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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의 하느님, 공평하며 편파적이다해방신학이란 무엇인가 ⑵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1.12.24 16:01
▲ William Blake, 「Casting the rebel angels into Hell」 ⓒGetty Images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해방신학은 신학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기 보다는 기존의 주제에 대한 관점과 해석의 전환을 꾀하고자 한다. 이에 나는 전통적인 신학의 주제에 대한 해방신학적 해석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해방신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될 것이고 따라서 지금 시대에서 해방신학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전통적 서구 신학의 하느님

전통적으로 서구 신학은 신에 대하여 말하면서 주로 그의 존재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 왔다. 신이 존재 양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다.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증명과 확신은 서구신학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 신학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론인가 혹은 무신론인가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오늘 우리 믿음의 유무를 결정짓는 매우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하여 무신론자들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진화론은 무신론자들의 과학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렇듯 신의 존재 여부는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강력한 주제이다. 이 같은 신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신학으로 신의 존재 형식에 대하여 말하도록 요구하였다. 신이 존재양식을 삼위일체라는 방식으로 해설하거나 혹은 예수를 신이자 인간이라는 존재가 되게 하였다. 신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가는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의 부재라는 주제도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신의 존재와 부재!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신학은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아우스비취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요즘의 시대에서 어떤 형태로 신을 믿을 수 있는가?” 등의 주제가 관심을 끌기도 한다. 최근 코로나 국면을 지나고 있는 세계는 또 다시 “신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신학은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입장에서 여전히 신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신의 존재 혹은 부재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해방신학은 어떤 하느님에 초점을 맞추는가

그러면 해방신학에 있어서 이 같은 신의 존재와 부제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라는 특수한 삶의 현장에서 발생한 신학이다. 지금까지 신의 존재와 부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신학적으로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그러면 라틴아메리카 신학 다시 말하면 해방신학은 신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까? 존 소브리노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theo-logia)은 신(Theo)에 대하여 말하는(Logia)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신’(Theo)에 대하여 말하는 것보다는 ‘신학’(theologia)에 대하여 더 많이 말을 한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그들의 글에서 ‘하느님’에 대한 언급보다는 다른 ‘신학자’들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음을 보고 있다. “신학은 ‘신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신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가?”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내용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존재 양식 혹은 부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과 그 현존의 내용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매우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체험한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 그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삶의 현장 한 복판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그리고 이러한 현장에서의 경험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혹은 부재가 아니라 우상 숭배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 혹은 부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떤 신(하느님)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생명의 하느님을 믿고 있느냐 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섬기고 화려한 성전을 짓고 체제의 안정을 추구하는 죽음의 신(하느님)을 믿느냐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부재가 아니라 어떤 신을 믿고 있는가에 대한 신의 내용에 대하여 질문하는 해방신학은 어떤 하느님(신)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신의 어떤 신일까? 이제부터 신에 대하여 말해보자. 어떤 신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내가 믿고 있는 신의 내용이 어떠한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나의 삶의 형태를 결정 짓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적 혹은 무의식이던 우리가 믿고 있는 신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해방신학의 하느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생명의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해 보자.

죽음의 위협과 공포를 넘어서게 하는 생명의 하느님

공포의 종교적 사용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인간은 공포로 싸여 있는 존재이다. 어떤 특정한 부류의 인간을 억압하기 위하여 공포의 요소를 사용한다. 권력은 사람들을 노예화하거나 속박하려고 할 때 공포요소를 사용한다. 권력자들은 정복야욕과 통치의 목적 혹은 지위 보호 혹은 확보를 위하여 공포요소를 교묘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종교 역시 사람들을 복종케 하기 위하여 공포의 사용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공포와 무서움의 요소들을 충분히 사용한다. 프랑스의 역사가 쟝 뒬리모(Jean Delumeau, 1923~2020)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어진 이 정책을 “공포의 목회”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공포의 우상이야 말로 우리 사이에 가장 폭넓게 퍼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언제나 또 다른 왜곡되고 비틀려진 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혼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슬며시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 했던 방법으로 돌연히 다시 나타나곤 한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과 생명이 아닌 공포와 죽음의 신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가장 거룩한 존재를 가장 추하고 두려운 존재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공포와 죽음의 신을 대항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정반대되는 개념인 사랑과 생명의 하나님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발견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명을 창조하고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생명의 하나님이었다. 아니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그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본 축적을 위한 소모품으로 밖에는 취급하는 신은 그들의 하나님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생명의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신도 그들의 신이 될 수는 없었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이 만나고 경험한 그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성찰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무엇보다도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생명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하느님은 매우 독특한 입장을 취하신다. 그것을 우리는 하느님의 편파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해방신학의 하느님은 편파적이다. 그는 편파성을 통하여 죽음과 공포를 넘어 생명과 사랑의 신임을 증명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 특히 출애굽기의 기록은 편파성을 통하여 생명과 정의와 사랑의 역사를 성취해 나가는 하느님을 보여준다.

해방신학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적인 입장(Neutral)으로 이해되는 공평을 넘어서 사회학적이며 실천적인(프락시스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공평은 단순한 중립적인 위치를 뛰어넘는다. 사회학적이며 실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는 공평은 오히려 편파적이다. 하느님의 공평하심은 그가 가난하고 약하고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 있음으로 진정한 공평함이 이루어진 다는 것이다. 편파성으로부터 출발되는 공평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죽음의 하느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생명의 편에 서 있는 분이시다. 해방신학의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혹은 죽음이 자신의 백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공평의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그리고 소외된 사람의 편에 서시는 편파성을 통하여 온전한 공평을 이루어 내고 있다, 하느님의 공평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냉정하고 차가운 공정함이 아니다.

하느님의 공평은 어렵고 힘든 자에게 더욱 가까이 하시고 힘을 주시고 격려 해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강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많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겸손함을 가르치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겸양의 훈련을 시킴으로서 결국 이 세상을 공평하게 다스리시는 공평하신 하느님이다. 해방신학의 하느님은 이 같은 편파성을 통하여 자신이 생명의 신임을 보여준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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