런데 옷을 열 벌을 가진 사람이 헐벗고 있는 사람한테 안 주면 너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뺏어서라도 주라고 그랬다. 그래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열 벌 가진 사람들이 하나도 안 주는 걸 뺏아가지고 이쪽에 주는 것인데 그게 뭐가 나쁘냐?” 이러는 겁니다. 내가 할 말이 없어졌죠. 내가 그때 16살 때니까 뭘 알아요.(웃음)

그래서, 나는 이북에서 우리 피난 와서 순교 당하고 그런 얘기만 하면서 아무리 그래도 강제로 그렇게 하는 건 나쁘지 않냐 오히려 설득을 해가지고서 이렇게 주도록 해야지 하고 주장했어요. 그 말을 듣고 미국 학생이 이러는 거에요. “세상 사람이 그리 설득한다고 주는 줄 아느냐. 그거 안 낼 때는 굶어 죽는 것보다는 뺏어서 살려야 되지 않느냐 그게 바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다.” 내가 거기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충격과 더불어서 귀국해서 학교에서 보고하다가 선생님한테 매 맞은 것,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충격이 돼서 나를 고민에 빠지게 했습니다. 사실 대학을 신학교를 갈까, 연대 종교학과를 갈까 하면서 고민도 하고 있었고 아니면 차라리 그냥 서울대 정치학과로 가서 아예 정치적으로 나갈까 그렇게 고민 고민하다가 중간점을 택한 게 철학과였습니다. 당시 철학을 하고 나서 다시 신학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울대 철학과로 입학을 한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의 경험이 나를 이렇게 이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국의 경험이 결국 이 박사님을 오늘의 이 박사님으로 만드신 결정적인 게기가 되었군요. 그런데 왜 미국에서 유학을 하지 않으시고 독일에서 공부를 하셨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을 선호하고 있었을 텐데.

이: 그렇지요 그런데 사실은 제가 제대하면서 일단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려고 그랬어요. 예일 대학에 입학 신청도 해 놓고 있었어요. 당시 WCC 장학금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시 NCCK 장학금을 신청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유학을 전제로 하고 시험을 쳤어요. 당시 종로5가에 있는 미국 선교사 집에 가서 영어 시험을 치뤘지요. 그때 제가 2등을 했다는 거예요. 2등까지는 미국 유학을 가게 되는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미국 유학을 가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회부 간사가 나를 부르더니 지금 나보다 10년 위 선배가 아직 미국 유학을 못 가고 있는데 이번에 못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3등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사가 나보고 순서를 바꿔서 이번에 양보를 하면 다음 해에는 우선권을 주겠다 이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를 배제를 하는 거예요. 참 부당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뭐 내가 힘이 있어야지요. 이 분은 문리대 종교학과 나오고(나보다 한참 선배죠.) 프린스톤 간다고 그러는 겁니다. 나는 예일 간다고 신청했는데… 그래서 내가 간사에게 (그때 내가 제대하기 전에 시험 쳤으니까) “그러면 1년 뒤에는 나한테 우선권 주겠느냐. 확실히 약속해라.” 그리고 약속을 받고서 내가 양보를 했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크리스챤 아카데미로 들어간 것이죠. 양보 안했으면 크리스챤 아카데미에 들어오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 갈 뻔 했었죠. (웃음) 나로서는 제대하면서 바로 미국을 안 가게 되니까 그 일 년 동안은 내가 뭘 하느냐 하다가 결국은 아카데미를 간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67년 4월부터 아카데미 들어가서 일하고 다음 해에 다시 유학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1년을 일하는 동안에 독일의 클라인 목사도 오시고, 슈미트 박사도 오고 그러면서 독일 사람들하고 만나면서 독일어도 좀 해보고… 그런데 보니까 NCCK에서 독일로도 장학금 받아 갈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일하면서 유학이 1년 늦어진 것이 오히려 나로서는 너무 잘 된 거예요. 그러면 이번에는 독일 유학을 신청해보자 생각한 거예요. 독일유학을 신청했는데 세 사람이 신청해서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작년에 양보했지 않느냐 하면서 우선권을 주장했지만 이건 독일인데 또 다르다고 그러다라고요(웃음)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서 독일 유학을 신청했던 세 사람 모두가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68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장신대 이형기 교수 그리고 감신대 김광식 교수가 독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김광식 교수는 바젤로, 이형기 교수는 뮌스터, 그리고 나는 괴팅겐으로, 이렇게 세 사람이 독일로 가게 되었습니다. NCCK 독일 유학 첫 케이스예요. 하여튼 그렇게 당시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아기가 태어나고 정신이 없는데 아내와 아이를 한국에 놔두고 혼자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은 한국에 남고, 제 아내가 애 둘 맡겨놓고 여기저기 취직 하느라고 돌아다니면서 벌어먹어야 되니까 여러 가지 일 다 했어요. 이런 사연으로 미국이 아닌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내가 양보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그 선배하고 수 십 년 후에 한국에서 다시 재회를 했어요. NCC 활동할 때 만났지요. 통일위원회 할 때입니다. 그 분하고 논쟁도 하고. 그 분이 나를 완전히 공산주의자로 몰고 가고 기독교 NCC통일운동은 완전히 적화 통일론이다 하면서 반대 운동을 얼마나 했는지요.(웃음) NCC 88선언에 대해서 미군 철수를 주장한다고 반대하면서 이것은 적화 통일하자는 것이다 하면서 극력하게 반대하고 그랬지요.

한 번은 내가 영락교회에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임영수 목사가 담임 목사 할 때 내가 통일운동 하고 그러니까 임 목사님이 저를 부른 거에요. 임명수 목사님은 생각이 있는 분이잖아요. 한 번 와서 부목사들에게 강의해달라고. 그래서 내가 영락교회에 가서 부목사들 4-50명 모아놓고서 강의를 했어요. 임영수 목사님이니까 가능했어요. 그 다음에는 OCU (기독장교회)에서 오라고 해서 갔어요.

영락교회에서 모여가지고 하는데 내가 강연하다가 ‘신의주 학생 사건만 얘기하지 말고 우리 여수·순천 사건도 생각하고 우리가 공산당 당시에 공산당을 압박하고 사회주의자라고 해서 죽인 얘기까지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반공적인 얘기만 하는데 우리도 사상적인 탄압을 많이 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남북 갈등이 더 심화되고 요새 대결이 되고 그래서 지금 전쟁까지 하게 되지 않느냐. 이걸 헤쳐 나가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강연 장 앞에 있던 3성 장군 한 사람이 확 일어나더니 나가더라고요.(지금도 그 장군의 이름이 기억납니다.) 그러더니 몇 사람이 나가더라고요 이걸 강연이라고 듣느냐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내가 민망해 가지고 하여튼 겨우 마치기는 했어요.(웃음)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으로서 이렇게 정의 평화를 위해서 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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