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인터뷰
시민사회운동, 새길교회 그리고 현대교회이삼열 박사와 “해외에서 함께 한 민주화운동” ⑷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1.12.26 15:49
▲ 학계에서 은퇴한지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학문에 매진하고 있는 이삼열 박사. 그의 열정은 학문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해 여전히 열려 있었다. ⓒ홍인식

이삼열 박사와의 인터뷰의 긴 길을 이제 마무리 한다. 16살, 우연하게 밟게 된 낯선 땅에서 보고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 이 박사에게 이 길은 평생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되었다. 차별과 배제를 넘어 포용과 배려, 더 나아가 엄혹한 한국 사회에 통일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박사는 이 길을 가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이 박사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정치권으로 부름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름에 응답해 정치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이상이 담겨 있었기에 응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돕는 역할로 자신을 한정하고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의 본분에 맞게 교회를 생각하며 새로운 교회 모델을 찾고 형성하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아마도 가본적 없는 이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분열도 있었고 상처도 받았다. 그럼에도 이 박사는 여전히 교회를 향한 애정을 가지고 살고 있다. 또 여전히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이 박사님의 생애를 회고록 형식이던 대담 형식이든 써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질문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 박사님은 학계에서 학자로서도 명망이 있으시고 교계에서도 어른이시고 WCC 중앙위원으로도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회단체,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내외 여러 단체에서도 많은 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근데 한 가지 안 한 것이 있습니다. 정치입니다. 왜 정치계에서는 활동을 안 하셨습니까? 물론 개혁신당에 잠시 참여한 적이 있으시기는 하지만…

이삼열(이하, 이): 1995~96년 당시 이부영, 제정구, 이철, 유인태 등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이 이제 양김 씨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3김을 청산하고 이제는 새로운 걸 해보자라는 생각을 갖고 개혁신당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시민사회도 함께 참여해 달라고 해서 그 때 한 번 잠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거기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참여해 달라고 해서 참여연대 사표를 내고 개혁신당 만드는 데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수직을 하면서 국회의원은 안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고 개혁신당의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개혁신당이 통합 민주당으로 바뀌게 (일명 꼬마 민주당) 되었습니다. 그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대표하고 내가 정책의장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1996년 4월 15일에 총선에서 11.2%의 지지를 받았어요. 국회의원 15명을 당선시켰습니다. 9명이 지역구에서 되고 전국구로 6 사람이 됐는데 사실은 내가 정책위원장이니까 나가겠다 하면 나갈 수 있었고 국회의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때부터 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여성으로 이미경 의원홍보 위원장 하던 분이 들어가고, 그리고 이수인 씨가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전국구 의원으로 모두 6 사람이 되고 나는 빠졌습니다. 난 교수 생활을 끝까지 하겠다는 생각 속에 거절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제 아내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임명을 하려고 그랬지만 아내가 다 사양을 했지요. 제 아내가 그때 막 박사학위 마치고 마침 효성여대 교수가 됐는데 당 부총재를 하면 아무래도 교수직을 그만 둬야 하잖아요. 제 아내는 교수하고 여성 운동해야 된다면서 거절했습니다. 차라리 정 필요하면 여성 위원장을 맡겨서 강연을 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정치가는 안 된다고 사양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불러서 도와달라고 그랬는데 그 때도 저는 정치인이 아니라 그냥 시민사회와 학계에 머물러서 활동하겠다고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어요. 만약 정말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는 그런 거면 내가 교수직 버리고 들어갈 수도 있지요. 어떤 잡지에 낸 글에도 썼지만 우리가 정말 올바른 그런 정당 세력을 만들어가지고 하면 좋은데, 내가 꼬마 민주당 하면서 정치판의 실상을 보았잖아요. 공정한 실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닌 거죠. 정치에는 다 그렇게 돈이. 그러니까 다들 뭐 몇 천만 원씩이라도 내고 그렇게 가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그런 거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한국 정치는 나로서는 참여하기가 어려운 판이 되었어요.

안병무 박사는 나에게 “이 박사 정치해. 지옥 갈 생각하고 정치해. 정치는 지옥 갈 생각하고 해야 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걸 못하겠더라고요. 지옥 갈 생각을 못하고. 그러고 나는 교수 생활하면서 내가 원래 목사 돼서(목사는 못 했지만) 살려고 했던 사람인데 정치는 안 되겠다고 고민을 하면서 못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독일에서와 같은 제대로 된 사회민주주의하면서 그렇게 할 때는 사회민주당 같은 걸 만들어서 하면은 내가 들어가서 정책 만들고 내가 국회의원 안 되더라도 정당 생활을 할 생각을 했거든요. 그랬는데 지금까지 그런 기회가 안 왔어요. 그래서 결심을 하고 일단 하여튼 정당 만드는 것까지는 할 수 있는데 직업 정치인은 안 하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 제가 이 질문을 드린 것은 이 박사님 주위의 친구들, 동지들, 동료들이 다들 장관도 하고 총리도 하고 그러는데 이 박사님은 아무 것도 안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웃음)

이: 분명히 제가 생각할 때는 정부에 들어가서 무슨 장관 1~2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유네스코 사무총장 4년 한 것이 훨씬 낫다고 봅니다. 정치라는 것이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하지 않은 거지요. 서로의 경쟁도 그렇고 아부하고 또 갖다 바쳐야 하고 등등. 만일 제가 정치를 하겠다고 하였으면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 했을 수도 있어요. 두 분이 다 저를 그때 부르기도 했었고 그러는데 결국은 나중에 뭐 3김 청산하자는 그 정당 만드는 데 가서 정책위원장을 했으니까 그 정당이 집권을 했으면 또 뭐 혹시 내가 뭐 한 자리 했을지 모르지만 국회의원 15명 가지고서는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한 거죠. 그리고 나중에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 당과 통합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흡수되고 말았죠. 그 덕에 노무현 씨는 대통령까지 됐죠. 우리나라 정치라는 게 아직 수준이…

그런데 당시 에큐메니컬 운동 하던 분들이 김대중-김영삼 정부시절에 많이들 정치계로 나감으로써 상대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이 욕먹은 것도 많아요. 자리 차지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죠. 87년 민주화가 되면서 기독교가 상당히 많은 공헌을 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드는 데 가담을 하고 조인을 했었어야 돼요. 당시 목사들은 할 수 없지만 평신도나 또 언론을 하던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어서 우리가 민주화를 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양김 세력이 갈라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따로 뭉쳤어야 되는데 서로 서로 갈라져 버렸단 말이에요. 일부 사람들이 그러니 이게 잘못인 거죠. 기독자민주동지회의 잘못이에요. 이걸 제대로 통제를 했어야 되는데. 사람들이 말을 듣나요. 다들 인간관계가 있으니까. 뿔뿔이 해어지고 갈라져서 서로 그다음에 대립이 되고 이러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 참에 정치는 멀리하고 이제 우리는 시민운동이나 하자 이렇게 된 거죠.

어떻게 보면 비극이죠. 그러니까 내가 뭐 결국 이 판국에 교수나 어떤 시민사회에 있는 것이 낫겠다 해서 정치에 참여 안 했지만은 당시에 사실은 정말 나라를 위해서 정말 필요하면 난 사회민주당을 만들 준비하고 있었고 그런 논문도 썼고. 당시에 사실 새로운 정당을 창당 할 수도 있었는데 서로 뭉쳐지지 않고 갈라지니까 그리고 둘이 갈라져서 둘이 다 실패하는 걸 보고 저는 YS에게도 DJ에게도 안 간다라는 결심을 했어요. 저로서는 3김 청산한다는 정당의 정책위위원장으로 활동한 것이 정치계의 유일한 경험이었어요. 1년 동안 활동했지요.

▲ 이 박시님에게 그런 정치적 경험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정치인으로 활동하지 않으신 것이 저에게는 좀 아쉬운 마음도 들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정치라는 게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아쉬움은 없으신지요?

이: 네. 사실 그렇기는 한데 그런데 사회 변화는 정치인이 되서만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민운동을 통해서도 가능하죠. 그래서 우리가 참여연대 만들어가지고 많이 공헌했고 또 시민사회 경실련도 그렇고 또 예를 들자면 평화 통일 운동은 기독교가 앞장서서 한 겁니다. 88선언을 통해서. 그래서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빛정책도 기독교 운동이 밑받침 되었죠. 우리가 88선언에서 미군 철수 얘기도 하고 평화협정 얘기도 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이것도 중요하다. 이 자리를 지키는 것도 굉장히.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사회 운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 아닙니까.

▲ 어찌 보면 그게 바로 정치인 것이죠.

이: 그러니까 이제 기독교 민주화 운동을 하고 기독교 평화 통일 운동을 하는 쪽으로 나는 자리를 잡고 나가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소신이 되고 그리고 사회선교 하는 기독교 사회발전위원회 만들어가지고 이제 또 지원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다리를 놓으면서 결국은 교회로 하여금 사회 개혁에 앞장서게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데 앞장서게 하는데 교회만 가지고 안 되니까, 사회 운동 기독교적인 사회 운동을 이끌어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나의 주어진 사명의 소명이 아닌가. 그래서 제가 목사도 못 되고 정치인도 못 되었지만 주어진 자리에서 사회 변화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일하고자 합니다.

▲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박사님은 순수하게 시민사회와 학자로서의 자리를 지켜오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쪽에서 잠깐 얘기를 하면 새길교회와 현대교회가 합치잖아요. 그러다가 2년인가 3년 있다가 또 이제 갈라지지 않습니까. 그때 이 박사님과 조창현 박사님은 나가시지 않고 현대교회에 머무르셨습니다. 그 때 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이: 다시 새길교회를 시작하게 된 상황은 이렇습니다. 제가 82년도에 독일에서 돌아왔어요. 그리고 숭실대학 교수가 되고 자리를 잡았는데 교회를 어디 나갈까 하는 걸 가지고 고민을 했었을 때 옛날 동신교회로는 못 돌아가겠더라고요. 거기는 너무 보수적이고 또 이북에서 온 사람들 중심으로 되고 반공적이고 또 재벌 장로들이 있고.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거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완상 박사와 얘기를 하니까 자기가 나가던 청담교회를 나가라고 그러셨습니다. 당시 고 조남기 목사가 담임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한원상 박사는 그때 내가 돌아오니까 막 미국으로 가버리고 말았어요. 당시 청담교회에 홍성우 변호사가 장로로 있었고. 그래서 내가 거기를 출석했습니다. 집사 임명도 받고 하면서 한 1~2년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84년인가 그랬는데 한완상 박사가 귀국하셨어요. 돌아와 가지고 그 분이 압구정 현대교회 설교를 맡았어요. 당시 서광선 박사가 목회하다가 그 분이 이화여대로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완상 박사가 설교를 맡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현대교회도 다니고 청담교회도 적을 두고 다녔지요. 그러는 와중에 한완상 박사가 설교자로 있었는데 86년에 한 2년 하다가 현대교회에서 설교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 평신도가 설교하느냐라는 노회의 비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박사가 그만두면서 고민이 돼 가지고 평신도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평신도들이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그러면서 나를 불러가지고 우리 같이 이렇게 해보자.’라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당시 나도 그런 생각이 좀 있었고 그래서 한 박사와 현대교회 다니는 길희성 박사를 비롯한 한 20~30명이 나왔어요. 조창현 박사도 거기 있다가 나왔습니다.  나는 당시 현대교회 소속은 안 됐지만은. 청담교회를 출석하는 교인이었지만 한완상 박사와 우리끼리 한 번 이렇게 해보자라는 의기투합해서 만든 교회가 새길교회입니다.

그래서 평신도 교회를 하면서 기성 교회하고 너무 이렇게 부딪히면 안 되니까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되었죠, 더욱이 나는 예장 목사의 아들이고 또 소속 교회가 예장 교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고 독립교회로 있으면서 기성 교회하고 충돌하지 말자. 꼭 11시에 예배드릴 필요 없지 않느냐라고 주장하면서 오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길교회는 예배를 오후 4시에 드리기로 하고 그 대신에 어느 교파든지 어느 교단인지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오전에 각자 자기 교회 나가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새길교회로 오면 된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환영한다는 기치를 내세웠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처음에 현대 교회에서 나온 사람은 2~30명이었는데 조금 있으니까 7-80명을 넘어 100여명 이상이 모이게 되었어요. 그래서 강남 YMCA 건물을 빌려가지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새길교회에는 한원상 사회학, 길희성 종교학, 그리고 이삼열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 안에 신학자가 한 사람은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대로 모셔온 분이 김창락 교수입니다. 당시 그 분이 목사 안수는 안 받았지만 신학자니까요. 그리고 네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설교하는 걸로 결정하고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모여서 준비를 했어요. 새로운 기도문도 만들고 교회 이름도 새길교회라고 지었습니다.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자 신문에서도 보도를 하고 그런 연유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죠. 대학 교수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대학 교수들만 70명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다른 교회 나간 사람도 자유롭게 오곤 했어요. 사실 나는 이런 형태의 교회를 발전시켰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로 했어야 되는데 한 2~3년을 그렇게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주일 학교도 해야 되고 등등. 일반 교회처럼 해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미가 붙으니까 문정동에다가 한 이백 명 모일 수 있는 교회당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도 청빙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한 분을 모시고 하니까 조금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기존 목사님의 설교가 평신도 설교자들하고 좀 다르니까 평신도 설교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교회가 몇 번 갈리기도 하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렇게 87년에 시작해서 91년까지 5년을 유지했죠.

그런데 92년도에 현대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1년에 한 사람씩 목사가 갈리는데 교인들이 다 나가버리죠, 20~30명이 새길교회로 나왔지. 나머지 사람들이 있었는데 또 누가 왔다가 또 나가고, 나가고 하니까 최승웅 장로가 유일하게 남아가지고서 교인 열 몇 사람을 데리고서 이제 교회를 도저히 유지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최 장로가 새길교회와 합치자라는 제안을 합니다. 당시 새길교회에서는 여러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이름을 새길교회로 해야 한다, 기존 노회에서 탈퇴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야 한다. 이 제안을 현대교회가 받아들이고 92년에 새길교회와 현대교회가 합쳤습니다. 새길교회는 문정동 교회당을 나와서 압구정 현대교회로 들어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93년에는 교인이 250명이 넘었어요.

그렇게 한 2년 지났는데 조성기 목사가 담임 목사로 왔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이제 담임 목사가 있으니까 우리가 평신도교회를 하자고 그러지만 그래도 조성기 목사에게 한 달에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 정도 하고 우리 평신도는 매달 하지 말고 그냥 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씩 하자고 절충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새길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성 교회도 아니고 평신도 교회도 아니고 그냥 엉망이다라는 겁니다. (웃음) 그리고 약속대로 왜 교회 이름을 안 바꿨느냐라는 반발이었습니다.

나는 고민 끝에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스위스의 어떤 교회의 예를 들었어요. 그 교회는 신학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오전에는 보수적인 예배를 보고 오후에는 진보적인 예배드리니 우리도 오전에는 기성교회처럼 이렇게 목사 중심으로 하고 오후에 평신도 중심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 하고 절충안을 냈습니다. 예배를 둘로 나누자. 그렇지만 결국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몇몇 분들이 평신도교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렇게 해도 되느냐 그러면서 어느 날 우리 나가겠다고 선언을 하더라고요. 근데 난 거기에 참여를 안 했어요.

그래서 일단 나가기로 한 사람은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나간 다음 첫 주일에 예배드리는데 교인이 20 명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가 나가서 설명을 하고 우리가 그래도 이 교회를 지키자고 말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조성기 목사와 다시 재건하자는 결의를 다지고 노회 탈퇴했던 것을 다시 복귀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교회가 존재하게 되었죠.

▲ 이렇게 이 박사님이 교회를 열심히 지켜 오셨는데 한국 교회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 진짜 어려운 얘기입니다. 아마 기존의 형태로 유지해 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지금 너무 많이 지금 붕괴가 되고. 갈등이 생기고. 예장만 해도 총회가 제대로 유지가 안 되지 않습니까. 희망을 다 잃었어요. 이제 뿔뿔이 흩어지든가 뭐 그래야 되는데. 새로운 전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차라리 예를 들면 명성교회는 명성교회대로 그렇게 나가고 그리고 갈라지더라도 이제는 아예 노선과 정책을 분명히 하는 그런 교회와 그냥 이대로 머물면서 정치나 하는 보수적 교인과 교회하고 결국 분리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야 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운동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생각들은 많이 있지만 교회가 워낙 보수적이고 그러니까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성의 큰 교회들도 지금 타격을 많이 입고 있죠. 그러다보면 기성 교회들이 약화되고 그렇게 되면서 혁신적인 교회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를 해보는데 모르겠어요. 우리가 다시금 평신도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그런 교회를 새로 만들어야 할지. 그래서 좋은 모델을 좋은 모델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난 그래서 이제 홍 목사님이랑 몇몇 분들하고 우리가 한번 시작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앞으로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아요. 우선은 인터넷으로만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이제 정말 필요하면 뭐 한 100명 정도 200명 정도 모이면 장소 빌려서 예배드리고 그렇게 하면서 지금 순천에서 하시는 모델같이 영성적인 운동하는 그런 공동체 같은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저도 동의합니다. 이 박사님과 같은 어른들이 뒷받침을 해 주시고 50대를 중심으로 해서 3~40대가 모이는 교회, 그런 공동체를 꿈꿔봐야 되겠네요. 그런 모델을 서울에서 하나 잘 만들면. 또 지방에서도 확산될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운동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이: 감사합니다. 해외민주화 운동을 비롯해서 삶과 교회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홍 목사님하고 현대교회를 함께 할 때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