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이넘아~~~”작은 틈(사사기 8:22-27)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1.12.28 16:18
▲ Maerten van Heemskerck, 「Gideon Destroying the Army of the Midianites」 (1561) ⓒWikimediaCommons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늘 말씀드리지만 평안은 우리 외부의 상황과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평안이 어떻게 외부의 상황과 관련이 없을 수 있죠?’ 이 질문에 늘 같은 대답을 드리게 됩니다. 외부의 상황에 의존하는 평안이라면 쉽게 깨어질 뿐만 아니라 너무나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평안은 완전한 평안입니다. 이 세상이 생각하는 평안과는 다릅니다. 이 평안은 언제나 우리 내면에서,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평안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평안을 선택 할 것이냐 아니면 외면하고 피해자 놀이를 계속 할 것이냐의 선택입니다. ‘피해자 놀이’라고 말씀 드린 이유는 평안을 선택하기로 결정하면, 평안을 누리기로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면, 평안을 바로 누릴 수 있는데 그렇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관심이 필요해, 나는 사랑이 필요해, 나는 인정이 필요해, 나는 무엇 무엇이 없어, 나는 저 사람보다 뭐가 부족해, 내가 이렇게 된 건 저 사람 때문이야, 내가 그 때 그런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등등. 언제나 피해자 놀이에 열중하며 스스로를 불안한 상태로, 결핍된 상태로 존재하게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고, 평안을 다시 선택하지 않고 불안과 결핍을 그대로 방치하면 계속해서 잘못 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드온이 바로 이런 예시가 됩니다. 기드온은 외부의 상황, 조건들에 초점을 맞추어서 자신을 보았기에 스스로를 모자라고, 결핍되고, 약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사사기 6:15 “기드온이 주님께 아뢰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는 힘센 장사야!”(사사기 6:12) 라고 불러주셨지만,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스스로를 불안하고, 약하고, 결핍된 상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기적, 표징을 통해 확인 받고자 했습니다. 외부의 조건과 상황들에 시선이 가 있는 기드온은 결국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에게 없다고 여기는 것,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을 채우기 위해 실수를 하고야 맙니다.

본문 말씀을 제가 다시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22 그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23 그러나 기드온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24 기드온은 말을 계속하였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각 사람이 얻은 전리품 가운데서 귀고리 하나씩을 나에게 주십시오.’ 미디안 군은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모두 금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25 그들은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겉옷을 펴고, 저마다 전리품 가운데서 귀고리 하나씩을 거기에 던졌다. 26 그의 요청으로 들어온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나 되었다. 그밖에도 초승달 모양의 장식품과 패물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주색 옷과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다. 27 기드온은 이것들을 가지고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가 사는 오브라 성읍에 두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 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겨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에 올가미가 되었다.”

‘당신이 우리를 다스려라!’라는 요청에 기드온은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전리품 가운데서 귀고리 하나씩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이 전리품으로 무엇을 만듭니까? 에봇 하나를 만듭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입던 옷입니다. 이 에봇을 자신이 사는 성읍에 걸어 둡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 성에 와서 음란하게 섬겼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기드온이 말로는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라고 했지만 실은 온 이스라엘로부터 인정받고 싶었고, 자신을 섬겨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기에 오늘 본문에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에 올가미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많은 일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고백했던 자신의 처지, 끊임없이 외부로 향했던 시선이 변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가문이 약했고, 형제들 중에서도 어렸기에 인정받지 못했던 세월들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었는지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도록 했습니다. 이게 바로 ‘작은 틈’ 입니다. 스스로를 결핍 된 존재로 여기는 것, 만드는 것, 이것이 ‘작은 틈’입니다.

사실은 큰 문제이지만 ‘작은 틈’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문제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핍이 사실은 문제의 본질이고, 그래서 큰 문제임에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의 무엇이 ‘작은 틈’을 만드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가문의 차이가 전쟁에서 승리와 관련이 있던가요? 형제 중에 가장 어리다는 연약하다는 점이 승리와 관련이 있던가요? 하나님과 동행할 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외부의 상황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 문제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무가치하게 여겨집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 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우리 자신의 과거, 상처 등은 살아가는데 있어 족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 모든 것을 덮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을 부추겼습니다. “22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기드온의 ‘작은 틈’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아닌 척 했습니다. 기드온의 ‘작은 틈’으로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계속해서 흘러들어갔습니다.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한 과정을 보면, 이스라엘의 적군 13만5천명을 치기위해 하나님이 남겨두신 백성은 300명이 전부였습니다. 300명으로 13만5천명을 상대했는데, 12만 명이 죽었고 1만5천명만이 남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사기 8:10 “그 때에 세바와 살문나는 겨우 만 오천 명의 군대를 데리고, 갈골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사막 부족의 군대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들인데, 이미 칼 쓰는 군인 십이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 3만2천 명 중에 300명만을 남기신 이유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사기 7:2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 너의 강함도 약함도 아니라 전적인 나 하나님이 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양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통장에 잔고가 좀 넉넉해야 하늘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 자녀가 잘되어야 하늘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동네에서 인정을 좀 받아야 하늘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 의견대로 일이 진행되어야 하늘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 기도대로 되어서 근심이 좀 없어야 하늘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눈물을 흘리면서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양하며, 고백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얼마나 위선적인 모습입니까?

목사님들을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하게 되면 이런 말씀을 저에게 많이 하십니다. “거기 몇 년 있다가 올라와야지.” 아니 제가 올라가기는 어딜 올라갑니까? 남한에서 가장 최북단에 있는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어딜 더 올라갑니까. 북한에라도 가라는 소리입니까?

이 한 마디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서 다 설명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시선을 외부로 돌리지 않고 내면의 평화를 선택하는 사람은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로 고백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작은 틈’은 메꾸는 게 아니라 지우개로 지우듯 지움으로 사라지게 해야 합니다. ‘작은 틈’은 실제로 벌어진 것이 아니라 벌어진 것처럼 스스로가 여긴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살이 찢어져서 난 틈이 아니라 종이에 그려낸 틈에 불과합니다.

자꾸 외부로 향하는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외부로 향할 때 계속해서 누군가와 비교하며 자신의 틈을 그려가기 때문입니다. 기드온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가문과 자신의 가문을 비교하고, 형제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작은 틈’을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잘못 된 선택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결핍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닙니다.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결핍될 수가 있고, 부족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구걸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미 우리 안에 충만하게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가 부족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피해자 놀이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만한 사랑과 인정과 평안이 이미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외부가 아닌 내면을 바라본다. 내면을 바라보면 다 있다.’ 어렵게 느껴지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나오며,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연합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는 도우시는 손길을 경함하게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친구 목사님의 아버지 목사님이 겪으셨던 일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마달리 정도 될까요. 시골 농촌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겪으신 일입니다. 교회 바로 옆집에서 담벼락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 하시는 분들이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교회 쪽으로 버리더라는 겁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니 기분이 나쁘고 거슬리셨습니다. 그 때마다 ‘그래도 목사인 내가 참아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으셨다고 합니다.

한 주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성도님들에게 전하시고서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왔는데 또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선포했음에도 이날따라 화가 너무나 나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 하는 사람들이랑 한바탕 해야겠다 싶어 공사 현장을 향해 가는데, 마침 교회 옆에 외양간에 있던 소가 ‘음머~~~’하며 울더라는 겁니다. 소의 울음소리인 ‘음머~’가 마치 ‘이넘아~~~~’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원하는’, ‘소망’하는 성도에게는 깨달음을 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과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이런 원함이 있었기에 ‘음머~’가 ‘이넘아~’로 들렸다고 믿습니다.

2021년을 마무리 하면서 내면이 아닌 외부에 시선을 끊임없이 두고 ‘작은 틈’을 그려내고 이 틈을 채우기 위해 헛된 노력과 선택들을 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2022년에는 이 ‘작은 틈’이라는 허상을 지워내는, ‘작은 틈’이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한 해로 만들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